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봉인된 추억이 풀려나와 스스로를 무너뜨릴까봐 조심하는 곡이 있다.
나에겐 파헬벨의 Ciacona가 그렇다.
파헬벨하면 Canon부터 떠오르겠지만,
그가 오르간으로 남긴 Ciacona(Chaconne)곡은
샤콘느라는 작품들이 그렇듯이 가슴을 저며오는 짜릿한 느낌을 가지고 있다.
이 곡을 알게 된 것은 어찌 보면 운명과도 같았다.
대학 시절, 일요일에 학교 도서관에 간 적이 있었다.
사실 난 대학 다닐 때 도서관에 학년별로 한 번씩만 다녔다.
원체 도서관은 오로지 책 보기 위해 가는 곳이지 공부하러 가는 곳이 아니란
고정 관념 때문에 공부도 방문 걸어 잠그고 혼자서만 했다.
월요일 실험 준비를 위해 마지못해 도서관에 갔다가,
역시나 견디지 못하고 대충 자료만 찾은 후 집에 가려다 잠시 과룸에 들렸었다.
과룸엔 학생회에서 새로 장만한 기타가 한 대 있었고
방앗간 들른 참새처럼 혼자 기타를 뚱땅거리고 있었다.
대략 30분간을 놀았나, 집에 가려고 일어나 몸을 돌렸더니
문 앞에 웬 아리따운 아가씨가 다소곳이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쑥스러운 듯이 박수를 쳤다.
엉겁결에 인사하고는 허겁지겁 나왔다.
그랬더니 그녀는 잠시만 하며 날 붙잡았고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마지막 연주곡 제목이 뭐에요?"
"...아, 예... confesiön이요..."
"......"
"망고레란 작곡가의 작품이죠."
"아... 아는 작곡가군요."
그렇게 맺어진 인연은 그 날 하루를 같이 있게 만들었고
그 후로도 음악적 교감이 넘치는 관계가 지속되었다.
그녀는 오르간을 전공하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오르간을 공부하지 않고 있었다.
악기 다루는 사람들이 한번 걸리면 몇 년을 고생하기도 하고
제대로 된 치료법도 없는 연습병에 걸려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손이 말을 듣지 않고 쉬운 곡도 연주하지 못하는 그것은
지금도 내 주변 연주인들에게서도 볼 수 있고
견디다 못해 미국으로 전문적인 치료를 받으러 떠난 친구도 있을 정도다.
그녀도 그랬다.
그녀와 나는 거의 매주 공연을 보러 다녔다.
당시 나는 시립 교향악단을 비롯해 시간이 허락하면 매주말을 공연에 투자하고 있었다.
둘은 항상 공연장에서 만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같은 취미를 공유하고 있고 늘상 붙어 다님에도
남들이 예상하는 그런 관계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둘 다 너무나 순진했던 것 같다.
아무튼 같이 돌아다닌 지 거의 반년이 지난 어느 날
난 그녀가 다니는 성당에서 그녀의 오르간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손이 많이 나아졌다고 성당 지하의 어느 작은 홀에 나를 데려가서는
감동이 몰아치는 곡을 한 곡 연주해주었다.
그 곡이 바로 파헬벨의 샤콘느였다.
한동안은 그 감동에서 못 벗어나 매일 그 선율을 흥얼거리며 다녔다.
그 이후로 나는 파헬벨이란 작곡가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고
그의 이름이 보이는 모든 음반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나 음반으로 접할 수 있는 파헬벨의 음악은 캐논을 비롯해 몇 곡 되지 않았다.
하지만 중고 가게와 대형 음반점을 뒤져서 기어이 그 샤콘느를 찾아내었다.
그리고 매일 잠들 때까지 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그녀는 유학을 떠났고
나도 공부를 위해 더 이상 공연장을 찾지 않았다.
1년 쯤 후 그녀가 방학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외국에 나갈 준비로 정신이 없었고
그녀를 한 번 만난 후에 나는 말도 없이 곧바로 미국으로 떠났다.
나는 그녀의 전화번호도 주소도 몰랐으며 유학 가며 해지한 삐삐 번호만 가지고 있었다.
돌아와서 다시 만났을 때 연락처를 물어보려 했지만
그녀가 처음 살며시 잡은 손길에 나는 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집앞에 바래다 주었을 때도 난 그저 안녕이라고만 말했다.
서로를 연결해 주는 고리라고는 나의 핸드폰 번호가 전부였었다.
나는 그 전화를 아버지에게 넘기고 갔고 아버지에게서,
받으면 그냥 끊어버리는 전화가 매일 한 번씩 한달 동안 왔었다는 말만 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다시 흘러갔다.
예나 지금이나 기타에 미쳐 살던 나는 무조건 모으던 악보더미 속에서
파헬벨의 샤콘느 편곡보를 발견했다.
기타 독주로 편곡된 파헬벨의 샤콘느.
