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정하고 솔직한 재즈를 보여준 레이블 캔디드
재즈 평론이란 일을 하고 있으면서 가끔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다. “한 번 재즈 뮤지션의 레코딩에 참여해보고 싶다.” 내지는 “좋은 신인들이 있으면 백 업을 해보고 싶다” 등등 거의 몽상에 가까운 생각을 하는 것이다그런데 미국이나 유럽을 보면 재즈가 좋아서 컬렉션을 하다가 참지 못하고 레코드사를 차리거나 아니면 프로듀서로 인생 항로를 결정하는 사람이 꽤 된다.
하긴 블루 노트의 알프레드 라이언이나 버브의 노먼 그랜츠 등이 대표적인 컬렉터 출신이다. 프로듀서만 해도 크리드 테일러며 밥 실 등 어릴 적부터 재즈가 좋아서 결국 이런 길에 들어선 사람들이 꽤 된다. 이번에 소개할 캔디드(Candid) 레이블 역시 냇 헨토프라는 사람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작가이면서 재즈 평론가였던 냇은 나중에 다운 비트의 편집장에 오를 만큼 재즈에 박식한 사람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블루스며 클래식 등 20세기의 음악 장르 전반에 걸쳐 놀라운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의 온후하고 돈독한 인간성은 주변에 많은 뮤지션들을 달고 다니게 했다. 특히 찰스 밍거스와의 깊은 우정은 되새겨볼 만하다.
처음 두 사람이 만난 것은 1950년대 말 “루스트”(Roost) 레이블에서 밍거스가 녹음할 때였다. 당시 냇이 프로듀서였으므로 자연스럽게 둘 사이에 교류가 이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그를 주목했는지, 보스턴의 라디오 쇼에서 주선한 밍거스의 인터뷰를 담당한 사람도 냇이었고 카페 보헤미아에서 벌인 밍거스의 재즈 웍숍 멤버들과의 공연 평을 다운 비트에 할애한 사람도 냇이었다. 당시로서는 새로운 재즈를 표방했던 밍거스에게 일종의 대변인 노릇을 한 셈이다. 어쨌든 50년대 말 밍거스가 낸 중요한 다섯장의 앨범에 들어간 라이너 노트는 모두 냇의 몫이었다. 그중 한 장은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에서 발매되었는데, 그때의 프로듀서 또한 바로 냇이었다.
두 사람의 연관이 이렇게 공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밍거스가 병에 걸려 신음할 때 그가 입원한 벨레브 병원을 찾은 것도 냇이었으며 그덕분에 그는 조기 퇴원할 수 있었다. 이런 사이였던 만큼 1960년 아치 블레이어에게 캔디드 레코드사의 사장직을 제의받았을 때 냇은 지체없이 밍거스를 불렀던 것이다.
이렇게 재즈 평론가가 관여했던 레이블이어서 그런지 필자는 <캔디드>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아티스트의 편에 서서 그들이 최선을 다하게끔 유도한 냇의 전략이 주효한 것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재즈를 집에서 레코드로 감상할 때의 즐거움이나 기쁨을 염두에 둔 프로듀싱이 무엇보다도 돋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캔디드의 레퍼토리는 저 유명한 루디 밴 겔더의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지 않았다. 오히려 무명에 가까운 밥 드올리언즈가 엔지니어로 있는 뉴욕 57번가에 위치한 놀라의 펜트하우스 스튜디오에서 행해졌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쌉쌀하고 파워감 넘치는 밴 겔더의 사운드와는 달리 냇의 녹음은 조촐하면서 담백한 매력을 보여주고 있다.
당초 캔디드라는 이름이 보여주듯 레이블의 성격도 거짓 없는 솔직한 재즈를 표방하고 있다. 따라서 상업성을 고려해 지나치게 아티스트를 간섭하거나 프로듀서의 아이템 일변도로 음반을 제작하지 않았다. 냇은 그 특유의 로우 키(low key) 전략으로 아티스트가 평소 해보고 싶었던 음악을 마치 그들이 자주 연주하는 클럽에 있는 것처럼 연주하도록 배려를 다했던 것이다. 그 결과 찰스 밍거스의 ‘프레젠트 찰스 밍거스'라던가 세실 테일러의 ‘세실 테일러의 세계'와 같은 걸작이 탄생될 수 있었다.
