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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음악가 이야기

위대한 음악가들 - 조율사가 바라본 아르투르 루빈스타

by onekey 2024. 3. 1.
박제성2011-09-07 21:17
추천 47 댓글 1
조율사가 바라본 루빈스타인
글: 프란츠 모어 / 정리: 박제성
내가 아르투르 루빈스타인(Artur Rubinstein)과 함께 했던 작업은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의 그것만큼 광범위하지는 않다. 일반적으로 루빈스타인은 자신의 연주 여행에 특정한 한 피아노만을 고집하지 않았고 현지에서 조달 가능한 피아노와 조율사에 의존했다. 그러나 주요 도시에서 연주할 때에는 뉴욕에 있는 우리 스타인웨이 콘서트 부서에 와서 피아노를 선택했고 그리하여 내가 따라가고는 했다.

루빈스타인과 호로비츠의 차이
루빈스타인은 호로비츠와는 전적으로 다른 피아니스트였다. 그는 호로비츠가 피아노를 통해 보여 주었던 그러한 기술은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듣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는 방식으로 음악을 전달했다. 호로비츠 연주회의 분위기는 전류가 흐르는 듯하며 사람들은 의자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피아노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매료되는 데 비하여, 루빈스타인이 연주할 때에 청중은 의자 뒤로 몸을 기대고 앉아 그의 음악을 즐길 수 있었다.
 
호로비츠의 천재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호로비츠 앞에서 루빈스타인의 이름은 언급할 수조차 없었다. 내가 호로비츠와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스타인웨이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내게 경고를 해 주었다. “호로비츠와 함께 있을 때는 절대 루빈스타인 얘기를 꺼내서는 안 됩니다.” 나는 루빈스타인 외의 다른 피아니스트들에 대해서는 호로비츠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매번 그가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라는 말을 덧붙여야만 했다.
루빈스타인도 호로비츠와는 상당히 다른 유형의 피아노를 선택하고 연주했다. 내가 지적했던 바대로, 스타인웨이 피아노는 개성이 강하며 각 악기마다 다른 느낌을 받는다. 피아니스트들은 신체적으로나 음악적인 면에 있어서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이렇게 자신에게 맞는 피아노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피아니스트들에게 축복인 셈이다. 쉬필아르트의 관점에서 보면, 루빈스타인은 호로비츠가 선호했던 액션보다 더 큰 저항을 지닌 액션을 요구했다. 그는 건반 자체에 몰입해서 건반으로부터 느껴지는 저항을 좋아했다. 루빈스타인은 호로비츠의 액션을 결코 다루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일부 스타인웨이 피아노의 특성으로 잘 알려진 깊고 풍부며, 무거운 음색을 좋아했다.
 
그는 매년 유럽에서 돌아오는 즉시 새 피아노를 찾았다. 이전 시즌에서 사용한 피아노를 그가 아무리 좋아했다 하더라도, 그의 연주회가 아무리 멋있게 마무리 지어졌다 하더라도, 그는 해마다 주요 연주회를 위해 새로운 피아노를 선택했다. 또한 그는 항상 자신이 새로 선택할 피아노에 무엇을 바라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선택하든지 옆에서 도울 필요가 없었다. 그는 어느 피아노가 자신에게 맞을지를 즉각 알아 차렸다.
 
많은 연주가들은, 비록 그들이 사치스러울 정도의 선택을 해도 될 만큼 경제적인 여유가 있다 하더라도, 연주회를 한참이나 앞두고 어느 피아노로 연주해야 할지 매우 긴장하기 시작하는데, 그럴 때마다 우리 스타인웨이 연주회 부서에 와서 피아노를 한 대씩 차례로 연주해 보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무대에 두 대의 피아노를 올리기로 결정내리는 연주가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여기에 드는 비용이 상당히 높아진다. 스타인웨이가 유명한 연주가들에게는 임대료를 부과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조율비와 왕복 선적비는 연주가들 자신이 내야 하기 때문이다.

