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
정인섭
1년을 주기로 바뀌는 사계절은 어느 분야 예술가에게든 풍성한 영감을 제공해왔다. 화가들은 그림으로 그 정경을 묘사했고, 작곡가들은 음악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계절의 느낌을 표현해냈다. 굳이 사계절을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있지 않은 그림이더라도, 풍경이 배경으로 등장할 경우 대개 어느 계절인지를 알 수 있고 그것은 그림 전체에 대한 느낌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화가들이 사계절을 모티브 삼아 직접적으로 묘사하며 연작처럼 그렸고 각기 그린이의 개성을 드러내며 보는 이로 하여금 다른 나라, 다른 지방, 다른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감동을 보여주었다. 그 중 일반적인 풍경을 넘어선 사계절을 그린 화가가 있으니, 이탈리아 화가 주세페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 1527?~1593)다.
밀라노에서 태어난 아르침볼도는 아버지와 함께 밀라노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화공으로 일하다가 1562년 프라하로 넘어간 후, 페르디난드 1세, 막시밀리안 2세, 루돌프 2세까지 무려 3대에 걸쳐 궁정화가로 활동한다. 그의 정교하고 치밀한 화법은 이탈리아보다는 북유럽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볼 수 있는데, 그의 이름이 유명한 것은 보시다시피 기괴한 그림에 있다. 동식물을 소재로 써 사람 머리를 형상화한 그의 그림은 사실 이상하고 기괴하다는 느낌이 들게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것은 단지 이상야릇한 그림이 아니라 상상력의 정수란 생각이 들게 할 정도의 환상화다.
지금 봐도 눈을 크게 뜨게 만드는 그림이니 당시에는 오죽했으랴. 한때 저속한 그림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초현실주의가 그림판을 휩쓸면서 재평가되었다. 한마디로 그의 그림은 기발하다. 이상하다기보다 기발한 것이 맞으며 저속한 것이 아니라 상상력의 포화로 일어난 폭발적인 환상의 전개다. 위 그림을 다시 보자.
각 계절을 묘사했다는 것은 분위기만 봐도 알 수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 계절에 맞는 꽃과 과일, 채소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그리고 계절별 색감들, 화사한 봄과 싱그러운 여름, 비옥한 가을과 회색빛 겨울까지 전반적인 색감이 사계절의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다.
한 가지 더 이 그림의 놀라운 점은 이것이 단지 사계절만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 이 사계절 연작은 초상화이기도 한데, 이를 주문한 사람이 바로 당시 왕이었던 루돌프 2세였다. 한마디로 왕의 얼굴 가지고 장난(?)을 친 셈인데, 왕의 용안을 이렇게 그린 화가의 강심장도 그렇지만 이것을 초상화로 흔쾌히 받아준 왕도 평범하지 않다고 하겠다. 루돌프 2세는 종교 개혁 시대에 아버지인 막시밀리안 2세의 신교 장려에 반해 구교를 장려한 관계로 헝가리를 비롯한 여러 영토의 반란을 초래하였고, 대공들로부터 통치 능력이 없다는 선언을 듣게 되어 아우인 마티아스가 통치를 대행하였다. 당시에는 루돌프 2세가 기이한 취미를 가지고 있고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어서 자질 문제로 쫓겨났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아르침볼도의 초상화를 받아들인 아량과 해학이 이러한 왕의 권위 문제와 연관되었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아무튼 천재 화가와 기지 가득한 왕의 개성이 만나 창조된 기발하고 환상적인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클래식에서도 사계절은 음악적 영감의 원천이었다. 일단 사계절하면 떠오르는 곡은 비발디의 작품이다. 클래식 리퀘스트 1위를 꿰차고 있으며 초보자와 애호가 할 것 없이 클래식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명곡 중 하나로 자리하고 있다. 바로크 시대 트로이카인 비발디-바흐-헨델이 음악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것은 주지의 사실인데, 바흐와 헨델보다 7년 먼저 태어난 비발디는 협주곡 양식을 완성하였을 뿐 아니라 여러 형태의 협주곡을 선보여 기악곡의 원류를 이룬 인물이다.
