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할 때 쓰이는 악보는 각 연주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선택한다. '악보가 다 똑같지' 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전문 연주자들은 악보의 음 하나하나에도 해석의 고민을 하므로 만약 오류가 있거나 자칫 뭐라도 하나 빠져있으면 큰 문제가 된다. 작곡가의 악보를 출판하는 출판사가 바뀌거나 망했을 경우, 그리고 처음 인쇄 과정에서 약간의 문제라도 있을 시에는 처음 작곡가가 쓴 의도가 잘못 전해질 수 있다. 특히 연주가나 전문가들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내놓은 새로운 판본들이 많아 오리지널리티가 많이 감쇄되어 있는 게 사실이다. 또한 세월이 많이 흐르므로 해서 조금씩 바뀌어 가는 것이 큰 문제인데, 현재 발간되고 있는 악보가 과연 작곡가가 처음 쓴 악보인지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많다. 그래서 정격 연주, 원전 연주라 하는 것이 새로운 조류로 떠올랐으며 지금은 하나의 장르처럼 되어 버렸다. 특히나 작곡가가 끝까지 완성하지 못한 작품일 경우 그 논란의 심각성은 더하다. 대표적인 것이 모차르트의 레퀴엠이다. 모차르트가 반밖에 쓰지 못했기 때문에 나머지에 대한 논란이 항상 문제의 핵심이 된다. 모차르트는 ‘Lacrimosa’를 다듬다 세상을 떴고, 이에 제자인 아이블러가 나머지를 떠맡게 되었다. 하지만 계약날이 다가와도 작업이 지지부진하자 모차르트의 부인인 콘스탄체가 모차르트의 다른 제자인 쥐스마이어에게 일을 넘겼고, 그로 인해 오늘날 가장 널리 연주되며 또한 논란의 핵심인 쥐스마이어판 레퀴엠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 후 20세기에 들어와서 여러 음악학자들이 여기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쥐스마이어판은 모차르트의 개성과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후 바이어, 랜든, 레빈, 드루스, 몬더 등의 음악학자들이 자신의 생각대로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손보기 시작했고, 모차르트의 손길이 멈춰진 라크리모사부터 제각각이 됐다. 60, 70년대의 거장들, 뵘이나 카라얀 등은 쥐스마이판을 정석으로 생각했고, 그 뒤 원전 연주가 등장하면서 쥐스마이어판은 슬슬 푸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원전 지휘자 중 존 엘리엇 가디너만이 쥐스마이어를 택했을 뿐이다. 한때 각광받았던 필립 헤레베헤도 쥐스마이어판을 당시 모차르트를 실제 알고 있던 지인이 썼다는 정통성을 들어 쥐스마이어판으로 녹음을 했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그동안 이루어진 음악적 성과를 무시할 수는 없다. 어찌되었건 작곡가 자신이 직접 쓰지 못했기 때문에 정통성 문제는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며 문제는 이를 듣는 감상자에게 달려있을 뿐이다. 그럼 각 판본을 사용한 녹음들은 어떤 것이 있나 알아보자. - 바이어판 : 쥐스마이어의 작업을 대부분 인정하였으며 관현악의 색채를 화려하게 하고 모차르트의 고유 색깔을 짙게 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대표적으로 아르농쿠르 / 빈 콘첸투스 무지쿠스(Teldec), 그리고 레너드 번스타인 /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DG)의 음반이 있다. - 랜든판 : 모차르트 사후 처음 작업을 맡았던 아이블러의 악보를 크게 참조했다. Dies irae의 트럼펫 부분은 쥐스마이어판과 큰 차이를 보인다. 브루노 바일 / 타펠무지크(Sony)와 로이 굿맨 / 하노버 밴드(Nimbus)의 음반이 있다. - 레빈판 : Sanctus에 이어지는 푸가가 길고 화려하며, Lacrimosa는 약간만 손질해 새로 쓴 아멘 푸가에 연결시켰다. 헬무트 릴링 / 바흐-콜레기움 스튜트가르트(Hanssler)와 마틴 펄만 / 보스턴 바로크(Telarc)의 음반이 있다. - 드루스판 : 기본적으로 레빈판과 비슷하지만 목관의 색채에 주의를 기울였고 특히 Lacrimosa는 완전히 개작됐다. 로저 노링턴 / 런던 클래시컬 플레이어즈(EMI)의 음반이 있다. - 몬더판 : 쥐스마이어의 작업을 완전히 부정해 Sanctus, Benedictus 등을 몽땅 생략했다. 그러나 Agnus deis는 모차르트의 작품으로 인정했다. 크리스토퍼 호그우드 / 고음악 아카데미(L'oiseau lyre)의 음반이 있다.
'음악, 음악가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위대한 음악가들 - 조율사가 바라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2) | 2024.03.01 |
---|---|
헨리 푸젤리: 티타니아, 보텀, 요정들 (1) | 2024.03.01 |
단정하고 솔직한 재즈를 보여준 레이블 캔디드 (0) | 2024.02.29 |
피아노 소품집 - The Maiden's Prayer (0) | 2024.02.29 |
구스타브 클림트: 피아노 앞의 슈베르트 (0) | 2024.02.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