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성2011-09-20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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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도락의 제왕 조아키노 로시니
조아키노 로시니(Gioacchino Rossini, 1792~1868)는 역사상 의심할 바 없는 위대한 작곡가인 동시에 19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미식가였다.
저명한 미식가 웨이버리 루트(Waverley Root)가 “드라마, 드라마, 드라마! 이탈리아인의 음식은 오페라 같아야한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아마도 그에게 있어서 작곡가는 음표 대신 덜그럭거리는 접시와 쨍그랑 부딪치는 유리잔들의 소리를 음표로 바꾸어놓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로시니의 경우는 이러한 루트의 생각을 대변하는 아주 좋은 예로서, “만약 그의 음악적 재능이 미식가로서의 재능을 가리지 않았다면 인류 역사상 가장 축복받은 미식가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탄식했다. 로시니의 많은 전기들에도 반은 사실이고 반은 전설이 된 다양한 그의 미식학적 일화들이 많이 등장한다.
저명한 미식가 웨이버리 루트(Waverley Root)가 “드라마, 드라마, 드라마! 이탈리아인의 음식은 오페라 같아야한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아마도 그에게 있어서 작곡가는 음표 대신 덜그럭거리는 접시와 쨍그랑 부딪치는 유리잔들의 소리를 음표로 바꾸어놓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로시니의 경우는 이러한 루트의 생각을 대변하는 아주 좋은 예로서, “만약 그의 음악적 재능이 미식가로서의 재능을 가리지 않았다면 인류 역사상 가장 축복받은 미식가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탄식했다. 로시니의 많은 전기들에도 반은 사실이고 반은 전설이 된 다양한 그의 미식학적 일화들이 많이 등장한다.
까렘과의 운명적인 만남
전기작가들은 소년 로시니가 미사를 위해 준비된 와인을 즐겼다고 적고 있다. 어떤 문헌에는 젊은 음악가 로시니가 <세빌리아의 이발사, Il barbiere di Siviglia>의 오프닝 밤 장면을 날려버리고 샐러드를 위한 새로운 레시피를 묘사하는 세부적이고 장황한 장면을 끼워 넣으려고 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 레시피는 자연스럽게《Salad alla Rossini》로 탄생하게 된다. 스탕달(Stendhal) 역시 로시니의 전기에서, “오페라 <탄크레디, Tancredi>는 당시에는 그다지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아리아 이렇게 설레는 가슴이(Di Tanti Palpiti)”는 유럽 전역을 거쳐 잘 알려졌으며 ‘쌀을 위한 아리아’라고들 친근하게 부르곤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곡은 로시니가 레스토랑에서 주문한 리조또가 나오기 기다리면서 작곡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예로 로시니는 오페라 <라 세레넨톨라, La Cenerentola> 가운데 아리아 “슬픔과 눈물 속에서 자라나(Nacqui all'Affanno e al Pianto)”를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고 하는데, 이는 로마의 한 선술집에서 술 마시고 떠드는 친구들이 자신이 앉은 구석 테이블을 둘러싸는 바람에 15분 정도도 미치지 못하는 짧은 시간 안에 작곡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파리에서 체류할 당시 로시니는 명망 있는 음악가로 숭배 받았다. 전기작가들은 로시니와 친분을 맺었던 당대 최고의 천재 주방장이자 ‘요리의 왕’으로 지금까지 추앙 받는 앙토넹 까렘(Antonin Carême, 1784~1833: 프랑스 나폴레옹 황제, 러시아 로마노프 왕가, 대영제국 조지 4세의 요리사로서 프랑스 요리의 기초를 세운 전설적인 요리사)이 그를 두고 “나를 진정으로 이해한 단 한 사람”이라 단정했다고 전한다.
