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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음악가 이야기

위대한 음악가들 - 조율사가 바라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by onekey 2024. 3. 1.
박제성2009-10-20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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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율사가 바라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글: 프란츠 모어/ 정리: 박제성

 

 

 

나는 25년간 블라디미르 호로비츠(Vladimir Horowitz, 1903-1989)의 모든 연주회와 녹음에서 피아노의 조율을 책임져 왔다. 나는 윌리암 후퍼(William Hupfer)로부터 그 자리를 이어받았는데, 그는 50년간 스타인웨이의 1급 기술자였으며 파데레프스키(Paderewski)나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ff, 1873-1943)같은 유명한 피아니스트들과 연주 여행을 다녔다. 빌 후퍼(Bill Hupfer)는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나는 스타인웨이에서 그의 조수로 이 일을 시작했다. 그는 한 달에 한번 호로비츠의 집에 갈 때마다 나를 데려갔고 나중에는 나 혼자 가도록 했다.

 

그 시절에 나는 단 한 번도 호로비츠를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수줍음을 많이 타는 데다가 매우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항상 아침 늦게까지 잠을 잤고 일어난 후에도 계속 위층에만 있었다. 내가 피아노에서 작업을 할 때면 품위 있는 집사 제임스가 예쁜 은쟁반에 커피를 내게 가져다 주곤 했다. 오직 제임스만이 내가 여러 달 동안 본 유일한 사람이었다. 마침내 어느 날인가 호로비츠가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는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았고 서서히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내가 조율할 때면 그는 소파 모퉁이에 앉아 나에게 말을 걸기도 했고 내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 시기는 침묵의 기간이었는데, 왜냐하면 호로비츠는 공식적으로 연주회를 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 그는, 수 많은 클래식 음반이 제작되었던 유명한 30번가 콜롬비아 레코드 스튜디오에서 많은 녹음을 했다. 나는 피아노를 손보고 조율하기 위해 그를 따라가곤 했다. 호로비츠는 연주할 때 나에게 옆에 앉아서 악보를 넘겨 달라고 부탁하고는 했는데 그것은 언제나 끔찍한 경험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언제 폭발할 지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다.

 

호로비츠 자신의 연주, 아니면 그를 혼란시킬 그밖에 다른 것이든, 그것이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제대로’ 되지 않으면 그는 이내 폭발하고는 했다! 심지어 더러운 유리잔이나 의상실의 먼지 낀 탁자 같은 것에도 그는 화를 냈다. 나는 혹시 실언이라도 할지 몰라 그에게 말 거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어느 날인가 그가 자기 자신에게 화를 냈던 기억이 난다. 연주하고 있던 몇 소절이 그가 바라던 대로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주먹으로 건반을 내리쳤고(그는 너무도 힘이 셌다) 벌떡 일어나서 피아노 옆으로 가더니 이번에도 주먹으로 피아노 뚜껑을 받치고 있는 막대를 쳤다! 뚜껑은 곧 엄청난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다행히도 그러한 폭발은 이내 끝났고, 그는 다시 극도로 고요해 졌다. 그러나 계속 녹음을 진행할 수는 없었다. 그는 하든 일을 멈추고 쉬어야 했다. 30번가 스튜디오에서 그가 또 한 번 폭발했을 때, 우리는 침대를 들여갔고 그는 거기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

 

카네기 홀에서 리허설을 할 때의 일이다. 그가 내게 어찌나 화를 내며 소리를 질러 댔든지 내 마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피아노 위치 때문에 야단법석을 피우면서 한 쪽으로 1인치를 더 움직여 보기도 하고 무대 앞쪽으로 또는 안쪽으로, 그것도 아니면 옆쪽으로 옮기곤 했다. 그리고 나서는 커튼을 조금 더 또는 조금 덜 열어 보곤 했다. 그는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모든 위치를 다 시도해 보는 것이다.

 

그 날 카네기 홀에서 호로비츠는 적절한 피아노 위치를 정하지 못했다. 한 무대 담당자가 제안했다. “마에스트로, 선생이 연주하는 동안 저희가 피아노를 움직여 보면 어떨까요? 마음에 드는 지점에서 멈추라고 말하십시오. 여기 있는 우리들은 충분히 힘이 세니까요. 그렇게 하면 정확한 지점을 찾을 수 있을 지도 몰라요.” 호로비츠는 좋은 의견이라 생각했고 그가 연주하는 동안 인부 몇 명이 그가 앉은 의자를 들고 다른 이들은 피아노를 들고 매우 천천히 움직였다. 갑자기 그는 소리쳤다. “그만! 그만!” 그는 정확한 지점에 이르렀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제서야 모두가 긴장을 풀었고 나는 홀에서 지켜 서서 듣고 있던 사람들 틈에 가서 앉았다.

 

호로비츠는 느닷없이 폭발해서 청천벽력과도 같은 고함을 버럭 질러 댔다. “프란츠! 프란츠! 프란츠 어딨어? 나 피아노에서 미끄러지고 있어. 피아노가 똑바로 놓여 있지 않았잖아! 프란츠 어딨어? 프란츠 어딨어? 프란츠!!”

 

나는 겁에 질려 그에게로 달려가면서 ‘똑바로’가 뭘 말하는 건지 궁금해했다. 그의 옆에는 언제나 탁자가 하나 놓여 있고 그 위에 그는 늘 물 잔을 올려놨었다. 내가 다가가는 것을 보고 그는 물 잔을 집어서 내게 던지려 했으나 곧 멈추었지만 그 잔을 내려놓지는 않았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피아노 주위를 돌며 이쪽 저쪽으로 아주 약간씩 움직여 보려 했다. 우리는 결코 그가 의도하는 바를 알아낼 수 없었고, 바로 이것이 그가 폭발하는 이유였다. 이런 일은 보통 예고 없이 일어나곤 했다.