목이 메었다.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악보를 연주해 나갔다.
가슴이 막혀오는 것 같았다.
아마 외우려고 하지 않아도 외워졌던 유일한 곡일 것이다.
그렇게 추억 속의 그 곡은 이미 오래전부터 내 손에 있었다가 발견되었다.
지금도 가끔 이곡을 연주하지만 할 때마다 새롭고
시간이 거꾸로 흘러 옛날의 그 성당에 와 있는 것만 같다.
오늘 사온 잡지에서 그녀와 매우 닮은 모델을 보았다.
살짝 웃는 모습이 어찌나 똑같은지 모르겠다.
순수하고 청초하며 사람을 맑게 만들었던 그때의 그 모습을
분명 아직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도 오르간이란 단어를 들으면 떠오르는 그녀.
손이 완전히 나아 계속 공부를 했다면
아마도 공연 포스터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설렘으로 바뀌어 다시 가슴 속을 헝클어 놓는다.
추천 음반 시력을 잃고서도 오르간의 명인에 등극한 헬무트 발하의 연주는 어느 것이든 사람 속을 파고드는 감동이 있다. 그가 두 번에 걸친 대장정으로 완성한 바흐의 오르간 전집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 초점이 주로 바흐에 맞추어져 있는 것은 조금 안타깝다. 그가 남긴 바흐 이외 작곡가들의 작품에도 그의 냉철하고 단단하면서도 활화산 같이 타오르는 정열이 고스란히 담긴 명연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 중 이 앨범은 바흐 이전 작곡가들의 오르간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바흐 자신이 오르간 주자로서 널리 활동하였고 덕분에 많은 오르간 작품들을 남겼지만, 바로크와 바로크 시대 이전 작곡가들의 오르간 작품에는 그와는 또 다른 매력을 숨긴 곡들이 수두룩하다. 앨범 제목처럼 여기에는 바흐보다 먼저 태어난 유명 작곡가들의 오르간 작품이 가득 차 있다. 타이틀 그대로 바흐 이전 세대 작곡가들의 오르간 음악을 담고 있지만 이것은 바흐와 한세대 이상 차이 나는 것이 아니라 바흐와 동시대를 살았거나 바흐가 음악의 길에 본격적으로 들어서기 바로 전에 오르간의 명수로 활약했던 작곡가들을 말하는 것이다. 바흐가 연주를 듣기 위해 420km를 걸어간 것으로 유명한 당대 명오르가니스트였던 북스데후데를 비롯, 바흐가 음악의 길로 들어서도록 영향을 끼쳤던 큰 형 요한 크리스토프의 스승 요한 파헬벨, 그리고 뤼벡과 브룬스, 뵘 등 오르간 음악에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는 생소하지만 바흐 못지않은 멋진 작품을 남긴 이들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눈을 크게 떠야 할 작곡가는 파헬벨이다. 이 앨범에 실린 샤콘느와 코랄 전주곡만으로도 파헬벨이 남다른 재능을 가진 작곡가였음을 금방 알아챌 수 있다. 파헬벨 = 캐논의 등식을 깔끔히 깨뜨리는 이들 작품에는 오르간만의 음색과 기품이 담겨 있다. 물론 이러한 작품들을 돋보이게 만드는 것은 발하의 솜씨다. 특히 파헬벨의 샤콘느는 그 어느 연주자와도 비교할 수 없는 깊이와 감동을 전해준다. 파헬벨의 샤콘느를 연주한 음반은 현재 시중에서 몇 장 구할 수 있다. 모두 이름대면 알만한 오르가니스트들이지만 여태까지 발하의 이 연주 이상의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오르간이 가진 감성의 화염. 깊은 곳에서 타오르는 오르간의 불꽃을 발하처럼 피어오르게 하는 연주자가 또 있을까. 그저 음표의 나열에 연주력을 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쓴 곡을 직접 연주하는 듯한, 그리고 듣는 이의 마음이 어떤 상태로 진행될 것인가 알아채고는 충분히 그것에 동조하고, 더욱 깊은 감동으로 이끌어간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오르간의 음색 너머에 존재하는, 터져라 뱉어내는 파이프의 숨찬 외침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다양하게 표현해낸다. 16살 때 시력을 잃고 평생 빛을 보지 못하고 살았지만 그는 오르가니스트로서, 그리고 하프시코드 연주자로서 끝없는 노력과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특히 바흐 작품 연주에 있어 하나의 규범을 제시했으며 작곡과 저작 등 폭넓은 활동을 했다. 오르간의 깊은 목소리가 어떠한 음향과 음악으로 사람 가슴을 파고드는지 알고 싶다면 헬무트 발하의 연주가 분명한 해답을 전해줄 것이다. 오르간도 피아노처럼 그저 눌러서 소리 나는 악기가 아니란 것을 흠뻑 느낄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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