이와 비슷한 예로 로시니는 오페라 <라 세레넨톨라, La Cenerentola> 가운데 아리아 “슬픔과 눈물 속에서 자라나(Nacqui all'Affanno e al Pianto)”를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고 하는데, 이는 로마의 한 선술집에서 술 마시고 떠드는 친구들이 자신이 앉은 구석 테이블을 둘러싸는 바람에 15분 정도도 미치지 못하는 짧은 시간 안에 작곡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파리에서 체류할 당시 로시니는 명망 있는 음악가로 숭배 받았다. 전기작가들은 로시니와 친분을 맺었던 당대 최고의 천재 주방장이자 ‘요리의 왕’으로 지금까지 추앙 받는 앙토넹 까렘(Antonin Carême, 1784~1833: 프랑스 나폴레옹 황제, 러시아 로마노프 왕가, 대영제국 조지 4세의 요리사로서 프랑스 요리의 기초를 세운 전설적인 요리사)이 그를 두고 “나를 진정으로 이해한 단 한 사람”이라 단정했다고 전한다.
여러 해 동안 이 두 사람은 그들이 속한 서로 다른 분야의 예술에 경의의 표시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로시니는 까렘에게 “마에스트로, 만약 당신이 나와 함께 한다면 기꺼이 아메리카로 갈 것입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무한한 신뢰를 표시했다고 한다.
까렘이 볼로냐에 있는 로시니에게 맛있는 가메 빠테(game pâté)를 보내면, 곧 로시니는 까렘을 위한 짧은 아리아를 작곡하여 선물하곤 했다. 이것이야말로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백아와 종자기에 비견할 만한 위대한 음악적 교분이 아닐까 한다. 로시니는 파리에서 칠면조 요리에 트뤼플(Truffle, 송로버섯)를 곁들여 즐기지 않은 적이 없다고 한다. 이는 저서 「맛의 생리학」(Physiologie du goût)을 통해 트뤼플의 섹슈얼리즘을 찬양했던 법률가이자 정치인, 식도락가이자 미식가인 장 앙뜨렘 브리아-샤바랭(Jean Anthelme Brillat-Savarin, 1755~1826)의 선언에 충실히 따른 것으로, 당시 파리에서는 트뤼플이 대유행 중이었다.
뚜르느도 로시니의 탄생
한 번은 로시니가 트뤼플을 곁들인 칠면조 요리를 건 내기에서 이겼다. 그러나 그 내기는 결코 명예롭지는 않았는데, 왜냐하면 마에스트로의 끈질긴 요구에 어쩔 수 없이 응대한 내기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내기에서 진 사람은 돈이 없고, 무엇보다도 일등급 트뤼플을 구할 수 없다고 양해를 구했다.
로시니는 무심결에 “넌센스야, 넌센스”라고 말하며, “트뤼플로 맛을 내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은 칠면조를 둘러싼 고약한 음모인 것이 분명해”라고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또 다른 일화에 따르면, 로시니는 평생토록 딱 세 번 울었다고 한다. 한 번은 그의 첫 오페라 공연이 실패했을 때, 두 번째로는 니콜로 파가니니(Niccolò Paganini)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었을 때, 마지막으로는 선상에서 뱃놀이를 할 때 점심으로 나온 트뤼플이 얹어진 칠면조 요리가 배 밖으로 떨어져서 가라앉았을 때.
저 유명한 메뉴인 《뚜르느도 로시니》(Turnedos Rossini: 구운 기름 없는 소등심인 뚜르느도 사이에 가금류를 넣고 트뤼프 버섯과 프와그라를 얇게 저며 한 조각씩 얹은 음식; tournedos는 ‘회전하다’라는 뜻의 동사 tourner와 ‘등’이라는 뜻의 명사 dos로 조합된 것으로서, 즉 뚜르느도 로시니란 “등 돌린 로시니”라는 뜻)의 발명은 가히 전설적이다.
파리의 꺄페 앙글레(Café Anglais)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이야기는 로시니가 식사 준비를 직접 보고 싶어 했다는 것에서 시작한다. 요리하는 과정을 바로 앞에서 보고 싶었던 로시니는, 주방장이 바로 자신의 테이블 앞에서 요리할 수 있도록 호의를 베푸는 척했다. 그러나 결국 주방장은 로시니의 끈질긴 간섭을 견디다 못해 그의 맨 마지막 요구를 거부해버렸다. 주방장은 로시니의 요구에 이렇게 대답했다. “Et alors, tournez le dos(이제 등을 돌리시오).”