 

연주회에서의 호로비츠

1953년에서 1965년까지 12년간 연주회장을 떠나 있었던 호로비츠는 당시 카네기 홀에서 재기 연주회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게 극도로 긴장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연주자가 예전의 연주회와 녹음 경력으로 그토록 높은 평판을 얻고 있는 경우에는 기대가 높기 때문이다. 호로비츠의 명성은 정말로 대단해서 매표 시작 이틀 전부터 표를 사려는 사람들이 카네기 홀 안에 있는 매표소에서부터 서쪽 57번가로 이어져 6번 도로 모퉁이로 내려가서 모퉁이를 돌아 다음 블록까지 줄을 서 있었다. 호로비츠는 사람들이 그렇게 늘어서서 표를 사려고 끈기 있게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그들이 무료로 커피와 도너츠를 먹을 수 있도록 이동 매점 트럭을 56번가로 보냈다!

 

호로비츠의 다음 연주회는 시카고 오케스트라 홀에서 열렸다. 그는 언제나 토요일에 리허설을 했고 그래서 콘서트는 늘 일요일이었다. 토요일 리허설을 마치고 난 후 그의 아내 완다(Wanda Toscanini)가 내게 말했다. “연주회를 위한 모든 준비가 완벽하군요. 나에게 표가 두 장 있는데 첫 번째 줄 박스석에 나와 함께 앉지 않겠습니까? 당신도 청중 속에서 연주회를 감상할 수 있게 말이에요.”

 

다른 모든 조율사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비상 사태에 대비해 항상 무대 뒤에 앉았다. 시카고에서의 그날 밤은 내가 호로비츠의 연주회를 따라 다니면서 유일하게 청중석에 앉은 날이 되었다. 호로비츠의 콘서트는 미국 내에서나 해외에서 상당한 기대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러한 흥분된 분위기 덕분에 그 장소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소간 예민한 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나는 피아노 때문에 긴장해 있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그 가운데 호로비츠 자신이 언제나 가장 긴장했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시카고에서의 그날 밤, 호로비츠는 첫 곡으로 하이든의 소나타를 연주했다. 그리고는 무대 뒤로 들어가더니 한참동안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이미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 나에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앉아 있는 박스 뒤 쪽 문이 열리더니 한 무대 담당자가 머리를 디밀고는 “피아노 조율사가 여기에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나는 일어나서 아래층으로 내려가 무대 뒤로 달려갔는데, 이러는 동안 시간이 꽤 걸렸다. 내가 무대 뒤에 도착했을 때 호로비츠는 이미 격분해 있었다. 그는 말했다. “프란츠, 내가 얼마나 많은 음을 잘못 쳤는지 알아? 누군가가 내 의자를 건드렸어. 의자가 너무 높아.”

 

“선생님, 어떻게 해 드릴까요?” 나는 대답했다.
“그래, 의자를 낮춰!” 그는 말했다. “낮추라니깐.””
“그런데 마에스트로, 얼마나 낮춰 드릴까요?”

 

그는 손가락으로 1/4인치 정도를 표시했다. 청중은 그가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검은 양복을 입은 내가 무대로 나가니 사람들을 웃고 손뼉을 쳤다. 나는 인사를 하고서 피아노 쪽으로 걸어가 내내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면서 의자를 대략 1/4인치 정도 낮추었다. 나는 무대 뒤로 돌아왔고 호로비츠는 걸어나가 연주회를 다시 계속했다. 그 이후로 나는 호로비츠 연주회에서는 절대 청중석에 앉지 않았다.

 

피아노 연주회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잘못되는 일이 별로 없는 게 보통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만일에 대비해 무대 뒤에 앉아 있을 필요가 있다. 내가 호로비츠 피아노를 조율한 이래로 단지 피아노 현이 두 번 끊어졌던 것이 전부다. 한 번은 카네기에서 독주회는 하는 동안 어떤 작품을 한참 연주하던 중에 그는 가온다 건반 밑의 A 플랫 건반의 현을 끊어뜨린 것이다. ‘탁’ 소리를 내며 줄이 튕겨 나왔다. 그는 계속하려 했지만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현이 다른 현들 위로 올라가 버렸기 때문에 현들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나는 무대 뒤에 있었고 바로 나가서 그 끊어진 현을 꺼냈다. 그래도 그 건반에는 현이 두 개가 더 남아 있어서 그대로 계속 연주할 수 있었다.

 

스타인웨이와 호로비츠

두 번째는 베를린에서였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 1986년 호로비츠는 대단히 성공적으로 베를린에서 연주를 했었다. 그 때가 2주 뒤 함부르크에서 연주회를 열기 전의 마지막 연주회였다. 그래서 나는 “2주간 집에 갔다가 함부르크로 돌아 와야겠군.” 라고 생각했었다. J.K.케네디로부터 선물 받은 내 서류가방을 들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전화가 온 그 순간은 아마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베를린에서 호로비츠의 매니저인 피터로부터의 전화였다.

 

그는 말했다. “프란츠. 즉시 돌아와야겠어. 왜냐하면 다음주 일요일에 또 다른 연주회가 잡혔거든... 아, 물론 자네가 수요일까지 온다면 더 좋지... 그런데 말야, 호로비츠가 방금 자넬 유명하게 만들었어. 그가 기자들에게 모든 건 프란츠가 오느냐 안 오느냐에 달렸으니 내 조율사가 오지 않으면 두 번째 콘서트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네.”

 

내 생각에도 그는 정말 나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가 기자들에게 한 말로 인해 독일 전지역에 방송될 베를린에서의 TV쇼에 내가 나가게 된 것이다. 나는 30분간 호로비츠와의 작업에 대한 인터뷰를 받았다.

 

그런데 바로 그 때 현이 끊어졌다. 이 두 번째 연주회에서는 피아노를 조율할 시간이 충분치 않았던 탓에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단지 무대 위에 놓인 피아노를 잠깐 손볼 수 있었을 뿐이었다. 호로비츠의 피아노는 언제나 조율이 잘 되어 있었고 그래서 나는 걱정할 것이 없었었다. 하지만 그날 밤 내가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을 때 저음부에 이르러서 전체 음들이 너무 높이 날카롭게 조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전체를 자세히 살펴보면서 한 번에 한 음씩 음고를 낮춰야 했는데, 이미 사람들은 입장하고 있었다.

