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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음악가 이야기

바이올린의 황금기를 장식했던 숨겨진 보석들 - (4)마이클 래빈(Michael Rabin), 요제프 하시드(Josef Hassid)

by onekey 2024. 3. 1.
박제성2013-08-28 15:46
추천 45 댓글 0
 
황금빛 이카루스의 날개, 마이클 래빈

다비드 호크슈타인, 슈테판 파르토스, 죠세프 볼프슈탈, 지네트 느뵈, 오시 레나디, 줄리안 시트코베츠키 등등 20세기 초중반에는 하늘이 부여한 환상의 하프를 제대로 켜보지도 못한 채 그 강렬한 광채를 잠깐이나마 발산하고 생을 마감했던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즐비했다. 이러한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요절 계보에 무릇 으뜸인 바이올리니스트를 꼽으라면 아마도 지금으로부터 70여년 전에 태어난 마이클 래빈(Michael Rabin)이 첫 손에 꼽힐 것이다. 특히 그는 생을 마감하기 이전부터 그 색이 바라며 그 이카루스의 날개가 서서히 녹아떨어지는 모습을 우리는 지켜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더욱 연민의 정을 느끼곤 한다.
1936년 5월 2일 뉴욕에서 태어난 래빈은, 유럽에서 교육, 활동했던 메뉴힌과는 달리 전적으로 척박한 미국 음악 풍토에서 자생한 최초의 스타급 바이올리니스트다. 펄만과 주커만이 나타나기전까지 약 25년동안 바이올린계 분더킨트의 선두로 자리매김했던 그는 아홉 살부터 율리앙 카페의 제자인 이반 갈라미언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다. 신동 제조기로서 20세기 바이올린 교육계에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끼친 갈라미언은 래빈을 가리켜 최고의 제자임을 누누이 강조하곤 했다.

1950년 열네살의 나이로 카네기 홀에서 데뷔 연주회를 치룬 래빈은 파가니니와 비네야프스키, 뷔에땅 등의 난곡을 연주하여 곧바로 진정한 천재로 각광을 받았고, 이후 뉴욕 필과의 협연을 수차례 가짐과 동시에 유럽 연주회 투어를 통해 청중들과 비평가로부터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바이올리니스트로 인정받았다. 오직 독주자로서, 일체의 우여곡절도 겪지 않은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은 래빈은 이렇게 1950년대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연주회, 레코딩, 영화나 쇼프로와 같은 여러 상업적 활동 등,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았던 그에게도 시련의 시기가 다가왔다. 모든 예민한 바이올리니스트들이 겪어야 하는 정신쇠약과 우울증을 겪으면서 1960년 이후 그의 금빛 톤과 실랄한 천재성은 점점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바이올린 자체에 대한 흥미를 잃기 시작한 래빈은 폭음과 마약으로 인해 점점 집중력과 테크닉이 저하하기 시작했고, 휴지기를 가진 뒤 60년대 후반 다시 복귀하여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미건조한 연주로 듣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 1972년 1월 자신의 아파트에서 추락사한 채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공식적으로는 추락사고사였지만, 아마도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갈라미언은 애제자의 불운한 죽음에 맞서고자, 양탄자에서 미끌어져 테이블에 머리를 부딛힌 탓에 죽은 것으로 애써 믿고싶어 했다고 한다.
긴 손가락과 넓은 운지, 강한 근육과 완벽한 절제력을 겸비한 타고난 바이올리니스트였던 래빈은 부드러운 톤과 비상하는 듯한 프레이징을 바탕으로 강도는 비교적 약했고 조금 느린 듯한 비브라토 등을 구사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철저한 비르투오소로서 거쳐야 할 지옥과도 같은 스케일과 슬라이딩 주법을 반복 연습하여 천부적인 재능에 인간적인(?) 노력을 더하였다.
 