또 다른 일화에 따르면, 로시니는 평생토록 딱 세 번 울었다고 한다. 한 번은 그의 첫 오페라 공연이 실패했을 때, 두 번째로는 니콜로 파가니니(Niccolò Paganini)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었을 때, 마지막으로는 선상에서 뱃놀이를 할 때 점심으로 나온 트뤼플이 얹어진 칠면조 요리가 배 밖으로 떨어져서 가라앉았을 때.
저 유명한 메뉴인 《뚜르느도 로시니》(Turnedos Rossini: 구운 기름 없는 소등심인 뚜르느도 사이에 가금류를 넣고 트뤼프 버섯과 프와그라를 얇게 저며 한 조각씩 얹은 음식; tournedos는 ‘회전하다’라는 뜻의 동사 tourner와 ‘등’이라는 뜻의 명사 dos로 조합된 것으로서, 즉 뚜르느도 로시니란 “등 돌린 로시니”라는 뜻)의 발명은 가히 전설적이다.
파리의 꺄페 앙글레(Café Anglais)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이야기는 로시니가 식사 준비를 직접 보고 싶어 했다는 것에서 시작한다. 요리하는 과정을 바로 앞에서 보고 싶었던 로시니는, 주방장이 바로 자신의 테이블 앞에서 요리할 수 있도록 호의를 베푸는 척했다. 그러나 결국 주방장은 로시니의 끈질긴 간섭을 견디다 못해 그의 맨 마지막 요구를 거부해버렸다. 주방장은 로시니의 요구에 이렇게 대답했다. “Et alors, tournez le dos(이제 등을 돌리시오).”
로시니의 음식 혁명
《뚜르느도 로시니》처럼 이름을 갖게 다른 많은 음식들이 존재하고, 로시니가 직접 자신의 미식적 조리법을 제시한 것 또한 사실이다. 한 위대한 주방장은 로시니에게 《Poached Eggs alla Rossini》, 《Chicken alla Rossini》, 《Filletto alla Rossini》와 같은 많은 음식을 헌정했다.
이밖에 로시니의 불멸의 캐릭터인 ‘피가로’에 헌정된 과자는 최상급 패스트리 혹은 파스티치니(pasticcini)의 한 종류이고, 오페라 <기욤 텔, Guillaume Tell>에 헌정된 파이의 일종인 타르트(tart)는 1829년 파리에서 열린 오프닝 나이트 행사에서 첫선을 보였다. 당연히 이것은 윌리엄 텔을 상징하는 사과를 사용한 애플 타르트로서 사과 한 가운데로 설탕으로 만든 활 옆에 놓인 설탕 화살이 사과를 관통하는 장식으로 만들어졌다.
현대 부엌의 성서라고 말할 수 있는 책으로서, 오귀스트 에스꼬피에(Auguste Escoffier, 1846~1935)의 여러 레시피를 모아놓은 유명한 저서에는 로시니에게 헌정한, 전체 메뉴 모두를 만들 수 있는 다양한 레시피를 담고 있다.
현대 부엌의 성서라고 말할 수 있는 책으로서, 오귀스트 에스꼬피에(Auguste Escoffier, 1846~1935)의 여러 레시피를 모아놓은 유명한 저서에는 로시니에게 헌정한, 전체 메뉴 모두를 만들 수 있는 다양한 레시피를 담고 있다.
이들 가운데 많은 수의 레시피는 고품격 프랑스 주방으로 넘어갔고, 이들 일부는 전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국제적인 주방으로 퍼져갔다. 소고기 골수 리조또(Beef Marrow Risotto)를 포함한 마에스트로가 만들어낸 여러 레시피들은 그의 고향인 마르체(Marche)에서 아직도 판매되고 있고, 저 유명한 메뉴인 《Cannelloni alla Rossini》는 여전히 로시니가 원했던 것 그대로 트뤼프와 프와 그라가 얹어져 나오고 있다.
19세기 파리의 삽화들은 쇼세 당탱(Chaussée d'Antin)에 있는 집이나 빠시(Passy)에 있는 별장에서 음악-식도락을 위한 이브닝 파티에 손님들을 초대해서 은으로 만든 패스트리-튜브(Pastry-Tube)나 시린지(Syringe)를 들고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하고 손님에게 대접하는 로시니를 자주 묘사하고 있다.