 

그 당시 호로비츠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휴가를 내도록 조치를 취해 놨던 터라 무대 위에 그들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미 자리를 잡아 앉고 있었고 나는 마지막 E 플랫 현을 손보고 있던 순간, 거친 소리를 내면서 그 현이 끊어져 버린 것이었다! 오히려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들이 나보다 더 놀란 듯했다. 나는 항상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프란츠, 침착해. 너는 일생동안 닥쳐오는 문제를 늘 해결해냈지.” 그리고 그렇게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질 때마다 나는 늘 기도한다. “주여, 이 상황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그 날은 이렇게 생각했다. “상자(우리는 그 안에 피아노 현 세트가 들어 있는 큰 여행용 가방을 가지고 다녔다)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세트에서 새 현 하나를 빼오면 연주회 도중에 음이 변할 것이다.” 누구나 알겠지만, 새 현이 자리를 잡으려면 시간이 좀 걸리는 법이다.

 

그래서 “여기에 또 다른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있을 거야.” 라고 생각했다. 생각한 바대로 이 홀 소유의 두 대의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무대 뒤에 있었다. 나는 그중 한 대로 달려가 재빨리 E 플랫 현을 꺼내서 무대로 돌아와 그것을 끼워 넣었다. 전체 작업은 대략 10분 정도 걸렸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그 음악가들과 매니저, 홀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호로비츠에게 말하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연주회 전에는 음악가에게 피아노의 어떠한 문제에 대해서든 절대로 말하면 안 된다. 그들은 이미 생각할 게 너무 많아 머리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내가 잘 길들여진 다른 스타인웨이 피아노의 현으로 바꾸어 놓았기에 굳이 각 음들을 조율할 필요는 없었다. 혹시나 해서 중간의 휴식 시간에 무대로 올라가서 피아노를 점검해봤지만 다행히 아무 이상 없었다.

 

많은 사람은 나에게 호로비츠의 피아노에 관해 묻는다. 그의 피아노의 특별한 점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떠도는 이야기는 생각 외로 많다. 이에 대하여 내가 매우 정직하고 진실하게 그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한 이야기로 이에 대한 답변을 시작해 보겠다. 몇 년 전 어느 날 카네기 홀에서 국제 콘서트가 있었다. 그것은 호로비츠의 아이디어였다. 그는 비행기표, 호텔, 연주회 표를 팩키지 상품으로 판매하여 전 세계 사람들을 뉴욕에서 1주일 정도 머물도록 초청했다. 그 가운데에는 비행기 한 대를 다 채울 정도로 많은 일본 기술자 조합의 일본인 기술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120명 가량의 인원이었다.

연주회가 진행되는 동안 우리는 카네기 홀에 있었고 곧 휴식 시간이 되었다. 일본인 기술자들은 카메라를 들고 몰려와서는 사방에서 피아노 사진을 찍어댔다. 몇 명은 피아노 밑으로 들어가 밑 부분을 찍기도 하면서 모두가 그 피아노의 특별한 점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려고 야단법석들이었다.

 

자, 이제 내가 대답하겠다. 호로비츠 피아노에 특별한 점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특별히 다르게 조절한 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스타인웨이 피아노와 다르게 작동하는 것도 물론 없다. 호로비츠가 그 특별한 콘서트에서 사용한 이 피아노(일련 번호 CD 314 503)는 1940년대 초에 제작된 것으로 완다와 호로비츠의 결혼 선물로 스타인웨이 일가가 준 것이다. 호로비츠는 늘 이 피아노를 매우 아꼈다(나중에 자세히 설명을 하겠지만, 내가 그와 함께 일했던 동안 그는 다른 4대의 스타인웨이 피아노도 함께 사용했다). 그 피아노는 수 년 간 그의 집에 있었고 자신이 가는 콘서트 무대마다 갖고 다녔다. 약 12년쯤 전에 현도 몇 개 새것으로 갈아 끼우는 등, 나는 그 피아노에 새로운 작업을 했지만,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원래 상태 그대로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피아노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가 원하는 대로, 즉 자신의 피아노에서 그가 원하는 소리가 나도록 요구한 대로 조정되었다. 다른 사람도 반드시 그 소리를 좋아해야 할 필요는 없다. 호로비츠가 늘 자신의 피아노는 약간의 ‘콧소리’ 같은 것이 난다고 했는데, 그의 말은 실제로 맞는 말이다. 수많은 피아노로 연주를 했던 가운데 이 소리가 바로 그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이었다. 그의 피아노는 그가 선호하는 대로 조절되어 매우 민감한 반응을 나타낸다. 이것은 가벼운 터치에도 건반이 내려갈 정도로 손가락에 대한 저항력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반면 건반이 올라올 때의 힘은 매우 강하다. 나는 건반의 무게를 이런 식으로 균형을 잡아 호로비츠가 원하는 대로 건반이 작동할 수 있게 해 놓았다.

각각의 피아노도 다르지만 피아니스트들 역시 신체적으로나 그 외 다른 면으로나 각자 다르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아르투르 루빈스타인(Artur Rubinstein, 1887-1982)은 한 번도 호로비츠의 피아노로 연주한 적이 없다. 루빈스타인은 손가락에 대한 저항력이 훨씬 강한 피아노를 원했기 때문이다.

