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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음악가 이야기

바이올린의 황금기를 장식했던 숨겨진 보석들 - (1)카밀라 윅스, 귈라 부스타보

by onekey 2024. 3. 1.
박제성2013-06-03 10:26
추천 36 댓글 0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바이올린계는 하이페츠와 밀스타인이 이미 절대적인 명성을 펼치거나 오이스트라흐와 코간이 철의 장막을 걷고 막 그 모습을 드러내어 새로운 붐을 일으켰던 것과 같이 러시아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잠식했던 시기임과 동시에, 메뉴힌과 프란체스카티가 자신의 최고의 능력을 펼치고 있을 때이기도 하고 베테랑 시게티와 티보, 엘만 등이 그들의 마지막 불꽃을 태웠던 동시에 스턴과 래빈, 리치 등이 바이올린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던, 인류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바이올린의 황금기였다. 
이 가운데 유독 여성 바이올리니스트 그룹은 빛을 보지 못한 채 간신히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이졸데 멩게스를 비롯한 비교적 많은 레오폴드 아우어의 여성 제자들도, 이다 헨델을 비롯한 칼 플레쉬의 몇몇 특징적인 여성 바이올리니스트들 모두 급격히 그 빛을 잃거나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었다. 간헐적으로나마 에리카 모리니와 요한나 마르치 정도가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일 정도였다. 비록 이들 여류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숫자와 활동이 남성들보다 적었다 하더라도 이들 또한 바이올린의 황금기를 이루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구성원이었다.
 
북구의 요정, 카밀라 윅스
1928년 캘리포니아 롱 비치에서 태어난 카밀라 윅스(Camilla Wicks)는 2차 대전 이후 활동을 시작한 수많은 바이올리니스트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혜성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녀는 솔리스트로서 짧지만 강력한 인상을 남긴 뒤 가족을 위해 은퇴를 강행했고 수 십년에 걸친 화려한 무대를 뒤로 하고 후진양성에 매진했지만, 그녀야말로 남성 바이올리니스트들의 권위에 맞설 수 있었던 진정한 승리자였다. 
세 살 때 바이올린을 선물받은 뒤 1년만에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 A장조를 안보로 연주했던 윅스는 10세에 줄리어드에 입학하여 루이 퍼싱어를 사사했다. 퍼싱어는 외젠느 이자이의 대표적인 제자로서 프랑코-벨지움 악파의 적자이자 악보에 대한 충실함, 더 나아가 인간미와 정신성을 중요시했던 위대한 스승이었다. 윅스의 아름다운 소리와 음색은 바로 퍼싱어로부터 물려받은 소중한 전통인 셈이다. 이후 칼 플레쉬의 제자인 앙리 테미안타로부터 철학적이면서도 다양한 연주 방식을 물려받아 해석을 정형화하지 않는 폭넓은 세계를 깨우치게 되었다.
그녀는 1942년 미국에서 데뷔 연주회를 가졌고 전후 46년엔 로진스키와 뉴욕 필과의 협연을 시작으로 시카고, LA를 비롯한 미국 탑5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했으며, 유럽에서도 열광적인 찬사를 받으며 수백 회의 연주회를 가졌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EMI에서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녹음했고 작곡가 또한 완벽하다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노르웨이에서 이민 왔던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혈통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독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국가들로부터 그녀는 많은 사랑을 받았다. 특히 노르웨이에서는 세 차례 영화에 출연하여 왕실로부터 각별한 애정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스웨덴의 로젠베르크, 노르웨이의 부르스타트, 발렌, 클라우스와 같은 작곡가들로부터 협주곡과 독주곡을 헌정받아 초연, 녹음을 하기도 했다. 그녀의 디스코그라피 가운데 유독 스칸디나비아 반도 작곡가들의 작품이 많은 까닭이 바로 이 때문이다.