 

루빈스타인은 머뭇거림으로 해서 불편을 겪었던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가 피아노를 선택하려고 들어왔던 어떤 해에, 나는 그가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한 네다섯 대의 피아노를 그에게 보여 주었다. 그는 첫 번째 피아노 앞에 앉아 보더니 즉시 그 피아노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는 몸을 돌려 나를 보며 말했다. “아, 이것, 정말로 아름답군. 이것으로 하겠네.” 그리고는 “프란츠, 우리가 먼저 어디로 가야 하지?”라고 물었다.
“선생님, 이번에는 워싱턴으로 먼저 가시고 그 다음이 필라델피아입니다.”라고 나는 대답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선생님, 제가 여기에 둘러보실 만한 피아노를 몇 대 더 준비했습니다만.” 그는 다른 피아노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이렇게 대꾸했다. “나는 악기와 관계를 즉각적으로 맺는다네. 그렇지 않은 경우에 그러한 유대 관계는 아예 생기지 않아. 악기와 나는 하나가 되어야 하거든. 그래야 내가 그것으로 나를 표현할 수 있지. 음악을 창조해내는데 몰두할 수 있도록 내가 나 자신을 놓아줄 수 있어야 한다네. 만약 피아노와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없다면, 그 때 나는 다른 피아노를 찾는 거라네.” 내가 그를 위해 준비한 다른 피아노들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인자한 성품의 루빈스타인
루빈스타인은 사람들을 사랑하기에 사람들도 진심으로 그를 좋아했다. 거리에서든 비행기나 기차 안에서든 사람들이 그에게 사인을 부탁할 때마다 그는 멈춰 서서 그들과 이야기까지 나누고는 했다. 
호로비츠였다면 상황은 전혀 다를 것이다. 호로비츠의 수줍음은 극에 달한 나머지 자신이 모르는 사람들을 무척이나 두려워했다. 한 번은 그가 우리 모두에게 둘러 싸여(호로비츠는 언제나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지냈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벨뷰(Bellevue) 호텔에서 음악 아카데미로 발걸음을 내디뎠을 때, 한 사람이 말을 건네며 그를 멈춰 세우려 했다. “선생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오늘밤 선생님 연주회에 가려고 합니다.” 호로비츠는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그 남자를 향해 몸을 틀며 걷더니, “잘 됐군요”라는 말만 건넸을 뿐이다.
 
루빈스타인이었더라면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라면 사람들과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함께 일하기에도 매우 편한 사람이었다. 그는 상대방이 자신에게 해 주는 일에 대하여 극적인 감사를 표할 뿐만 아니라 언제나 감사의 말을 잊지 않는 사람이었다. 호로비츠는 피아노가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않으면 이성을 잃을 경우도 있었던 반면 루빈스타인은 결코 그런 일이 없었다.
 
대략 15년 전에 일어났던 일은 이 두 사람의 차이를 잘 보여 준다. 그들은 1주일 간격을 두고 워싱턴에서 연주회를 열었던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아직 케네디 센터(Kennedy Center)가 건립되지 않았던 터라 중요한 연주회들은 모두 컨스티튜션 홀(Constitution Hall)에서 열렸다. 일요일에 호로비츠 연주회가, 그리고 그 다음 주 일요일에는 루빈스타인 연주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나는 그 당시 약 12살쯤 되었던 나의 장남 피터에게 호로비츠 연주회에 데려가겠다는 약속을 했었다. 그리고나서 스미스소니언(Smithsonian)을 포함한 몇몇 박물관에도 꼭 데리고 가겠다는 약속도 했었다. 피터는 워싱턴에 구경간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고 나 역시 그를 데리고 여기 저기 관광할 것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 당시 연주회 서비스 부장이던 데이빗 루빈(David Rubin)에게 이렇게 말했다. “루빈씨, 제가 이번에 제 아들 피터를 워싱턴에 데려 갑니다.” 그는 “아, 프란츠, 절대 안될 말입니다. 호로비츠가 얼마나 아이들을 싫어하는 지 잘 알잖소. 아들을 데려오지 마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호로비츠 근처에 가게 하면 안됩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아들과 약속을 했던 터라 내 마음을 바꾸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들과의 약속을 깨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컨스티튜션 홀에서의 리허설 전에 아들에게 미리 이렇게 말했다. “피터야, 저기 저 가장 끝 줄에 가서 앉아 있으렴.” 나는 계속해서 주의를 주었다. “저 위에 가서 꼼짝 말고 앉아 있으면서, 특히 호로비츠가 걸어 들어올 때에 절대 움직여서는 안 된다. 그는 아이들에게 여간 엄격한게 아니기 때문에, 너를 보면 매우 못마땅해 할 지도 모른단다.”
 