 

박제성2010-02-10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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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로비츠의 변화무쌍함

 

나는 호로비츠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그의 경력을 지켜 봐 온 사람들이라면 이미 알고 있듯이, 그는 자신의 성향(taste)을 바꾸었다. 모스코바 연주회에서 녹음한 것과 비교해서 세 번째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녹음을 들어본다면 이는 대단히 경이로운 변화임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성향을 바꾸자마자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스카를라티(Domenico Scarlatti, 1685-1757)를 연주한 적은 있었지만 모차르트를 연주한 적은 결코 없었다. 그러더니 이제는 모차르트에게 완전히 빠져 버렸다. 어느 날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프란츠. 나는 사람들이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의 피아노 소나타 32곡 전곡을 왜 연주하는지 모르겠어. 물론 베토벤은 위대한 작곡가고 몇몇 소나타들은 훌륭하기도 하지. 하지만 모든 소나타가 무대에서 연주할 만큼 좋은 것은 아니거든. 모차르트의 경우는 달라. 모차르트는 모든 음을 각기 정확한 위치에 옮겨 논 음악가지.”

 

호로비츠는 종종 심오한 말을 했고 그 가운데 많은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한 번은 밀라노에서 연주회를 열었던 적이 있었다. 기자회견이 있었고 한 20-30명쯤 되는 사람들이 그의 주위에 몰려 있었다. 한 신문 기자가 물었다. “마에스트로, 마에스트로의 생각에는 왜 많은 젊은 피아니스트들이 지휘를 하게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호로비츠는 곧바로 대답했다. “말해주지. 그야 지휘봉으로부터는 틀린 음이 나올 일이 없기 때문이지 않은가. 그래서들 지휘를 하는 게지.”

 

대다수의 젊은 피아니스트들이 지휘를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한 예로 머레이 페라이어(Murray Perahia, b.1947)는 당시 호로비츠 부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예술가였다. 몇 년 후 페라이어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지휘를 하게 되었다. 호로비츠는 많은 연주회에 참석하지 않았어도 페라이어의 연주회에는 빠지지 않고 갔었다. 페라이어가 피아노를 치면서 지휘를 한 그 연주회 날, 호로비츠 부부는 역시 청중석에 앉아 있었다. 휴식 시간에 나는 호로비츠 부부에게로 가서 인사를 했다. 호로비츠는 나를 한 쪽으로 부르더니 이렇게 말했다. “프란츠, 자네 머레이 페라이어에게 당장 가서 지휘는 하지 말고 피아노만 치라는 말을 꼭 해주게나.”

 

나는 대답했다. “마에스트로, 마에스트로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나중에 호로비츠는 정말로 그 말을 페라이어에게 했다! 후에 페라이어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프란츠, 호로비츠의 말이 옳다는 것은 당신도 알고 계시죠? 저에게는 피아노를 치는 것이 더 어울리지 않습니까?”

 

호로비츠가 사용한 피아노

내가 그와 함께 일한 25년 동안 호로비츠가 사용한 다섯 대의 피아노에 대해서 언급을 해둬야 할 것 같다. 내가 처음 그 일을 맡았을 때 그는 일련 번호 CD 186인 피아노를 사용하고 있었다(생산된 스타인웨이 피아노는 팔릴 때 기록에 뿐만 아니라 피아노 자체에도 번호가 매겨지기 때문에 모든 스타인웨이 피아노는 추적이 가능하다). 그는 이 피아노로 많은 녹음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은퇴 후 카네기 홀에서 처음으로 가진 재기 연주회에서도 바로 이 피아노를 사용했다.

 

물론 그는 CD 314 503 피아노도 가지고 있었다(연주회와 음악가 담당 부서에서 보내 온 피아노들은 알아보기 쉽게 일련 번호 뒤에 숫자가 3개 더 붙어있다). 바로 이 피아노가 스타인웨이사가 호로비츠 부부에게 결혼 선물로 준 것이다. 생애의 마지막 4년간의 연주회에서 그는 유달리 이 피아노만을 애용했다. 또 다른 그가 좋아했던 피아노는 일련번호가 CD 223인 피아노로서, 수년간 그는 이 피아노를 커넥티컷(Connecticut)주의 뉴 밀포드(New Milford)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사용했다. 그는 그 곳에서도 몇 번의 녹음을 했었다.

 

그 다음으로는 CD 75 피아노가 있다. 나는 이 피아노가 내 손에 처음으로 들어왔을 때를 잊을 수 없다. 당시 나는 이 피아노가 어디서 왔는지 도저히 알아 낼 수 없었다. 하나씩 점검하고 연주하고 조율을 하면서 어느 정도 연주 가능할 정도로 조절해 놓는 과정에서 나는 이 피아노가 사용된 적이 거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1911년에 제조된 이 피아노는 모든 부품이 원래 상태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나는 이 피아노로부터 ‘쉬필아르트(spielart)’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이 단어에 적합한 영어 단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독일어인 쉬필아르트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 넘어가야겠다. 쉬필아르트란 피아노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들이 조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액션이 연주가에게 느껴지는 방식, 혹은 액션이 연주가의 손에서 어떻게 작동되는가를 지칭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피아노가 연주되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피아니스트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 피아노의 쉬필아르트가 마음에 안 들어.” 이 말은 피아니스트가 피아노의 느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악기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다, 피아노의 액션에 불편함을 느낀다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나는 CD 75 모델에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이 피아노는 호로비츠가 좋아할 쉬필아르트와 음색을 지녔어”라고 혼잣말을 했다. 내가 그에게 전화를 걸자마자 그는 서쪽 56번가로 달려와서는 그만 그 피아노와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는 그 피아노를 많은 연주회에서 사용했고, 1983년 6월 그의 첫 번째 일본 연주 여행에 가지고 가기도 했다.

 

호로비츠는 94번가의 자신의 집에 살았던 마지막 4년 동안 CD 443을 갖고 있었다. 이 피아노로 그는 생애 마지막 녹음을 했다.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발매된 앨범인 ‘호로비츠 앳 홈’(Horowitz At Home, DG 427 772-2GH)과 다큐멘터리와 음반으로도 제작된 ‘라스트 로맨틱’(Last Romantic, DG 419 045-2GH), 소니 클래시컬에서 발매된 ‘라스트 레코딩(The Last Recording, SONY Classical SK45818)’ 등은 바로 이 피아노로 녹음한 것이다. 그의 피아노를 매번 그의 집에 들여오고 내가는 것은 항상 큰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 피아노를 호로비츠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다. 처음에 그는 거듭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새 피아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프란츠, 저 피아노를 치워버리라구. 난 새 것을 다룰 수 없어. 난 새 피아노를 원하지 않는단 말이야.”

