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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음악가 이야기

피아노 소품집 - The Maiden's Prayer

by onekey 2024. 2. 29.
정인섭2009-06-01 19:16
추천 41 댓글 2

 

교과서에 실린 이해의 선물이란 단편을 기억할 것이다.
위그든 씨의 사탕 가게에 얽힌 그 이야기는 참 따뜻했다.

 

내게도 그것과 비슷한 일화가 있다.
고딩 때부터 자주 갔던 헌책방이 하나 있었다.
그곳 주인 아주머니는 매우 친절하고 박식한 분이라서
가면 항상 좋은 얘기와 책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거기서는 신간 같은 재고나 깨끗한 헌책을 정가의 절반 이하로 살 수 있었다.
그리고 가끔 중고 CD도 있었는데,
대부분 잡지의 부록이나 싸구려 전집의 몇 장이 껴 있곤 했다.
어떨 때는 정품 CD가 나와 있을 때도 있었다.

 

그날은 유난히 쌀쌀했다.
책방엔 나와 어떤 아저씨 한 분, 그리고 책을 정리하는 주인 아주머니만이 있었다.
고요한 클래식 선율이 책방 안을 가득 채우는 한적한 저녁이었다.
그런 적막을 깬 건 어느 꼬마였다.
문을 열고 들어온 그 꼬마는 책방에서 자주 마주쳐서 낯익은 얼굴이었다.
그 꼬마는 항상 이삼천원을 들고와 동화책이나 쉬운 과학책을 사들고 웃는 얼굴로 돌아가
참으로 기특한 아이라고 아주머니가 얘기한 적이 있었다.

 

그날도 꼬마는 동화책 한 권을 집어 들고는 책방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그 꼬마가 중고 CD가 꽂혀 있는 작은 서장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 예쁜 인형 그림이 그려져 있는 CD 한 장을 꺼내들었다.
기억으로는 듣기 편한 곡이 수록된 편집 음반이었는데, 정품 CD였다.
꼬마는 CD 뒷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혼자 중얼거렸다.
'학원에서 배우는 곡이네.'
아마도 피아노 학원을 다니는 것이겠지.
요즘 연습하고 있는 곡이 들어있나 보다.
나는 그 꼬마의 머리 너머로 그 CD를 넘겨보았다.

 

오천원.
아주머니 말대로라면 오늘도 많아야 삼천원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그 꼬마에게는 분명 예산 초과일 것이다.
나는 꼬마에게 선물이라고 사줄까 생각했다.
혹시 사양하거나 당황하면 어쩌나.
교육상 괜찮은 일일까 등등 머릿속에서 갖가지 고민이 피어오르고 있을 때,
꼬마는 가만히 그 CD를 다시 꽂아 넣었다.
그리고 동화책을 들고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때, 주인 아주머니가 CD장에서 CD 몇 장을 꺼내 먼지를 닦으면서 말했다.
"이건 가격이 잘못 붙었네."
그리고는 그 꼬마가 집었던 CD의 가격표를 손톱으로 긁어 떼어내고는
다시 가격표를 붙였다.
1000원.
나는 순간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가 눈치 챌 수 있었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머릿속이 맑아졌다.
주인 아주머니는 CD들을 다시 서장에 꽂아 넣고는 책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옆에 서있던 아저씨도 CD를 고르고 있었다.
그 아저씨의 손이 점점 그 꼬마가 집었던 CD 근처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순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손을 뻗어 그 아저씨의 손이 진행하는 것을 막았다.
CD를 고르는 척 위아래로 부산을 떨며 움직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꼬마를 쳐다보았다.
이미 꼬마는 기대가 가득한 얼굴로 아까의 그 CD를 집어 들고 있었다.
행복해지기 시작했다.
꼬마의 얼굴에도 기쁨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아줌마 이거 얼마에요?"
아주머니는 예의 그 온화한 얼굴로 꼬마가 내미는 동화책 한 권과 CD를 받아들었다.
"음... 동화책하고 CD... 2천원이구나."
꼬마는 주머니에서 꼬깃한 천원짜리 세 장을 꺼내들더니
그 조그마한 손으로 천원짜리 두 장을 잘 펴서 아주머니에게 전했다.
"안녕히 계세요."
"그래, 조심해서 가거라."
몇 분만의 일이 몇 시간짜리 영화처럼 느껴졌다.

 

밖에서 찬바람이 들어왔지만, 차가운지 몰랐다.
아주머니는 다시 책들을 정리하고 있었고,
꼬마는 저만큼 걸어가고 있었다.
아마 그 CD에는 가장 따뜻한 음악들이 들어가 있겠지.
그 꼬마도 그 CD를 들으며 행복해 하겠지?

 

음악은 참으로 이래저래 사람에게 감동을 준다.

 

 

 


추천 음반



우리가 흔히 소품이라고 부르는 작품들 중엔 소품이 아닌 것들이 은근히 많다. 온전한 작품 중의 유명한 악장이나, 다른 악기를 위해 편곡한 것도 그냥 뭉뚱그려 소품이라고 부르지만, 전혀 소품이 아닌 것들이 꽤 있다.

그러나 대개 소품이라고 하면 작곡가들이 편하게 쓴 짧은 곡을 가리킨다. 모두 멜로디가 강하고 서정적인 것들로, 꽤나 작품성 있는 것들도 상당수다.

이 앨범은 제목 그대로다. 소품의 대명사 소녀의 기도를 포함해 유모레스크, 미뉴엣 등 피아노를 조금 배운 후라면 누구라도 쉽게 연주할 수 있는 작품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할머니 피아노 앨범 속 낙엽’이라는 소제목은 정말 그럴싸하다.

22곡에 이르는 수록곡들 모두 부담이 전혀 없다. 미뉴엣 3총사인 보케리니와 베토벤, 그리고 피아니스트보다 수상으로 더 유명한 파데레프스키의 미뉴엣이 모두 담겨 있고 안톤 루빈스타인의 F조의 멜로디와 고섹의 가보트, 바이올린 소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실은 피아노가 원곡인 엘가의 사랑의 인사 등 아이들이 쉽사리 접하고 연주할 수 있는 곡들이 77분을 꽉 채우고 있다.

메이저 음반사에서도 이런 류의 피아노 소품집들이 대거 나와 있지만 염가 음반의 대명사 낙소스의 가격 메리트를 감안하고 유명 피아니스트들이 소품은 잘 연주하지 않는다는 점 또한 생각하자면 실내악에서 유독 강세를 보이는 낙소스의 이 음반은 편안하다는 소품의 이미지를 떠올릴 때 커피 한 잔 참고 하나쯤 오디오 옆에 꽂아둬도 무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