19세기 파리의 삽화들은 쇼세 당탱(Chaussée d'Antin)에 있는 집이나 빠시(Passy)에 있는 별장에서 음악-식도락을 위한 이브닝 파티에 손님들을 초대해서 은으로 만든 패스트리-튜브(Pastry-Tube)나 시린지(Syringe)를 들고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하고 손님에게 대접하는 로시니를 자주 묘사하고 있다.
박제성2013-03-13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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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부엌적이고 식도락적인 언급들은 로시니의 음악 작품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다. 그는 풍족한 부자와 배고픈 가난뱅이를 대조시키곤 했는데, <라 세레넨톨라>에서 돈 마그니피코(Don Magnifico)는 자신의 딸을 왕자와 결혼시킴으로서 얻을 수 있는 달콤한 과실을 열망하는 듯한 식도락적인 우아함을 꿈꾼다. 노래 내용은 다음과 같다.
“Saro zeppo e contornato (나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네)
di memorie e petizioni (추억과 청탁)
di galline e di storioni (암탉과 철갑상어)
di bottiglie di broccati (술병과 브로케이드)
di candele e marinati (양초와 마리네이드)
di ciambelle e pasticcetti (빵과 케이크)
di canditi e di confetti (달콤한 과일과 사탕)
di piastroni, di dobloni (슬레이브와 더블룬)
di vaniglia e di caffe.“ (바닐라와 커피)
미식학적 인용들과 향연들이 로시니의 오페라, <알제리의 여인, L'Italiana in Algeri>부터 <결혼 어음, La Cambiale di Matrimonio>까지, <랭스 여행, Il viaggio a Reims>부터 <바빌로니아의 키로스, Ciro in Babilonia>, <노년의 과오, Peches de Vieillesse>와 같은 마에스트로의 잘 알려지지 않은 소수의 미출판 오페라 등에서 빈번하게 등장한다.
특히 <노년의 과오>는 200여편에 이르는 로시니 말년의 작품 컬렉션으로서, 여기에는 앙뜨레(entree) 전에 먹는 전채요리에서 이름을 차용한 <오르 되브르(Hors d'oeuvre): 무, 절임오이, 안초비, 버터로 구성>, <네 개의 말린 과일 디저트: 무화과, 건포도, 아몬드, 헤이즐넛으로 구성>, 심지어 작은 독일 케이크와 같은 제목의 피아노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다.
로시니의 엄청난 식재료
로시니는 다양한 미각을 가진 미식가였다. 그는 고향 마르체의 이탈리아 요리와 프랑스 요리, 더 나아가 국제적인 요리 모두의 고유 요리법을 음미했다. 그리고 각각으로부터 그는 자신의 감별력 뛰어난 코스모폴리탄적인 미각을 만족시키는 것만을 선택했다.
아스꼴리(Ascoli)로부터는 올리브를, 밀라노(Milano)로부터는 이탈리아 트뤼프와 파네토네(panettone: 건포도 설탕에 절인 과일과 견과류를 넣어 만든 밀라노의 대표적인 밀가루 발효빵)를, 롬바르디(Lombardy)로부터는 스트라치노(stracchino: 롬바르디 지방 고유의 소우유로 만든 치즈의 일종)를, 모데나(Modena)로부터는 잠포니(zamponi: 뼈를 제거한 돼지족발에 음식으로 속을 채운 모데나 지역 특산품), 이탈리아로부터 모르타델라(mortadella: 인산염을 첨가하지 않고 곱게 다진 돼지고기 살코기와 목비계로 만든 볼로냐 지방 고유의 소시지의 일종)와 까펠리 델 쁘레떼(cappelli del prete: 성직자의 모자라는 뜻으로서, 기름기가 적고 길쭉한 송아지 어깨부위)를, 세빌리아로부터는 하몽(Harmon: 스페인 고유 햄의 일종)을, 영국으로부터는 스틸턴(Stilton: 푸른곰팡이 치즈의 일종)을, 마르세이유로부터는 누가(nougat: 결정이 맺어지지 않은 설탕과 꿀로 만든 시럽), 마지막으로 친구들이 로시니에게 경쟁적으로 보내려고 다투기까지 했던 로얄 사르딘(Royal Sardine: 정어리의 일종)등을 구해 즐겼다.
