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명 연주가들이 말하는 무대 공포증
무대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동경과 공포… 무대를 향한 끝없는 열정 뒤에 가려진 공포… 무대 공포증, 그것은 연주가에 대한 음악의 잔인한 복수인가? 아니면 정결한 음악의 신전에 들어서기 위한 통과의례인가? 유명 연주가들의 사례를 통하여 이 문제를 생각해 본다. |
그대 앞에만 서면
“상상해 보라. 너무도 흥분한 나머지 나는 내 삶의 촛불이 꺼져 가고 있는 것처럼 심한 현기증을 느끼고 무력감에 빠진다. 손을 들어 올릴 수도 없을 것 같고, 손가락을 움직일 수조차 없을 것 같다. 피아노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느낌은 마치 내가 절망에 빠져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모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무대로 걸어 나와 나 자신을 안심시키고 난 뒤, 여든 여덟 개의 건반이 내게 던지는 다정한 미소를 받게 되면, 피아노를 사랑하는 마음이 절로 일어나고, 그리고 난 다음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흐르기 시작한다. 나는, 연주할 때면 언제나 모든 음표에 매달려 있는 행복이라는 열매를 맛본다. 연주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들 때도 없지 않지만, 일단 무대에 오르면, 음악적 영감이 나를 이끌고 간다.”
이것은, 모차르트와 바르토크 해석의 대가로 알려져 있는 릴리 크라우스의 담담한 증언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른바 무대 공포증과 마주하게 된다. 크라우스의 언급에는 무대에 오르기 전 연주가가 느끼는 숨 막히는 긴장과 공포가 담겨 있다. 이러한 심리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면, 악보를 잊어버리지나 않을까, 연주 중에 실수를 하지나 않을까, 연주 중에 컨디션이 갑자기 악화되지나 않을까 하는 따위의 불안감을 떨쳐 버리기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러한 불안감은 애송이 음악도의 전유물은 아닌 것처럼 보이며, 오히려 연주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또 다른 모습과 강도로 연주가를 괴롭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스페인 음악의 대가로 알려져 있는 알리치아 데 라로차의 또 다른 증언을 들어보자.
“나는 훌륭한 연주를 할 수 있도록 모든 채비를 다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건반을 너무 딱딱하게 누르는 것처럼 피아노가 갑자기 소리를 내고 나면, 그 때부터 좋지 않은 연주를 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한 가장 끔찍한 느낌이고,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단 한 가지의 방법은 음악 속에 완전히 몰입하는 것밖에는 없다. 음악이 나를 저 끝까지 데려다 줄 것이다.”
객석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무대 위가 밝아지면 이제 한 사람이 그 자리에 나가 무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하여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 그 곳에 자신이 의지할 곳이나 숨을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의 행동거지 하나하나 청중에게 있는 그대로 노출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리하여 실수는 야유로 돌아오고 성공은 갈채로 보답을 받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 자리, 그 순간 속에서 단 한 번의 사건으로 이루어진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한 마디로 그에게 ‘두 번’은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각도에서 보자면 무대 공포증이란, 예측할 수 없는 미래와 돌발 상황에 대한 공포, 과거에 저질렀던 실수나 실패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 이에 따른 자신감의 상실 등이 함께 어우러져, 연주가들이 경험하는 특수한 심리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연주가가 처한 ‘단 한 번’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청중, 그대는 적인가? 동지인가?
글렌 굴드는 이 ‘단 한 번’이라는 조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실황 연주회의 진정한 본질은 우리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즉 ‘다시 합시다! 지금까지 한 것은 별로 좋지 않아…’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연주를 다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연주회에서 나는 항상 정확한 연주를 하고 싶었다. 나는 연주를 멈추고, 마음을 가라앉힌 뒤, ‘연주를 다시 한 번 해 보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너무도 많이 느꼈다.”
그는 또 이런 말도 하고 있다.