유럽에서 성공을 거둔 윅스는 1951년 결혼한 뒤 연주회를 중단하고 가정에 충실했는데, 이 시기 그녀는 악기 본연의 모습에 깊숙이 뿌리박힌 솔직한 감성과 표현의 다양성을 연구하고 있었다. 1971년에는 오슬로 왕립 음악원의 종신 교수직을 맡았고 1975년에는 노르웨이 음악 아카데미의 교수로 2년 동안 활동한 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워싱턴, 라이스, 남부 캘리포니아, 미시건 음학대학에서 강의를 계속했으며 현재까지 샌프란시스코 음악원의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노르웨이를 사랑했던 그녀는 교수를 그만 둔 이후로 지금까지도 노르웨이에서 연주자이자 교육자로서 정력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바이올린의 예술적 승화, 부스타보
2002년 4월 27일 세상을 떠난 또 다른 여류 바이올리니스트가 윅스에 견줄 수 있을 정도의 권위와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전후에 펼쳐진 삶과 경력은 윅스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이탈리아 이민자인 아버지와 체코 이민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귈라 부스타보(Guila Bustabo)가 바로 그 장본인으로서 1916년 위스콘신주의 메니토웍에서 태어난 그녀는 ‘악마’(부스타보가 평생 벗어나고자 몸부림쳤던)로 불렀던 어머니와 나치 당원이었던 40년 연상의 애인 작곡가 볼프-페라리의 올가미에 메어 나이 40대에 이미 모든 활동과 명성이 종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바이올린계의 클레오파트라, 즉 여신으로 숭배받고 있다.
그녀는 이자이의 제자인 레온 사메티니를 사사한 뒤 1929년 뉴욕 필하모닉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비네야프스키 1번 협주곡으로 데뷔했다. 크라이슬러와 토스카니니로부터 격찬을 받은 그녀는 크라이슬러가 구입해준 1736년산 델 제수를 얻으며 그의 비호를 받게 되었다. 이후 미국 출신의 여류 바이올리니스트로서 프레델 랙이나 카밀라 윅스와 같은 더 어린 연주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1934년 런던 데뷔를 시작으로 그녀는 본격적인 유럽 연주회를 시작했는데, 1937년까지 헝가리에서 후바리를, 파리에서 에네스쿠를 사사하며 천부적인 천재성에 고급스러운 예술혼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2차대전이 시작되면서 그녀는 나치 성향이었던 어머니의 우악스러운 손에 이끌려 유럽에 남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부스타보에게는 인생에 있어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당시 그녀의 활동은 가히 전세계에서 최고의 협연자로서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아벤드로트, 푸르트벵글러, 카라얀, 카바스타, 요훔이 그녀의 파트너로 드보르작, 차이코프스키, 부르흐, 베토벤, 시벨리우스 등을 연주했고, 특히 멩겔베르크는 그녀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며 자신을 위한 바이올린이 되어달라고 했다. 이 시기 예술적으로나 감성적으로 부스타보의 중심을 차지했던 볼프-페라리와의 불륜은 그녀에게 최고의 명예와 최악의 운명으로 기록된다. 카덴차는 부스타보가, 독주 부분은 공동으로, 나머지는 볼프-페라리가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에 대한 독점권을 10년간 누리게 되면서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영예를 갖게 되었지만, 이로 인해 전후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예술 활동에 커다란 장애를 받게 되며 일순간에 거리의 부랑자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순진했던 한 어린 천재를 휘두른 잘못된 정치관을 갖고 있던 어머니의 실수 때문일 것이다.