로시니의 와인에 대한 취향은 대단히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와인 셀러에는 카나리아 제도에서 보르도까지 이르는 지역에서 그가 직접 병에 담은 것들을 비롯하여, 메테르니히(Metternich: 오스트리아의 정치가)가 말라가로 보낸 요하네스버그의 화이트 와인부터 저 희귀한 마데리아(Maderia) 와인까지, 그리고 이탈리아 시실리산 마르살라(Marsala) 와인부터 광적일 정도로 로시니를 존경했던 포르투갈 왕이 보낸 로얄 하우스홀드(Royal Household), 즉 왕가에서 직접 재배하여 숙성시킨 포트와인에까지 이른다.
1864년 롯시니의 숭배자였던 로스차일드가 자신의 포도밭에서 수확한 포도를 보냈다. 로시니는 로스차일드에게 최대한 예의를 차리면서도 풍자가 섞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감사하지만 총알처럼 생긴 와인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브리아-사바랭의 표현을 인용해서 대답한 것이다. 이 말에 힌트를 얻은 로쉴드는 지금까지도 ‘포도주의 왕’이라고 일컬어지는 최고급 샤또 라피뜨(Chateau Lafite Rothschild)를 가득 담은 상자를 보냈다. 그제야 로시니는 만족감을 드러냈다고 한다.
한 연회장에서 디저트와 함께 와인을 마시던 로시니는 그 와인에 사용된 말바지아(Malvasia) 품종의 포도를 “천상의 하모니”라고 극찬하며 와인이 자아내는 “어렴풋이 떠오르는 듯한 분위기”를 높이 평가했다.
현재에는 전세계의 모든 식당에서 로시니의 요리를 맛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의 살로니카에서는 곱게 간 야채에 시라(蒔蘿) 잎으로 향을 낸 《Soup alla Rossini》을 맛볼 수 있다.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는 아르헨티나 주방장들과 협력해서 새롭게 맛을 낸《Cannelloni alla Rossini》를 주문할 수 있다.
뉴욕의 ‘San Domenico’에서는 새끼사슴을 재료로 부드러운 곡물과자 카나페(canape)처럼 만든《Tournedos alla Rossini》의 최신 버전을 주문할 수 있다. 로스앤젤레스의 ‘The Pazzia'에서는 캘리포니아의 새로운 조리법과 조화를 이룬《Fillet of Sole alla Rossini》를 만날 수 있다.
한편 싱가포르 슬링(Singapore Sling, 진을 베이스로 체리 브랜디와 레몬 주스를 넣어 만든 칵테일)을 처음으로 제조한 저 전설적인 싱가포르의 ‘Raffles'에서는 《Pheasant Supreme alla Rossini》를 주문할 수 있으며, 도쿄의 ’New Otani'에서는 《Asian Tournedos》를, ‘Porto'에서는 엄격한 이탈리아 스타일로 조리한 《Risotto alla Rossini》를 즐길 수 있다. 이렇듯 마에스트로 로시니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대형 레스토랑 문화에 큰 족적을 남기며 식도락가들의 마음에 잊지 못할 불멸의 이름을 새겨놓았다.
누가 프랑스 요리를 예술로 승화시켰는가, 앙토넹 카렘
1783년 파리 센 강의 음습한 빈민가, 그곳의 허름한 목재 저장소 오두막집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프랑스 혁명기라는 당시 상황에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에게 존경심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16번째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마리 앙토넹 카렘이라고 지었다. 그러나 실제 앙토넹이 태어난 정확한 연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한다.
1792년 가을, 매일 단두대에서 많은 사람들의 목이 잘려나가던 프랑스 혁명기의 어느 날, 아이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집밖으로 나와 버려지고 말았다. 겨우 10살의 나이에 아이는 광적으로 흥분하는 군중 속에 버려진 것이다. 아버지는 아이에게 “가거라, 얘야! 신께서 네게 주신 능력을 가지고”라고 말할 뿐이었다.