곧 호로비츠와 그의 수행원들이 무대 위로 걸어 올라왔다. 그런데 의외로 예민한 푸들 한 마리를 데리고 왔다. 우리는 그 강아지를 ‘피아노 개(piano dog)’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이 강아지의 다리 하나가 다른 세 다리에 비해 유난히 짧아 마치 다리가 세 개 뿐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호로비츠 부부가 커넥티컷주의 뉴밀포드(New Milford)에 있는 시골 별장에서 머물고 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호로비츠 부인이 우연히 자동차로 그 강아지를 치어 네 번째 다리의 2인치를 잘라 내게 되었다. 호로비츠가 수행원들과 함께 무대로 들어올 때 그 푸들도 같이 따라왔다. 주변을 킁킁대며 돌아다니고 짖기 시작하더니, 무대에서 내려와 곧장 맨 뒷줄까지 달려갔다(여러분들은 이 장면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개는 피터가 앉아 있는 자리까지 달려가더니 느닷없이 피터를 향해 미친 듯이 짖어 댔다!
 
피아노 앞에 앉아 있던 호로비츠는 개가 짖으며 뛰어 다니는 소동을 듣고는 몸을 돌려 어두운 홀을 응시하면서 말했다. “거기 누구요?” 그는 날카롭게 또 물었다. “그 위에 누구요?”
호로비츠는 리허설을 할 때 자신이 모르는 사람들에게 무척이나 까다로운 사람이었기에, 우리는 공식적으로 참석해야 할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매번 확인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가 어둠 속을 뚫어지게 보니 그곳에 피터가 있지 않은가! 그는 격분하여 또 물었다. “거기 누구냔 말이야!”
 
내가 대답했다. “선생님, 제 아들 피터입니다. 제가 아들 녀석과 약속한 대로 그를 워싱턴에 데리고 왔습니다.”그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아, 그래. 알겠네.” 그리고는 다시 피아노를 마주 보며 앉았다. 
 
그 다음 주 다시 워싱턴에 올 때에는 작은 아들 마이클을 데리고 왔다. 나는 전에 마이클과도 피터와 똑같은 약속을 했었고, 그 주가 바로 약속한 주였다. 이번에는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의 연주회였다. 토요일 리허설에서 나는 아들 마이클을 루빈스타인에게 소개했다. 물론 아들 녀석도 흥분해 있었지만, 오히려 루빈스타인이 훨씬 더 흥분해 있었다. 그는 마이클에게 “마이클, 이리와!” 라고 말하고는 그를 피아노로 데려가서 자신의 무릎에 앉히고 그도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가 마이클에게 말했다. “마이클, 저것 좀 봐. 저 홀을 좀 봐. 내일을 이 홀의 모든 좌석이 사람들로 가득 찰 거란다. 아마도 저쪽, 첫째 줄 어딘가에 예쁜 여자 아이 하나가 앉아 있을 거란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 소녀를 위해 연주할 거란다. 마치 그녀 혼자만 있는 듯이 말이지. 연주할 때 나는 내 마음속에 그 소녀를 둘 거란다.”
 
나는 내 아들 마이클이 그 이야기를 얼마나 이해했는지 의심스러웠다. 그런데도 루빈스타인은 계속해서 얘기했다. “마이클, 너도 피아노 칠 줄 아니?” “예, 클래식을 칩니다” 라고 마이클이 대답했다. “무슨 곡을 치니?” 라고 루빈스타인이 물었고, 마이클은 “아, 저는 슈만의 ‘와일드 홀스맨(Wild Horseman)’을 외우고 있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나를 위해 연주해 주겠니?” 라고 루빈스타인이 부탁했고, 그를 매우 편안하게 생각한 마이클을 재빨리 대답했다. “물론이죠!” 그리고 마이클은 몇 소절을 연주했다. “오, 마이클, 너무나 멋지구나!” 라며 루빈스타인은 감탄했다. 이것이 바로 호로비츠와 루빈스타인의 성격의 차이다.

루빈스타인과의 첫만남
처음으로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을 만났던 이야기를 하겠다. 1963-64년 연주회 시즌 중에 뉴 해이븐(New Haven)의 예일(Yale) 대학에 있는 울시 홀(Woolsey Hall)에서의 일이다. 루빈스타인은 이미 유럽 가운데에서도 특히 독일에서 큰 명성을 얻고 있었다. 비록 내가 미국에 오기 전에 독일에서 연주회 일을 했을 지라도, 나에게는 루빈스타인과 일할 수 있는 특권이 없었다. 그래서 드디어 그를 만난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흥분해 있었다. 내가 함께 일해온 대부분의 유명한 피아니스트들처럼, 루빈스타인도 유태인이고 대학살로 많은 친척을 잃었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독일인인 나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했다.
 