미국에서 볼프-페라리의 오페라가 다시금 연주될 무렵인 1950년대 부스타보 또한 다시금 재기의 나래를 펼치고자 노력했다. 특히 윅스보다 앞서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해석에 있어서 최고의 해석가로 손꼽혔다. 시벨리우스가 자신의 집에 걸어놓은 유일한 바이올리니스트 초상화가 바로 부스타보였다고 한다. 1957년 영국 리사이틀에서 유진 구센스는 “마치 이자이의 연주를 듣는 것 같았다. 이제는 더 이상 이런 연주를 들을 수 없을 것이다.”라며 격찬했다. 1949년 불행한 결혼을 시작하여 77년에 이혼을 할 시기에, 처절한 재기의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계속 나락으로 떨어져 내려가기만 했다. 1972년 루돌프 켐페와의 볼프-페라리 바이올린 협주곡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미국의 3류 오케스트라인 알라바마 심포니의 평단원으로 불행한 삶을 더욱 처참하게 보내야만 했는데, 당시 아직까지도 생존해있던 그녀의 어머니는 잠시 어깨에 통증을 느꼈던 딸을 진찰했던 의사인 랄프 티센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딸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의자에 앉아 연주를 했으니 아플 수밖에... 좀 더 예의를 갖추어 대하시오, 내 딸이 바로 귈라 부스타보란 말이오!” 자신보다 10년 먼저 세상을 떠난 세상을 떠난 어머니는 조울증과 금단현상과 같은 정신병에 시달렸던 부스타보에게 아직도 착취할 것이 남아있었던 것 같다.
 
윅스와 부스타보의 음반들
윅스와 부스타보는 은둔적인 성향과 그 삶의 부침 덕분에 레코딩의 혜택을 많이 받은 연주가들은 아니다. 그러한 만큼 그녀들이 남긴 소수의 음반들은 항상 콜렉터들 사이에서 여신으로 숭배를 받으며 0순위의 표적이 되고 있다. 실제로 음반을 들어보면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독특한 개성과 심오한 깊이가 흘러나오는만큼, 그리고 여성 바이올리니스트들 특유의 묘한 매력과 형언할 수 없는 분위기에 도취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윅스는 대표적인 음반으로 위에서 언급했던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이다. 1952년 시벨리우스 전문가인 식스틴 얼링과 스톡홀름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녹음이 그것으로서, 북구의 창백하지만 찬연히 빛나는 음색과 명주실처럼 얇지만 고귀함을 더하는 리리시즘, 내면으로 폭발하는 다이내믹이 빛을 발하는 명연 중의 명연이다.
오슬로에서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했을 때 이를 라디오를 통해 들은 작곡가가 윅스와의 만남을 주선했고, 그 자리에서 윅스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물어봤지만 시벨리우스는 단호하게 “그렇게만 연주하라”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프란츠 폰 벡세이에게 헌정된 이후 부스타보와 쿨렌캄프, 하이페츠의 레코딩을 거친 뒤 윅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 곡은 제 모습을 찾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음원은 현재 세 종류의 음반으로 발매되었다. 하나는 EMI(한국, 일본)를 통해, 다른 하나는 영국 비둘프 레이블을 통해, 마지막으로 일본 Green Door를 통해 발매되었다. 그런데 이 세 종류의 음원은 각기 다른 소스를 통해 복각된 것으로서 음질 차이가 현저하게 드러난다. 이 가운데 가장 추천할 만한 음반은 비둘프 음반으로서 복각의 거장 워트 마스톤이 참여하여 또렷한 윅스의 선율미를 부각시켰을 뿐만 아니라 발랭의 바이올린 협주곡(1949)을 비롯하여 49년부터 51년 사이 녹음된 쇼피스들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쇼스타코비치의 전주곡 편곡 음원들과 사라사테의 ‘말라게라’, 카발레프스키의 ‘즉흥’의 유머와 통렬함, 비장함 등은 한 번 들으면 잊혀질 수 없을 정도로 인상적이다. 그린도어 음원은 탁월한 마스터링을 자랑하지만 음질이 너무 좋기도 하고 내지에 녹음연도가 명기되어 있지 않아 종종 HMV와 다른 음원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 외에 최근 Simax 레이블을 통해 두 종의 음반이 발매되었다. 하나는 부르스타드와 월튼의 바이올린 협주곡(68/85)을, 다른 하나는 글라주노프 협주곡과 본 윌리엄스의 ‘종달새의 비상’(85), 부르스타드의 솔로 바이올린을 위한 모음곡(69),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1번 1악장(75) 등을 수록한 앨범으로서, 특히 글라주노프 협주곡에 있어서 그녀가 보여주는 치밀하면서도 안정된 보잉과 여전히 광채가 발하는 고귀한 음색은 다른 러시아 연주자들의 연주들을 과열되고 거친 연주로 전락시키기에 모자람이 없다. Music & Art에서는 1950년대 초반 미국에서 가진 연주회 실황을 담은 앨범이 하나 있는데, 부르노 발터/뉴욕 필과의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과 존 바넷/샌 프란시스코 심포니와의 시벨리우스 협주곡 1악장, 아서 피들러/샌 프란시스코 심포니와의 차이코프스키 협주곡이 수록된 음반이 그것이다.