 

나는 거듭 그에게 말했다. “마에스트로, 음색이 벌써 처음에 나왔던 것보다 좋아지지 않았습니까? 선생이 사용하시면서 이제 악기가 서서히 길이 들고 있는 겁니다. 스스로도 자랑스러워하시겠지만, 선생은 이미 새 피아노와 시작한 겁니다. 손가락에도 무리가 가지 않을 것은 물론이겠죠. 연주회에서 사용했던 피아노보다야 좀 무겁게 느껴지겠지만 제가 매달 와서 손봐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했다. 결국 호로비츠는 그 피아노를 너무나 아끼게 된 나머지 세상을 떠나기 몇 주전에 나에게 이런 말까지 한 적이 있다. “프란츠, 자넨 이제 내가 연주 여행에 꼭 이 피아노를 가져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지? 아마도 이게 다른 내 피아노들보다 훨씬 더 훌륭한 것 같아.”

 

호로비츠가 천재라는 데 나는 이론을 갖지 않았다. 특정 작곡가의 작품을 연주하는 것에 대해서라면 다른 음악가들도 호로비츠만큼 훌륭할 지 모른다. 예를 들어 나는 그가 베토벤의 음악을 잘 해석해 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그는 베토벤을 그다지 많이 연주했던 것 같지도 않다. 내가 기억하기로 그와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가 베토벤의 소나타 한 곡을 연주한 것이 전부다.

천재로서의 호로비츠

 

호로비츠의 천재성은 다름 아닌 건반을 다루는 그의 탁월한 능력 덕분이다. 그가 프레이즈를 처리할 때면 휘황찬란한 음색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나는 거의 들리지도 않을 듯한 최약음부터 최강음까지의 폭 넓은 음역을 가진 다른 연주가를 호로비츠 외에는 알지 못한다.

 

그가 자주 연주했던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의 ‘콘솔레이션(Consolation)’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그것은 한 마디로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그는 작품의 분위기와 프레이징을 매우 작은 단위(split second)로 끊어 변화시킬 수 있었고, 각 작품을 항상 다르게 연주했으며, 그의 연주나 시간 조절에는 지루한 순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만들어 낸 프레이징은 너무도 경이로워서 작품의 움직임과 그 흐름을 순간적으로나마 놓치는 법이 없었다. 음악이 계속 진행되기 바로 전의 휴지부의 길이를 연장시키는 그의 휴지부 처리방식은 매우 독특했다. 한마디로 그의 시간 조절은 완벽했다.

 

호로비츠가 젊었을 때 한 시즌 내에 70회 이상의 연주회를 열었고 그 기간 중 280개의 작품을 연주했으며 한 곡을 한 번 이상 연주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연습을 거의 하지 않고서도 그는 그토록 많은 것을 해낼 수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식사 전에 이미 두어 시간을 연습하는 연주가들이나 공연 직전까지 연습하는, 내가 함께 일해 보았던 다른 연주가들에 비하면 그는 거의 연습을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무엇보다도 그는 공연 당일에는 절대 연습하지 않는다. 다만 공연 전날 저녁에 연습을 짧게 끝내고는 했다.

 

한 번은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공연하기로 되어 있었다. 호로비츠는 일요일 연주회 전에는 일찍 잠자리에 들곤 했다. 그런데 그 토요일 저녁만큼은 낮에 몇 시간 연습한 후 우리 모두는 길이가 긴 메르세데스 리무진을 타고 밖으로 나가 저녁 내내 훌륭한 프랑스 식당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 날 저녁은 우리 모두에게 즐거운 시간이었다. 자정이 지나서 다시 리무진을 타고 호텔로 돌아가고 있던 중 완다가 조용하고도 유쾌한 어투로 그에게 말했다. “여보, 내일이 연주회죠? 이미 시간도 너무 늦었으니 호텔에 도착하는 대로 일찍 주무시지 그래요. 그래야 푹 쉴 수 있죠. 그리고 당신이 빌려 그 놓은 비디오 두 편은 보지 마세요(호로비츠는 연주 여행으로 어딘가에 갈 때마다 비디오를 잔뜩 빌려다가 매일 밤 두 편씩 보곤 했다).”

 

완다가 이렇게 말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꾸했다.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마. 나는 어린애가 아니라구. 내가 뭘 해야할지 알고 있단 말야. 오늘밤에 비디오 두 편은 꼭 보고 잘꺼야.” 그는 완전히 미쳐 버렸다. 그가 한 말을 전부 옮길 순 없지만 여하튼 그는 발작을 일으켰던 것이다.

 

호텔에 다다르자 호로비츠 부인은 쏜 살같이 차에서 내리더니 호텔로 달려가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그 동안 호로비츠는 매우 침착하게 있었다. 뒤돌아서 나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프란츠, 샹젤리제로 산책이나 좀 해 볼까? 거기는 공기가 아주 좋아. 우리 조금만 걷다가 들어가세.” 그래서 우리는 산보를 한 후 곧 호텔로 돌아왔고 호로비츠는 결국 그 비디오 두 편을 기어이 보고야 말았다. 당시 그는 서부 영화에 푹 빠져 있었다.

 

다음 날 연주가 시작되었다. 연주회는 매우 성공적이었고 청중으로부터 기립박수도 받았다. 호로비츠의 연주회는 언제나 엄청난 성공과 자발적인 박수 갈채가 뒤따른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호로비츠는 모든 일에 있어서 자신이 하던 대로만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항상 토요일 오후 4시 30분에 리허설을 했고 연주회는 일요일에 열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항상 그의 피아노를 연주회장에 준비시킬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물론 호로비츠가 연습을 해야 한다고 나의 준비시간을 빼앗는 일은 없었다. 이런 면에서라면 그는 매우 게으른 편이었다! 여러 해 동안 나와 나의 아내 엘리자베스는 그의 생일인 10월 1일만 되면 항상 생일 파티에 초대받았다. 2년 전 그의 생일 파티는 리버사이드 드라이브(Riverside Drive)가에 그의 매니저 피터 겔브(Peter Gelb)의 집에서 열렸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호로비츠는 소파에 앉아 있었고, 그 파티는 준정장 파티(black tie affair)여서 거기에 참석했던 모두가 정장을 하고 있었다(평소처럼 짙은 색의 헐거운 스웨터에 운동화를 신고 어깨에 타올을 걸친 제임스 레바인(James Levine, b.1943)을 제외하고).