나는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한 한 기사를 읽었던 적이 있다. “세상에는 제가 연주할 수 없는 장소가 두 곳이 있습니다. 한 곳은 히말라야입니다. 그곳은 너무 높아 피아노를 가져갈 수 없기 때문이죠. 다른 한 곳은 독일입니다. 나에게 독일은 지나칠 정도로 침울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유창하게 독일어를 할 수 있다 해도 결코 다시는 독일어를 하지 않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내가 그와 함께 일하는 것으로 흥분해 있으면서 동시에 조금이나마 그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기도했다. “주여, 저를 축복하시고, 저도 그에게 축복이 되게 하여 주소서.”
 
처음으로 그의 피아노를 조율하고 난 뒤, 나는 무대 뒤에서 그에게 소개되었다. 그는 내게 매우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물론 그가 나의 액센트를 듣고 내가 독일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음이 틀림없었을 것인데도 말이다. 바로 그 때 내가 말했다. “선생님, 함께 일하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저는 독일에서 왔고 그 때부터 스타인웨이에서 일해 왔습니다. 이제 선생님과 일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젊은이, 자네가 나를 위해 건반을 닦았나?” 그가 물었다. 이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예, 선생님, 물론 제가 했습니다. 저는 항상 피아노를 조율하고 나면 건반을 닦습니다. 언제나 깨끗하게 건반을 닦죠.”
 
“아, 누군가가 말했어야 하는데. 어떤 조율사도 내 대신 건반을 닦지 않습니다. 물론 몰랐을 수밖에 없겠군요. 분명 알 수 없었을 거예요. 우리 측에서 말을 해줬어야 하는 건데.”
그 때 즈음부터 그는 화가 나고 있었다. 그는 말했다. “나는 오늘 밤 연주를 하지 못할 것 같군요. 누구라도 내 건반을 닦고 나면 건반이 너무 미끄러워진다오. 연주를 하지 못할 수밖에.”
 
정말 난감한 상황이었다! 연주회를 시작하려고 오케스트라는 이미 다 들어와 있었고, 청중들은 기대에 한껏 부풀어 있었다. 프로그램에 따르면 그들은 베토벤의 ‘황제’ 협주곡을 연주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니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독주자가 무대 뒤에 서서 “나는 연주 못해!”라고 강경하게 말하고 있으니 우리는 어쩌면 좋단 말인가?
 
몇 사람이 그 무대 뒤에 있었고, 한 사람이 “선생님, 제게 해결책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모두가 그를 보았고 그는 계속했다. “저는 이렇게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연주자들이 전에 이렇게 하더군요. 정말로 효과가 있어요.”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우리는 모두 궁금했다.
 
“프란츠더러 무대에 헤어 스프레이 캔을 들고 나가게 하세요. 그래요, 진짜 효과가 있어요. 그리고 헤어 스프레이를 피아노 건반에 뿌리라고 말하세요. 그러면 저희는 건반이 마르고 약간 끈적거릴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보세요, 선생님. 잘 될 겁니다. 그렇게 하면 건반이 터치하기에 편하게 될 것이고 선생님 마음에 드실 겁니다.” 루빈스타인은 그것이 시도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는지 이렇게 말했다. “해보시오.”
 
나도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부터 헤어 스프레이가 나타났고, 짙은 색 정장을 한 나는 그것을 들고 무대의 그 불빛 속으로 들어갔다. 물론 청중은 모두 연주회를 감상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홀 안의 불빛은 점점 약해졌고 무대에는 조명이 밝혀졌다. 오케스트라 모두가 준비하고 앉아 있는 와중에 그런 스프레이 캔을 든 남자가 나타나다니!
 
드디어 누군가가 걸어 나오자 사람들을 연주회가 시작되는 줄 알고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그냥 계속 피아노 쪽으로 걸어가서 치이익, 치이익, 소리를 내며 건반에 스프레이를 뿌렸다. 스프레이가 모든 건반에 뿌려졌는지 확인하면서 위 아래로 골고루 뿌렸다. 다 뿌리고 나서 확인을 해 보니 건반 전체에 미끄러운 부분이라고는 남아 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 광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지 알 수 없었는지 일부는 웃고 일부는 계속 박수를 쳐댔다. 나도 어쩔 줄 몰라 몇 차례 인사를 하고 무대 뒤로 들어왔다.
 