1737년산 과르넬리 델 제수를 사용한 그는 전반적으로 부드럽고 온화한 기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젊은 시절, 즉 스무살 중반 이전 레코딩을 들어보면 그가 얼마나 세련되고 독창적인 개성을 가졌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6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테크닉도 많이 떨어지고 해석 또한 평범하기만 한 연주를 들려주었을 뿐이다. 사실 그는 72년 서른 둘의 나이로 세상을 떳지만, 그의 음악적 생명력은 이미 20대 중반에 생을 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공을 향한 창백한 아름다움, 요제프 하시드

아마도 요제프 하시드(Josef Hassid)라는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아려한 슬픔이 가슴 속에 번져오는 경험을 한 번쯤 하지 않은 사람을 없을 것이다. 그의 인생은 유성이 반짝거리면 금새 지나가버리듯 비정할 정도로 짧았던 그의 존재는 순수함 그 자체였다. 78rpm으로 불과 아홉 개의 녹음만을 남겼지만, 그들 음악은 박인환 시인의 시 ‘목마와 숙녀’의 마지막 구절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의 바로 그 가을 소리와 다름 아니다. 20세기 바이올린 역사 가운데에서 하시드야말로 가장 경이적인 재능과 비극적인 요소를 동시에 갖춘 유일한 인물이었다.
1923년 12월 28일 폴란드에서 태어난 요세프 하시드는 어머니를 일찍 여윈 뒤 아들의 재능을 알아챈 아버지의 엄한 교육하에 성장했다. 열 살에 바르샤바 음악원에 입학하자마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1935년 12살의 나이로 참가한 비네야프스키 콩쿨에서 명예 디플로마를 받았다.
이렇듯 천재성이 두드러졌던 그에게 자신을 바른 길로 인도해 줄 구원자가 나타났다. 칼 플레쉬가 바로 그로서 하시드는 체계적인 테크닉 훈련을 받았고 더불어 음악의 깊이에 한층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30년대 후반까지 플레쉬를 사사하는 동안 티보와 크라이슬러 시게티 등이 이 소년의 연주를 듣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1940년 봄 영국 위그모어홀에서 리사이틀, 퀸스 홀에서 협주곡으로 데뷔 무대를 성공을 가진 뒤, 전쟁 발발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영국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가끔씩 건망증을 겪곤 했는데, 당시 차이코프스키 협주곡을 연주하다가도 이 증세 때문에 곤혹스러움을 겪기도 했다. 이것이 그의 비운의 시작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1940년 6월과 11월 HMV에서 레코딩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성공을 거둔 그는 점점 더 아프기 시작했고 기억 또한 자주 잃어버리곤 했다. 그럴 수록 그는 점차 우울해지고 내성적으로 변해갔으며 아버지에게 반항했고 바이올린을 집어던지곤 했다. 결국 극심한 정신분열증으로 진단내려졌다. 1943년 처음으로 병원에서 요양치료를 받기 시작했고 이후 짧은 삶 대부분을 병원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1949년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난 뒤 뇌수술 받기로 했고, 1950년 11월 7일 27세의 나이로 그는 회복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크라이슬러는 하시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하이페츠는 100년에 나올까 말까 한 천재이지만, 하시드는 200년에 한 번 나오기도 힘든 천재다.” 그의 한이 서린 듯한 창백한 서정성과 무엇이든 녹여버릴 만큼 애상적인 감수성이 만개하지 못한 채 사라져버렸다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래빈의 레코딩

우리는 그의 연주를 대략 60여곡 정도 감상할 수 있다. EMI를 통해 레빈은 짧은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풍부한 레파토리를 레코딩할 수 있었는데, 이들 녹음에서는 공통적으로 다소 얇은 듯한 선율미를 바탕으로 비할 바 없는 미묘한 프레이징과 정교한 뉘앙스를 구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그는 연주법과 레파토리 선곡에 있어서 전통적으로 바이올린 비르투오소들이 따랐던 소품과 명인기적 협주곡을 녹음하여 선배들이 걸어간 길을 답습하고자 했음 또한 알 수 있다.
 