 

우리가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호로비츠는 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가리키며 모두가 듣도록 크게 고함을 질러댔다. “자네 얼굴도 보기가 싫군! 자네는 일 생각이 나게 한단 말야! 난 일이 싫어!”

 

그의 말은 절대적으로 사실이었다. 나는 12시, 때때로 12시 반 이전에는 그의 피아노를 조율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때까지 그는 침대에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씩 그는 위층으로부터 내려와서 내가 조율하는 것을 보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내가 일을 다 마쳤을 때 내려오기도 했다. 그 후에야 비로소 그는 아침식사를 하는 것이다. 나는 그가 식사 후 몇 시간 정도 연습하고 그리고는 아마도 밤늦게 한 두 시간 더 연습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작 그 정도가 그가 연습하는 것 전부였다.

 

모스크바로 떠나기 일 주일 전 어느 날 그가 아래층으로 내려왔고, 주위에는 그의 매니저, 스타인웨이사에서 온 리차드 프롭스트, 완다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와있었다. 내가 막 조율을 끝냈을 무렵이었다(그는 언제나 정장을 하고 내려왔고 그래서 나는 “어디 가시려구요?”하고 묻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는 “아무 데도 안 가네.”라고 대답하곤 했다).

 

내가 막 피아노 조율을 마쳤을 때, 이번에는 완다가 그에게 넌지시 말했다. “이번 프로그램에 넣은 스크리아빈(Alexander Nikolayevich Scriabin, 1872-1915)의 C샤프 단조 Op.2-1는 요즘 연습을 전혀 안 하시더군요. 나는 당신이 그 곡 연습하시는 모습을 한 번도 못 봤는데.”

 

이 말은 또 다시 그를 미쳐버리게 만들었다. “나는 그 작품을 잘 알아! 내가 그것을 이러이러한 무대에서 이러이러한 날에 연주했어(그는 몇 년 전 그 때를 일일이 기억해 내면서 말했다). 모두 자리에 앉으란 말이야!” 그래서 우리 모두는 황급히 앉을 곳을 찾았다. 그리고서 그는 의자에 앉자마자 그 작품을 너무도 아름답게 연주하기 시작했다. 우리 모두는 감동을 받았고 그의 음악에 완전히 압도되어 버렸다.

 

그는 연주를 마치더니 종종 짓고는 하던 바로 그 미소를 떠올렸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그리고는 소리를 냅다 내질렀다. “내가 말하지 않았어? 나는 이 작품을 안다구! 안단 말이야!”


심지어 완다까지도 감동을 받았다. “정말 아름다웠어요. 정말이에요.”
물론 많은 사람들도 알고 있겠지만 86년 모스크바 연주회에서 녹음된 이 곡의 연주는 충격적이고도 경이로웠다.

 

또 한 번은 내가 스타인웨이 홀에서 일하던 중에 그에게 전화를 건 적이 있었다. 나는 아무도 건반을 칠 수 없도록 잠겨져 있던 호로비츠 피아노를 손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마에스트로, 이 피아노를 조금 쳐보시면 어떨까요? 가끔 이곳에 들러서 연습해 보시지 않으시겠어요?”

 

“연습! 연습! 자네 지금 뭐라 했나, 프란츠? 대체 자네 나와 몇 년 정도 같이 일해 왔나?”
“예, 마에스트로. 아마 6-7년쯤 될 겁니다만.”
“그런데도 내가 연습 절대 하지 않는거 몰라? 그건 연습이 아냐. 항상 리허설이지!”

 

 

박제성2010-05-21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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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로비츠가 연습에 대한 열정이 없는 것은 오히려 나에게는 다행한 일이었다. 그는 일요일에만 연주하고 토요일에 리허설을 했기 때문에 내가 작업할 시간은 언제나 넉넉했다. 관광할 시간도 많았고, 연주회에 가거나 친구를 방문하거나 교회에서 연설을 하거나 하는, 다른 일을 할 시간이 충분했다.

 

호로비츠가 처음으로 연주회를 위해 일본을 방문한 것은 1983년이었다. 이 당시 우리는 정확한 쉬필아르트를 갖고 있다고 위에 기술했던 1911년산 일련번호 CD 75 피아노를 갖고 갔다. 일본 오쿠라(Okura) 호텔에 들어가자마자 누군가가 내 방에 노크를 해서 문을 열어 보니 이 멋진 호텔의 매니저가 서 있었다. 그는 말했다. “모어씨, 당신이 짐을 푸는데 방해가 되고 싶지는 않지만, 당신이 우리 호텔에 오신 것이 무한한 영광이라는 말을 먼저 전하고 싶군요. 저희는 당신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신에 대한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부디 내려오셔서 우리 호텔 무도회장에 있는 105년 된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좀 살펴주시고 감정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저희가 이미 그 피아노에 약간의 손질을 했습니다. 아,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씨가 이 피아노로 직접 연주까지 해 주신다면 더 이상의 영광은 없겠습니다.”

 

처음에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혼자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 호로비츠가 그 피아노를 쳐본다면... 우리는 결코 그를 어디로든 가게 하지 않을꺼야.”