10분 정도 기다린 후에 루빈스타인은 걸어 나갔고 연주회는 시작되었다. 루빈스타인은 그 때의 건반 감촉을 너무도 좋아하게 된 나머지 그 뒤로 나는 그가 가는 곳마다 헤어 스프레이 캔을 들고 다녀야 했다! 그리고 그는 건반이 깨끗하건 더럽건 간에 내가 스프레이 뿌려 주기를 바랬다! 스프레이를 뿌리면 그가 좋아하는 손에 잡히는 듯한 느낌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멋진 신사와의 추억
루빈스타인은 함께 일하기에 매우 멋진 신사였기에 우리는 결국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는 다시는 독일어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여러 번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따금씩 나와 단 둘이 분장실에 있을 때에 독일어가 불현듯 새어 나와 한참 동안 독일어로 서로 대화하고는 했다. 나는 이런 일에 깊이 감동되어서 여러 번 그를 위해 기도했다. 나는 이렇게 기도했었다. “주여, 제발 문을 열어 제가 믿고 있는 것을 루빈스타인과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하여 주소서. 아시겠지만 주님, 저는 독일 기독교인으로서 유달리 유태인들에 대한 깊은 사랑을 품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독일에서 겪었던 슬픈 과거 때문입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우리가 유럽에서 돌아 왔을 때 루빈스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프란츠, 어떻게 생각하나? 내가 독일에서 다시 한번 연주를 할 수 있을지 말이야. 물론 그렇게 한다면 대단한 성공을 거둘 것이 틀림없겠지. 하지만 그러한 것 외에도, 나는 확신하는 데, 이러한 성공을 거둠으로 해서 내가 독일 국민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네. 그들이라고 다 똑같지는 않을 테니까 말일세.”
 
나는 대답했다. “선생님, 그렇게 하신다면 정말 멋진 일이 될 겁니다. 훌륭한 행동임은 물론이려니와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며 선을 행하시는 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청중의 반 이상이 독일인이었던 자신의 마지막 연주회 가운데 하나인 암스테르담 연주회를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에서는 연주를 끝내 하지 않았다.
 
나는 루빈스타인의 마지막 연주회 가운데 하나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신시내티에서의 연주회였다. 이 연주회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 내가 공항에서 그를 그의 매니저와 함께 차에 태우자마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호텔로 가기 전에 피아노를 먼저 봤으면 좋겠소. 그리고 미리 연주도 좀 해보고.”
 
그래서 우리는 홀로 갔다. 나는 아침부터 이미 그곳에 가서 피아노를 조율하여 상태가 좋은지 점검도 했었다. 그런데 그는 연주하면서 불평을 했다. “피아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네. 잘은 모르겠지만 소리가 이상해. 편하게 느껴지지 않아.”
 
그래서 나는 말했다. “선생님, 제가 오후 내내 다시 손을 보겠습니다. 제가 처음부터 다시 살펴보고 나면 마음에 꼭 드실 겁니다.” 그리고 나는 피아노를 살펴보면서 시간을 보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무엇이 문제인지 찾을 수가 없었다. 내가 보기에 그 피아노의 상태는 매우 좋았다.
 
그날 저녁에 연주회가 열렸다. 그는 제일 처음으로 하이든의 소나타를 연주하고 나서 두 번째 곡을 연주하기 직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갑자기 무대 뒤로 걸어 들어와--그는 연주회 도중에 이렇게 행동한 적은 거의 없었다--바로 내 앞에 멈춰 서서 이렇게 말을 했다. “프란츠, 피아노에 아무 문제가 없었군. 나는 아까 까지는 그냥 좀 이상하다고 느꼈었는데 말이야. 자네가 정말로 고맙군. 피아노 상태가 아주 좋다네.”
 
이 일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분명하게 알게 해 준다. 그는 나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일을 너무도 중요하게 생각한 나머지 두 번째 곡을 연주하기 전에 무대 뒤로 와서 나에게 와서 안심시켜 주는 그런 성격을 가진 사람인 것이다.
 