비발디는 작곡가이기 전에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였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연주법에 관한 새로운 방향을 개척하여 18세기 전반 이탈리아 바이올린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의 중요한 협주곡 대부분이 바이올린 협주곡인 것은 그가 바이올리니스트였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비발디의 사계는 원래 따로 작곡된 작품이 아니다. 그의 가장 중요한 바이올린 협주곡집인 ‘화성과 창의의 시도 Op.8’ 총 12개 곡 중 앞의 4개 작품을 가리키는 것이다. 제1, 2, 3, 4번에 각각 봄, 여름, 가을, 겨울이란 표제를 붙이고 그에 대한 소네트(Sonnet, 14행시)로 설명하고 있어, 이 4개 작품만 따로 떼내 우리가 <사계절>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사계절의 정경과 풍경, 사람들의 모습과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깊은 감성을 이처럼 다양하고 다채롭게 묘사한 곡은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비발디의 사계절을 사랑하고 있다.
펠릭스 아요와 이 무지치의 앨범은 전통적인 고전 명반으로 추앙 받고 있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음반 가이드에서 첫손에 꼽히던 연주로 규범적인 스타일의 교과서적인 명연으로 평가 받고 있다. 녹음연도가 1959년이라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지금 들어도 그 싱그러운 앙상블은 퇴색되지 않았다. 음악가들이란 뜻의 이 무지치는 1951년 로마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을 졸업한 12명의 젊은 아티스트들에 의해 조직된 후 바로크와 고전은 물론 현대 음악까지 광범위한 레퍼토리를 자랑하며 어떤 곡에서든 모나지 않은 전통적인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지휘자 없이도 치밀하게 잘 짜여진 앙상블을 선보이며 실내악단의 대표주자로 전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 무지치는 리더가 바뀔 때마다 비발디의 사계절을 녹음해 왔는데, 그 중 이 앨범이 최고의 명연으로 회자되었고 덕분에 비발디 사계절 하면 이 무지치가 떠오를 정도가 되었다. 이 연주를 포함, 화성과 창의의 시도 전곡을 담은 앨범이 Philips Duo 시리즈로 나와 있다.
파비오 비온디와 유로파 갈란테의 사계절이 처음 등장했을 때 애호가들은 탄성과 환호를 질렀다. 귀를 홀리는 다이내믹과 강약 대비, 완급 조절과 독특한 호흡은 지나치게 유명한 고전 명곡의 지루한 모범 연주들에 익숙해 있던 애호가들의 뒤통수를 치며 이렇게 새로운 옷을 입힐 수 있다는 것을 자신만만하게 보여주었다. 이 자리에 이런 음표가 있었나, 이 쉼표가 이렇게 길었나를 넘어 빠르기말과 셈여림, 악보에 적힌 지시어를 제대로 지키고 있나 싶을 정도의 과감한 프레이징은 실로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물론 이러한 이질감(?)을 느끼게 한 데는 그들이 사용한 악보 탓도 있다. 영국 맨체스터 중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필사본을 사용했는데 초판 인쇄본보다도 먼저 필사된 이 악보는 기존 악보와는 다른 표현도 적혀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대 악기를 사용한 원전 연주 단체의 사운드에 더해 Opus111의 고음질도 청감상의 쾌감을 높여주어 이 앨범이 이 무지치의 연주를 밀어내는데 한몫 거들었다.
아직 제대로 비발디 사계절을 들어보지 못한 이들에게는 아요와 이 무지치의 연주를 권한다. 고전 중의 고전으로 평가 받는 오래된 연주지만 기본이란 이런 것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앙상블과 악곡 표현은 시적 감흥까지 불러일으키며 비발디 사계절의 정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색다른 맛, 같은 땅의 같은 지역이라 할지라도 해가 바뀜에 따라 사계절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다면 비온디와 유로파 갈란테의 연주를 들어볼 것을 권한다.
양상은 다르지만 이들 두 연주는 이른바 신구 세대를 대표하는 명연들로서 시대가 흘러도 찾는 이의 귀에 절대로 실망감을 안겨주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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