“(내게) 연주회는 차선책보다도 못한 것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성취되어야 하는 그 무엇이었다. 그리고 연주회란 진정한 예술 경험을 위한, 매우 보잘 것 없는 대용품이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음악의 진실이란 ‘순간의 울림 속에서 발현되는 것’이기보다는 ‘스스로 정복해야 할 고지’였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그에게 청중은 불필요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연주회를 회피했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대인 공포증에 있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자신의 연주를) 단 한 사람이 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내 연주를 과장된 것으로 만들었고, 그러한 한에 있어서, 그러한 경향은 내가 연주를 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버릇이 되었다는 사실을 나는 알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보다는 그들의 반응에 나 자신이 주의를 더 기울인다는 것을 의미했다. 간단하게 말해 보면 그것은 음악의 목적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것에 대한 부담감, 청중의 태도와 반응에 대한 의구심, 뭔가 특별히 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 관념 등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연주가는 거의 없을 것이다. 피아노 연주사에서 이러한 압박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리스트에 버금가는 연주가로 알려져 있는 아돌프 헨젤트가 있다.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할 때, 그가 오케스트라의 서주부가 끝날 때까지 무대 옆에 숨어 있다가 독주 부분이 되면 피아노로 달려와 연주를 했다는 이야기나, 남이 자신의 연주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만 해도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을 정도였다는 이야기 등은 액면 그대로 믿기 힘들 정도이지만, 어쨌든 그의 신경과민 증세는 치유 불능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대사를 잊어버린 연극배우
사실 무대 공포증과 관련하여 볼 때 모든 피아니스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역시 기억력인 듯하다. 거의 모든 피아니스트들이 빠짐없이 언급하는 것이 바로 이 문제이다. 꽤 오래 전 외국 교향악단과 협연을 했던 한 국내 연주가가 연주 도중 악보를 잊어버려 연주를 제대로 하지 못한 일도 있는 것을 보면, 이러한 일이 삼류 연주가에게서만 일어나는 일만도 아닌 것 같다. 이를테면 그것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악몽’인 것이다. 알프레드 브렌델도 그런 경험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공연을 하는 도중 악보를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때보다는 독주회에서 일어나곤 한다. 그럴 경우 다른 예술가들도 그러하겠지만, 나는 어떻게 해서든 기억을 되살리려 애쓰며 어렵게 어렵게 공연을 이끌어 간다. 에드빈 피셔, 코르토, 슈나벨 등도 가끔 공연 도중 악보가 기억이 나지 않아 고생을 한 적이 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리하여 많은 연주가들이 시각적 기억력, 청각적 기억력, 무의식적 기억력 등과 같은 수많은 처방을 내 놓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어떤 것도 무대 공포증과 관련된 한 그리 큰 힘을 발휘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이 문제와 관련하여 약간은 장난기 섞인, 그러나 그 나름으로는 심각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바로 미샤 디히터이다.
그는 완전한 인간은 있을 수 없지 않은가 라고 반문하면서, 자신이 했던 게임 한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연주에 들어가면서 그는 자신이 이번 연주에서는 어느 부분에서 틀릴 것인가를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자리에 도달하고 나면 여지없이 실수를 하게 되는데, 그것이 기억상의 착오였다면 자신의 마음이 편안해졌고, 중대한 실수였다면 그보다 훨씬 더 즐거운 일었다고 한다. 이 게임을 통해 디히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완벽성에 대한 지나친 추구는 연주가 자신에 대한 심리적 부담만을 가중시키고, 실수를 줄여 주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연주가여! 왜 당신은 무대에 서는가?
그렇다면 여기서 일어나는 의문점 몇 가지가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연주를 하는가? 왜 그토록 무서워하는 무대에 올라야 하는가? 무대에서 그들이 찾는 것은 무엇인가? 무대는 단순히 명성을 얻기 위한 도전의 대상인가? 연주가에게 무대란 양면가치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인가? 다시 말해서 무대란 동경과 두려움, 애정과 증오가 공존하는 그 무엇인가? 이럴 때 탈출구는 과연 없는 것인가?