또 한 번은 필라델피아에서 한 연주회 관계자가 어느 누구도 다른 피아니스트들에게는 베풀어 준 적이 없었던 그러한 행사를 루빈스타인을 위해 특별히 열었던 일이 있었다. 그것은 1월 말 경, 그의 생일에 즈음해서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분명 86세 또는 87세 정도 되었을 것이다. 나는 무대 뒤에서 그날 저녁에 있을 연주회를 위해 피아노를 조율하고 있었고, 요리사들은 루빈스타인을 위해 특별한 케잌을 만들고 있었다. 요리사들은 무대 뒤에서 한 낡은 피아노를 꺼내오더니 말지팬(marzipan) 과자로 피아노 전체를 바르고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는 피아노 위에 멋진 케잌을 만들어 나갔다. 그들은 꼬박 하루를 이 놀라운 작품을 만드는 데 바쳤다. 달콤한 말지팬 과자로 덮어버린 피아노 뚜껑 위에 그들은 조심스럽게 다음의 문장을 초코렛으로 써넣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아르투르 루빈스타인(HAPPY BIRTHDAY ARTUR RUBINSTEIN).”
 
루빈스타인이 그날 저녁 엄청난 박수와 함께 연주회를 마치자, 그들은 그를 무대로 다시 모시고 나왔고 이와 동시에 무대 뒤편에 있던 커튼이 열렸다. 그들은 그 엄청난 피아노 케잌을 무대 중앙으로 밀어 내왔다. 축하의 메시지가 있었고 곧이어 청중석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한 조각의 케잌이 들어 있는 작은 종이 상자를 나누어주었다. 이 행사의 전 과정 모두는 루빈스타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 준다.
 
그 뒤로 나는 그를 단지 한 번 더 볼 수 있었다. 그 때는 루빈스타인의 90번째 생일이 한참 지난 후였다. 그는 뉴욕 드레이크 호텔(Drake Hotel)에 머물며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내가 그의 방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나를 극진히 환대하여 주었다. 우리는 오랜만에 함께 앉아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당시 그의 청각은 매우 좋지 않아서 나는 거의 소리를 지르다시피 말을 해야 했었다. 더군다나 그는 시력 역시 매우 떨어져 있었다. 그래도 그때의 만남은 루빈스타인이나 나에게 매우 즐거운 추억이었다. 나는 그에게 다시 한 번 그를 위해 계속 기도하고 있다는 말을 했고 더불어 그의 건강을 빌었다. 우리는 필라델피아에서의 그 이색적인 생일 파티와 그 외에 우리가 함께 나누었던 수많은 멋진 추억들에 대하여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보스톤에서 일어났던 해프닝 하나를 기억해 내었다. 그날따라 루빈스타인의 피아노가 연주회에 매우 늦게 도착하였다. 당시는 한 겨울이었고 눈이 수십 센티나 쌓여 있었던 데다가 유난히도 추운 날이었다. 리허설 시간이 임박해서야 비로소 그런 추위 속에서 필경 밤새도록 트럭 안에 있었을 피아노가 도착했던 것이다. 드디어 피아노가 무대 위로 옮겨졌고 우리는 피아노를 열어 보았다. 마치 냉장고를 여는 것 같았다. 루빈스타인이 소리쳤다. “내가 어떻게 이런 피아노를 칠 수 있나? 나는 이렇게는 연주 못해.”
나도 말했다. “저도 이런 상태에서는 조율할 수 없습니다.” 우선 얼음이 낄 정도로 차가운 상태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조율을 하면 안 된다. 피아노는 온도 변화에 따라 서서히 적응시켜야 하는 것이다. 운반되기 전에 조율된 피아노는 아무리 추운 상태에서 운반이 되었다 하더라도 새로운 환경에 놓이게 되면 대개의 경우 이전에 조율되었던 상태로 되돌아온다. 그러나 이것 또한 매우 천천히 진행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곳, 보스톤 심포니 홀 무대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는 어떻게 하면 지나치지 않으면서도 최대한 빨리 피아노를 따뜻하게 만들 수 있는가였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당시 우리가 했던 그 우스꽝스러운 장면은 나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루빈스타인과 나는 엉덩이를 건반에 대고 앉아 체온으로 피아노를 침착하게 녹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도 마치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기라도 하듯 대화를 나누면서 말이다.
 
우리가 그렇게 앉아 있는 동안 어떤 신문사 사진기자가 루빈스타인을 취재하려고 들어오더니 우리 둘이서 그렇게 스타인웨이 피아노 건반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있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갔다. 어쨌든 우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효과가 매우 높았기에 연주회를 훌륭하게 마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