아마 그의 레코딩 가운데 가장 전설적인 명반으로 자리잡은 파가니니의 24개의 카프리스는 20대 초반 래빈의 모든 역량이 총발휘된 것으로서, 당시 이탈리아 바이올린 대가들, 즉 리치나 캄폴리, 더 나아가 아카르도와 같은 벨칸토적이면서 자의적인 해석과는 일정한 거리를 둔다. 완벽한 테크닉은 말할 것도 없을뿐더러, 전형적인 러시아 스타일인 스타카토와 대담함이 번뜩이며 무채색적 투명함에서 기인하는 표현의 농담이야말로 최고의 연주로 손꼽을 수 있다.
이작 펄만은 자신의 카프리스 레코딩을 래빈의 영전에 헌정했다는 사실로도 그의 연주가 얼마나 영향력이 컸는가를 반증한다. 비네야프스키 협주곡 1번과 파가니니 1번, 글라주노프 협주곡, 브루흐의 스코틀랜드 환상곡과 같은 대곡에서 그가 만들어내는 빈틈없는 더블 스톱과 격정적인 도약, 전율적인 트릴과 전자음과 같이 실랄하게 울려퍼지는 스타카토는 세련되면서도 화려한 비르투오소의 진정한 미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콜럼비아에서 1950년대 초반 처음으로 녹음한 음원(Sony)은 14세 소년 래빈의 천재성을 만끽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그의 최고의 명연으로 평가할 만하다. 20대 이후 녹음보다 훨씬 더 예민한 감수성을 펼쳐내는 이들 녹음 가운데 특히 열 한곡의 파가니니 카프리스 발췌의 아름다움은 듣는 이를 다른 세상으로 순간이동시키기에 충분할 정도고, 사라사테의 찌고이네르바이젠을 비롯한 여러 소품들은 한 어린 천사의 진솔한 천상에서의 경험이라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감동적이다.
침체기를 걸었던 그가 보다 오래 생존했다고 가정했을 때, 반 클라이번처럼 매너리즘에서 헤어날 수 없었을지, 아니면 전폭적인 쇄신을 거쳐 한 단계 도약을 했을지 가늠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요절한 그의 유산에 경의를 표하며 우러러보아야 한다는 의무감을 지울 정도로 래빈의 유산은 위대하다는 점이다.
 

하시드의 레코딩

하시드는 20대 초반 영국 데뷔 직전인 1939년 HMV에서 테스트 레코딩으로 남긴 엘가의 ‘변덕스러운 여인’과 1940년 제랄드 무어와 함께 SP 분량으로 여덟 면에 해당하는 정규 녹음만을 남겼다. 그러나 불과 열 여섯의 나이었던만큼 신동의 솜씨라고 단순히 경탄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이들 하나하나에는 신이 잠시 동안 인류에게 빌려준 천상의 아름다움이 담겨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데, 유심히 들어보면 플레쉬로부터 기인한 정교한 비브라토와 잘 다듬어진 테크닉, 음색에 대한 완벽한 조절을 뛰어넘은 천부적인 하시드의 천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엘가의 ‘변덕스러운 여인’, 차이코프스키의 ‘멜로디’, 마스네의 ‘명상곡’, 드보르작의 ‘유모레스크’, 사라사테의 ‘플라예라’와 ‘자파테아도’, 크라이슬러의 ‘빈 기상곡’을 비롯하여, 세상에서 가장 슬픈 현소리를 머금고 있는 요제프 아르콘의 ‘헤브루 멜로디’가 그의 디스코그래피 전부다.
모든 곡들에서 하시드 특유의 음색과 강렬한 어택, 감각적이되 냉정한 비브라토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황홀경에 빠져들게끔 하는데, 특히 ‘헤브루 멜로디’는 그 본연의 슬픔과 허무한 듯한 한숨이 땅으로 뚝뚝 떨어지는 연주로서 하시드의 요절을 더욱 더 안타깝게 만든다. 최근 구할 수 있는 CD로 Testament에서 발매된 음반이 있는데, 이 음반에는 또 다른 요절한 천재인 지네트 느뵈의 베를린 첫 레코딩이 커플링 되어 있어 음반을 듣는 내내 가슴이 조여들고 눈시울이 붉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