 
새롭게 조명된 부스타보의 음반
 
한편 부스타보의 음반은 윅스보다도 더 열악한 발매실적을 자랑(?)한다. 일본 킹 레코드에서 발매된 빌렘 멩겔베르크/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와의 43년 베토벤과 부르흐 바이올린 협주곡과 Symposium 레이블을 통해 발매된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 시리즈 15권 ‘부스타보와 리치’ 앨범에 수록된 제랄드 무어와의 노바체크와 멘델스죤, 쇼팽, 크라이슬러, 사라사테, 라흐마니노프 소품들(1935년 녹음)과 파가니니 협주곡(빌헬미 편곡, 1943년)을 수록한 앨범이 그나마 구할 수 있었던 앨범이었고, 지금은 중고시장에서 수백불을 호가하는 레어 아이템으로서 ‘Bustabo Legacy'라는 제목으로 Classical Records 레이블에서 발매된 두 장짜리 전집이 발매된 적이 있었다. 이 전집에는 그녀의 모든 소품들과 시벨리우스, 파가니니, 누시오의 협주곡, 그리고 저 전설적인 루돌프 켐페와의 볼프-페라리 협주곡(72)이 수록되어 있다. 이 세 종의 음반은 이제는 더 이상 구할 수 없는 CD라 부스타보는 더욱 더 우리의 기억 속에서 멀어져만 갔다.
일종의 전설로만 존재해왔던 그녀의 주술사와 같은 마력적인 연주와 농염하면서도 광폭한 음색, 특정한 스타일로 설명하기에는 언어의 한계가 부족함을 절실히 깨닫게 해 주는 천재만의 음악적 표현력을 이제야 비로소 수월하게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최근 두 장의 앨범이 차례로 발매되었는데, 하나는 일본 Green Door에서 발매된 시벨리우스와 파가니니 협주곡 다른 하나는 Tahra에서 발매된 베토벤과 드보르작 협주곡이 그것이다. 우선 그린도어의 시벨리우스는 정상적인 사고와 연주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연주로서, 귀기 어린 분위기와 압도적인 에너지, 여성적인 섹시함, 농현과 찰현의 불가해한 혼합물로서 듣는 이를 꼼짝없이 얼어붙게끔 한다. 
타라(tahra)에서 발매된 멩겔베르크와의 1944년 베토벤은 지휘자를 압도하는 듯한 추진력과 끊임 없는 현의 울음소리가 특징으로서 이보다 더 특이한 해석은 인류 역사상 다시금 존재할 수 없을 정도이며, 이세르슈테트와의 55년 드보르작은 지휘자와 연주자가 혼혈일치를 이루며 감히 ‘도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권위적이면서도 완벽한 해석을 들려준다. 아마도 이 하나의 레코딩만으로도 그녀의 질곡 많은 삶 앞에 다른 행복했던 바이올리니스트들을 충분히 무릎 꿇게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