현실을 돌아보면 실제 연주보다 녹음이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우리 시대에 있어서 무대 공포증은 연주가들이 떨쳐 버려도 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굴드처럼 몇 번이고 새로 녹음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을 택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순간적 재현’을 기본으로 하는 음악의 전통적 존재 양식이 음악의 부수적인 영역으로 후퇴한 현 상황에서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녹음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긍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서 음악이 본유하는 신비한 분위기와 숭고한 본질을 싸구려로 전락시키는 역기능을 하고 있는 것 또한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 결과 음악은 그 자체로서 ‘물신화’, ‘사물화’, ‘박제화’의 길로 들어선 지 오래이다.
그렇다면 연주회란 무엇일까? 오래 전 작고한 클라우디오 아라우는 이렇게 대답한다.
“연주회는 여전히 나에게 있어서 많은 것을 의미한다. 연주회에서 연주를 한다는 것은 결코 일상적인 문제가 아니다……피아니스트에게 있어서 연주회란 내적인 무엇인가를 의미해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무대에 올라, 음악을 연주하고, 박수갈채를 받으며, 무대를 내려오는 것만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당당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힌 아라우 자신도, 그리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10대 시절 정신과 치료를 받은 경험이 있다.
음악의 진실 또는 공포의 보수
그렇다면 연주는 대체 왜 하는 것인가? 야나체크 해석의 대가인 루돌프 피르쿠스니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연주회에서 예술가는 언제나 음악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어떤 것, 즉 이 곳 저 곳에 뉘앙스를 삽입하는 것과 같은 어떤 것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활력 덕택으로 나는 피아니스트라는 나의 직업을 즐긴다. 나는 음악을 사랑한다. 그리고 음악은 살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적합한 연주에 의해서만 살아 있을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적합한 연주란, 반드시 기술적으로 완벽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 새로운 삶을 불어넣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브렌델은 이렇게 말한다.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예술가는 공연을 해야 한다. 연주 프로그램을 가지고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할 수도 있지만, 바로 이것이 인생인 것이다. 그러한 공연은 나를 완전히 녹초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연주회에서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된 뒤에 느끼는 상쾌함은 또한 얼마나 색다른 것인가?”
이들의 말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그것은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무대 위에서만 밝혀지는 음악의 진실을 얻기 위한 용기와 도전’이다. 팽팽한 긴장 속에서, 저 멀리서 순간적으로 왔다가는 사라져 버리는 ‘한 순간의 울림’이 음악적 진실의 실체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 진실이 연주가의 몸과 마음을 관통하면서 지나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쩌면 무대 공포증은 연주가에게는 참기 어려운, 잔인한 천형(天刑)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음악이 연주가에게 요구하는 잔혹함의 강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 속에서 연주가와 청중 모두가 마음으로 얻는 진실의 열매는 더욱 더 아름다운 것이 되리라.
이쯤에서 호로비츠가 자신의 유일한 제자였던 바이런 자니스에게 했던 말을 인용해도 좋을 것 같다.
“자네는 이제 바깥 세상에 나가서 실수를 해야 해… 그러나 그래도 괜찮아… 그건 자네가 저지른 실수일 테니 말일세… 그걸 모두 자네 것으로 만들게나… 자네의 음악을 가지고 무언가를 말하게…그게 무엇이든 상관없지만, 자네 자신만의 것을 이야기해야 하네…”
여기서 호로비츠는 실패를 경험으로 바꾸고 한 걸음 한 걸음 성장해 가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보자면 어떤 경우에도 면역 작용이 일어나지 않는 무대 공포증이란 음악의 진실이 연주가에게 씌워 놓은, 영원히 벗길 수 없는 멍에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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