 

여하튼 나는 항상 우리 스타인웨이 악기를 궁금해했다. 그래서 나는 장비를 챙겨서 그들과 함께 피아노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것은 9피트 짜리 스타인웨이 피아노였다. 그들이 말하길 전에 이 피아노는 카네기 홀에 있었다고 한다. 나는 사실인지 추적해 보기 위해 일련번호를 적어 두었다. 일본 기술자들과 피아노 기능공들이 놀랍고도 훌륭한 솜씨로 이 피아노를 재생시켜 놓았다.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아름답고 세련된 피아노라는 것이 사실이었다. 새것도 이만큼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너무나 흥분해서 이 사실을 호로비츠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믿지 못할 겁니다! 바로 이 호텔에 105년 전에 ‘자단(紫檀)’으로 만든 피아노가 있습니다! 한 마디로 환상 그 자체입니다!”라고 나는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우리가 모두 저녁을 먹으면서 쉬고 있을 때, 나는 다시 한번 호로비츠에게 그 피아노 이야기를 꺼냈다. 피아노가 있는 무도회장은 바로 식당 옆에 위치하고 있던 터라 우리는 이를 구경하러 다 함께 갔다. 호로비츠가 앉아서 연주해 보더니 느닷없이 환호를 질렀다. “이거 정말 아름다운걸? 정말 아름다워! 내가 왜 피아노를 가져왔던가? 내 연주회에서 이 피아노로 연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비엔나 왈츠를 연주하면서 유쾌한 듯 외쳤다. “댄스, 댄스, 댄스!” 그 날은 무척이나 특별한 밤이 되었다. 이러한 수제 피아노는 제대로만 손질을 한다면 영원히 남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대량 생산된 피아노로부터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불행히도 1983년 6월의 일본 연주 여행은 한마디로 악몽이었다. 호로비츠는 건강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고, 잠을 잘 수 없었던 탓에 약을 너무 많이 먹었다. 우리가 보스턴, 시카고, 클리블랜드 등지에서 연주회를 연 후, 일본으로 출발하기 바로 전부터 그에게 신체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우리와 줄곧 같이 여행한 젊은 의사가 있었다. 호로비츠는 휴식시간을 연장해야 했고, 중간 휴식시간이 35-40분까지도 연장되었으며, 그 사이에 의사가 그를 진찰하기도 했다. 나는 그 젊은 의사를 신뢰하지 않았던 터라 그의 이름도 잘 기억할 수 없지만, 여하튼 그는 호로비츠에게 마취약을 너무 많이 주사해서 자신의 손가락조차 움직일 수 없었던 탓에, 일본 연주회는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끔찍한 실패로 끝났다.

그는 자신이 연주를 잘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연주회가 끝나고 말도 거의 할 수 없을 정도로 기진맥진한 채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아버린 그는 “나는 알아... 수 많은 미스 터치... 그토록 많은 음을 틀리다니...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라고 말했다.

 

그 동안 완다는 내 어깨에 기대어 울고 있었다. 그녀는 말했다. “프란츠, 프란츠, 오늘이 바로 그이의 장례식이야. 아마도 더 이상은 그의 연주를 들을 수 없을지도 몰라. 그는 처참했어. 너무도...”

 

우리는 두 번 다시 그의 연주를 듣지 못한다는 말이 사실이면 어쩌나 하고 불안해 했다. 그 후 호로비츠는 3개월을 집에서 조용히 보냈다. 나는 그 3개월간 매달 조율하러 그의 집에 갔어도 그를 전혀 만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옛날처럼 정장을 하고서 내려왔다. 그가 처음으로 나에게 한 말은 “프란츠, 자네한테 다짐하는데, 난 이제 약이라는 건 일절 입에 대지도 않겠어. 더 이상 내 몸이 쓰레기통이 되도록 방치하진 않겠어. 이제는 수면제도 안 먹을꺼야. 자네 알고 있나? 나는 다시 연주를 할걸세. 그래서 이 세상에 내가 아직도 연주를 할 수 있다는 걸 반드시 보여주겠어.”

 

그리고 그는 되돌아 왔다. 이후의 모든 연주회와 여행은 한결같이 대 성공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연주 중 하나는 1986년 4월 20일 러시아에서의 연주회다. 나는 모스크바 연주회를 위한 토요일 리허설을 결코 잊지 못한다. 호로비츠는 음악 학교 학생들이 일요일 연주회 표를 구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아 그들 모두를 리허설에 참석할 수 있도록 초대했다. 그리고는 그 학생들을 위해 실제로 연주회를 한 것이다. 내가 직접 비디오 카메라로 녹화한 테이프를 보면 알겠지만, 실로 많은 학생들이 그의 연주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호로비츠의 최후

 

호로비츠가 마지막 녹음을 한 것은 1989년 11월 1일 수요일이었다. 우리 모두 그의 집에 있었고 그는 매우 잘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집에서 하기로 한 녹음 계획은 이러했다. 그가 피아노 앞에 앉아 있고 그의 옆에는 악보를 넘겨줄 모르데카이 쉐호리(Mordecai Shehori)가 있었다. 그는 호로비츠 부부의 좋은 친구이자 나의 좋은 친구이기도 한 이스라엘 출신의 훌륭한 피아니스트이다. 나는 내가 늘 앉던 큰 소파 구석에 앉아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호로비츠의 연주를 열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프로듀서인 토마스 프로스트(Thomas Frost)와 밸런스 엔지니어인 톰 라자루스(Tom Lazarus)가 다른 방에서 녹음 작업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호로비츠가 값비싼 손목 시계를 사기 1주일 전이었을 것이다. 그 날 호로비츠는 그것을 차고 있었다. 그는 그 시계를 매우 자랑스러워하면서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이것 좀 봐. 이것 좀 보라구! 무려 만 달러 짜리야.” 라고 말하며 그는 자랑을 했다. 때때로 그는 이렇게 어린아이 같았다. 아, 정말로 그 새로 산 시계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든지…

 

그는 쇼팽의 연습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마지막 부분의 아르페지오의 최고음까지 연주하다가 마지막 코드 바로 직전에 갑자기 멈추고(내가 말했던 대로 그의 타이밍은 언제나 완벽했다)... 손목에 찬 시계를 나에게 보여주면서--그는 그 손목 시계를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했다--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그는 타이밍을 맞춰 남은 마지막 코드를 완벽하게 처리했다. 내가 늘 말했던 것처럼 그의 타이밍은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했다.