캔디드를 이야기하려면 그 모체인 케이던스(Cadence)를 빼놓을 수 없다. 1945년 보스턴에 레코드점을 개업한 샘 클락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재즈를 좋아해 재즈 전문 레코드점을 시작한 그는 5년 후 전국에 체인망을 건설할 정도로 사업수완이 좋았다. 이 체인망 이름이 바로 케이던스였던 것이다. 한편 이런 그의 능력이 인정되어 ABC 레코드사 산하의 파라마운트에 사장으로 취임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펑키 재즈 붐이 일어났기에 여기서도 많은 실적을 올리게 되었다.
이쯤 되자 욕심이 생긴 그는 1961년 하드 밥 재즈 전문이랄 수 있는 임펄스(Impulse) 레이블을 만들어 크리드 테일러로 하여금 운영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가 얼마 후에 버브(Verve) 레이블로 이적했기에 후임으로 밥 실을 기용했다. 어쨌든 이 레이블은 존 콜트레인, 길 에반스 등을 영입해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한편 이 때까지도 샘 클락의 모체인 케이던스는 살아있었다. 욕심이 생기자 그곳의 사장으로 있던 아치 블레이어에게 그 산하에 재즈 레이블을 만들어보라는 주문을 했다. 이 때가 1960년. 그래서 아치는 재즈를 잘 아는 프로듀서를 물색하던 중 냇 헨토프를 선택한 것이다.
어쨌든 냇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캔디드를 역사적인 레이블로 남도록 많은 일을 벌였다. 뉴욕의 웨스트 57번가에 있는 빌딩에 조그마한 사무실을 차린 후 평소 자신이 잘 알던 아티스트를 초빙해 제작에 착수했던 것이다. 캔디드의 첫 작품은 오티스 스팬의 1960년 8월 23일자 녹음이다. 이듬해 4월 4일 부커 리틀의 녹음을 끝으로 캔디드가 붕괴되었으므로 약 8개월간의 활동인 셈이다.
캔디드의 붕괴는 그 모체인 <케이던스>의 파산하고 직접 관련이 있었다. 만일 그 모체가 메이저 레코드사였다면 캔디드의 신화는 좀 더 지속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 덕분에 찰스 밍거스, 세실 테일러, 부커 리틀 등 야심에 가득한 재즈 뮤지션들이 활개를 펼 수 있는 장이 한 순간에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비극의 한 장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짧지만 많은 일이 벌어졌다. 맥스 로치의 프로테스트 앨범인 ‘위 인시스트'라던가 애비 링컨의 절규가 담긴 녹음도 주목할 만하고 그 외 콜맨 호킨스-피 위 러셀의 아름다운 하모니, 벅 클레이튼의 올 스타 세션, 신진으로 발돋움하던 자키 비어드-레이 크로포드-리차드 윌리엄스-돈 엘리스-스티브 레이시-도시코 아키요시 등의 리스트, 부커 리틀과 부커 어빈의 정평 있는 녹음 등 그 어느 한 장 버릴 것 없는 앨범 투성이다. 거기에 오티스 스팬과 멤피스 슬림의 블루스 음반을 첨가한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컬렉션이 아닐까 싶다.
당시 <캔디드>가 발표한 앨범은 총 21장. 판권은 희한하게도 가수 앤디 윌리엄스에게 넘어갔으며 이후 87년 블랙 라이언에 귀속될 때까지 일본의 CBS\소니에서 CD로 근근히 발매되었을 뿐이다. 블랙 라이언의 앨런 베이츠 사장 역시 열렬한 재즈 레코드 컬렉터다. 그 덕분에 캔디드의 걸작들을 이제 손쉽게 CD로 접할 수 있게 되었으니 우리로서는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최근 들어 캔디드의 활동은 새롭게 개시되었는데, 아직도 들을 만한 재즈가 많다고 자신만만한 앨런 베이츠 사장의 정책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의 21장 외에 많은 신보가 이곳에서 발매되고 있다. 그 리스트를 보면 베리 해리스-케니 배런-리 코니츠-쇼티 로저스-버드 쉥크 등의 노장들과 리키 포드-마이크 케인-클라우디오 로디티 등 비교적 덜 알려진 그룹 등 이 골고루 섞여 꽤 다채롭다.
만일 앨런 베이츠의 말이 맞다면 새로운 캔디드의 레퍼토리도 주목해볼 만하다. 하긴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순간에도 재즈는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템을 내보내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그저 아무 선입견 없이 그런 노력들에게 박수를 보내면 되는 것이다. 재즈의 세계는 넓고 깊으며 아직도 사야할 재즈 레코드는 끝이 없이 많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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