부친에게 버림받은 작고 겁에 질린 열 살짜리 소년이 훗날 프랑스 최고의 요리사로 추앙 받는 앙토넴 카렘이다. 그는 나폴레옹의 식탁을 차렸고 샤를 모리스 탈레랑(혁명기의 프랑스 정치인)의 전속 요리사였으며 러시아 로마노프 황제의 요리사였고 영국 조지왕의 요리사였으며 유럽 최대의 부호였던 로스차일드 가문의 요리사였다. 그가 차린 식탁에서 근대 유럽의 역사 나아가 세계 역사의 향방이 결정되었으며, 그의 요리로 인해 역사가 요동을 치기도 했다.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사형 직전 마지막 식사인 ‘베르미첼리 수프’도 그가 창안한 요리의 하나였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이 실패로 돌아가고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황제가 파리에 진군했을 때도 황제의 요리를 담당한 사람은 앙토넹이었다. 1814년 4월 4일에서 5일로 넘어가는 밤중에 알렉산드르 황제는 프랑스의 미래를 결정해야 했다. 나폴레옹의 아들을 섭정으로 세울 것인가, 부르봉 왕조를 부활시켜 루이 18세를 즉위토록 할 것인가가 핵심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전 유럽이 황제의 결정을 기다렸지만 그는 앙토넹이 차려준 정찬에 정신을 빼앗긴 상태였다. 다음날 아침에야 황제는 루이 18세의 왕정복고를 선언하였다. 한 나라의 운명이 한 사람의 정찬 테이블에서 그처럼 분명하게 결정된 것도 보기 드문 일이랄 수 있다.
훗날 앙토넹은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으로 가서 황제의 전속 요리사가 되었는데 당시 러시아인들은 앙토넹이 자신들에게 ‘먹는 방법’을 가르쳐준 사람이라고 추앙할 정도였다. 특히 당시 파리 연회의 전형적인 스타일인 뷔페(Buffe)를 처음으로 러시아에 소개한 공적을 가지고 있다. 그 반대로 러시아식 식사 방법, 즉 하나의 요리가 하나의 접시에 서빙되어 차례로 나오는 것을 서구에 소개한 사람 역시 앙토넹이었다. 이는 곧 유럽의 기본적인 레스토랑 스타일이 되었다.
유럽의 요리가 미식의 대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천재 요리사 앙토넹 카렘과 로시니 같은 미식가들의 공로라 할 수 있다.
콩데 스타일 포타주, 이탈리아 풍 농어 구이, 영국 클레르몽 쇠고기 허리 살 스튜, 베이컨을 곁들인 비둘기고기, 넥타린 플롬비에, 시럽 바른 양파를 곁들인 송아지고기, 체리 케이크, 프로방스 풍으로 튀긴 아티초크 등 그가 창안하고 발전시킨 요리는 수백 가지가 넘는다. 탈레랑은, 영국인들에게 세 가지 소스와 360가지 종교가 있는 반면 프랑스인들에게는 세 가지 종교와 360가지 소스가 있다고 말했다. 이 소스들을 발전시킨 사람이 바로 앙토넹이다.
그는 또한 대단위 연회의 총지휘자였다. 적게는 30명에서 많게는 1,200명분의 요리를 한꺼번에 만들어 내놓았다. 루이 18세가 주최한 한 정찬에는 100명이 넘는 요리사들이 참여했으며 디저트만 무려 600접시였다. 1816년에는 샹젤리제에서 만 명의 재향 군인들을 위한 정찬이 열렸는데 만병의 와인이 장식되었고 황소 6마리가 통째로 구워졌고, 송아지 75마리와 양 250마리, 닭 2천 마리, 칠면조 8천 마리, 돼지 500마리의 허벅다리 살과 혀, 2천 마리가 넘는 잉어와 생선이 요리되었다. 앙토넹은 이 모든 정찬의 하이라이트였고 본인이 직접 조리에 참여하였다.
엄청난 양의 새로운 레시피를 만들고 기록하여 수많은 명저를 출판한, 그리고 요리사의 상징인 하얀 모자를 창안해낸 프랑스 요리의 아버지 앙토넹 카렘. 이러한 그도 1833년 1월 12일 저녁 세상을 떠났다. 평생토록 요리에 사용해 온 숯의 유독가스 때문에 건강이 극도로 악화됐기 때문이다. 이후 그의 시신은 몽마르트의 공동묘지에서 석화가루를 날리며 땅 속으로 허망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요리계의 모차르트는 그 누구도 묻힌 장소를 알 수 없게 쓸쓸히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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