 

그러나 그도 자신의 죽음에 대한 타이밍에 대해서는, 비록 그가 당시 건강 상태가 매우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지난 몇 년간 그는 자신의 몸을 매우 세심하게 돌보았다. 잠도 많이 잤고 매일 걸으며 운동도 했고 먹는 것에도 상당히 신중했다. 사실 일생동안 그가 먹었던 유일한 육류라고는 생선이나 닭고기가 전부였다. 러시아에 갔을 때도 그는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도버 해엽 특산품인 혀가자미를 매일 비행기로 실어 나르게 했었다. 죽기 몇 년 전에는 담배도 완전히 끊었고 술조차도 거의 마시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까지 자신의 건강에 신경을 썼지만, 그래도 죽음을 통제할 수는 없었다.

 

일요일에 머레이 페라이아가 호로비츠 부부와 함께 밖에 나가서 저녁식사를 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그래서 페라이어는 일요일 오후에 호로비츠의 집으로 했다. 완다와 호로비츠는 소파에 앉아 어디로 갈지, 무얼 먹을지, 요리사에게 무얼 주문할지를 생각하면서 이를 완다가 메모지에 적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자주 갔던, 잘 알려진 식당에 가려고 생각했다. 완다가 한참 메모를 하던 중 머레이 페라이아가 한 시간쯤 후에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저녁식사 메뉴를 비로소 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호로비츠가 뒤로 기대면서 머리를 소파 뒤로 젖히더니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완다가 내게 말했다. “나는 그가 죽었다는 걸 알았다오. 우리는 911 구급대를 불렀고, 몇 분 지나니까 그들이 도착했더군요. 소파에 그렇게 있던 그에게 한 시간 내내 갖은 것들을 다 해보더군요. 그렇지만 나는 그들이 남편을 살려내지 못 할 거라는 걸 알았답니다. 나는 그가 이미 죽었다는 걸 안 것이지요.”

 

그 때가 일요일이었고 나와 엘리자베스, 엘렌, 게리는 교회에 있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 자동 응답기에 메시지가 있었다. 메시지를 들어보니 호로비츠의 개인 조수인 줄리아와 그의 아내 완다가 집에서 연락한 것이었다. “전화해 주세요, 프란츠. 여기 호로비츠 집으로요. 비상입니다.” 나는 무슨 일이 생겼고, 그것도 매우 심각한 일임을 알았다. “호로비츠에게 무슨 일이 생겼구나” 라고 나는 생각했다. 전화해 보니 완다가 받았다. 그녀는 내 목소리를 듣자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호로비츠가 죽었어요. 호로비츠가 죽었다고요.” 그의 갑작스런 죽음에 나는 너무도 놀랐다. 많은 사람들은 고통 없이 그렇게 죽는 것이 진정한 축복이라고 한다.

 

에필로그

 

유명한 지휘자인 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 1867-1957)의 딸인 완다 부인에 대해서 아주 많은 이야기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그녀를 호로비츠에 대한 사랑도 이해심도 없는, 상대를 지치게 하고 감히 상대하기도 힘든 그러한 사람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그렇지가 않다. 엘리자베스와 나는 완다 부인의 그 곧은 성격을 좋아한다. 내 생각에 그녀는 호로비츠를 위한 최고의 비평가였다. 그녀가 연주회에 갈 수 없을 경우, 그녀 없는 호로비츠는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보였다. 호로비츠는 심지어 피아노를 어디에 둘 것인가 같은 문제까지도 그녀의 정직하고 현명한 판단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소리가 얼마나 멋있는가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가는 그에게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를 안심시켜 줄 완다가 없으면 그는 정말로 뭔가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카네기 홀에서 리허설을 하던 중 한 번은 호로비츠가 무대에 앉아 있었고 몇 명이 청중석에 앉아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그의 친구들과 물론 완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날 호로비츠는 극도로 긴장해 있던 터라 나는 그가 제대로 연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연주 중 한 지점에서 멈추더니 그는 피아노 의자에서 청중석을 내려다보며 고함쳤다. “완다, 완다. 어떻게 들리나?” 그러나 완다는 계속 주위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그가 부르는 것에 전혀 주위를 집중하지 않았다. 마침내 호로비츠는 돌아서서 혼잣말을 했다. “오늘 완다가 내게 말을 하려고 하지 않는 것 같군. 나도 알아, 나도 알아. 아주 좋지 않다는 거.” 그리고는 계속해서 연주했다.

 

이것은 정확히 이렇게 된 것이다. 완다가 그의 연주에 만족하지 못했고, 호로비츠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 그러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호로비츠가 죽기 몇 주전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프란츠, 알고 있나? 내가 아래층에 내려가서 피아노를 치기 전에 항상 뉴욕 타임즈를 읽는다네.” 여러 해 동안 줄리아나가 호로비츠가 좋아하는 순서로 읽기 좋게 소파에 뉴욕 타임즈의 각 섹션을 항상 펼쳐놓았다. 호로비츠가 말했다. “프란츠, 나는 맨 먼저 뉴욕 타임즈의 첫 페이지를 읽곤 했었다네. 그런데 이제 그 습관이 없어져 버렸어. 내가 요즘에는 무엇을 제일 먼저 읽는 지 아나? 부고란을 펴서 그걸 제일 먼저 읽지. 그리고는 어떤지 아나? 내 이름이 거기 없는 걸 알고는 매우 기뻐한다네. 아주 행복하다구!”

 

그는 바로 몇 주 후에 자신의 사망 소식이 타임즈 1면에 실릴 거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힘과 섬세함을 갖춘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죽다. 향년 86세.” 그렇다. 그의 기사는 1면에 실렸다. 그리고 그 안쪽 페이지 전체에는 그의 화려했던 순간들에 대한 사진과 역사가 계속해서 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