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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음악가 이야기

오페라 역사의 B.C.와 A.D.는 Before Callas 와 After the Diva

by onekey 2024. 2. 29.
유혁준2016-12-07 11:48
추천 36 댓글 0
 

"마리아 칼라스와 남편 메네기니"
 
 
 
"쓰디쓴 눈물은 흘러 온 대지를 뒤덮고"
"저기 저 하늘 위, 나는 기도하리라. 그대 위하여 오직 그대 오심에…"
"하늘은 더없이 아름다워라. 나를 위하여. 아! 그렇게…”
 
 
피투성이의 단검을 손에 들고 피로 얼룩진 가운을 길게 늘어뜨린 루치아가 정신 착란 상태에서 플루트의 단아한 오블리가토와 함께 마침내 〈광란의 아리아〉를 노래하기 시작한다. 〈부드러운 속삭임〉으로 시작하여 〈향로는 타오르고〉가 이어지자 엔리코는 누이동생의 처절한 모습에 후회하며 라이몬드도 동정하여 눈물을 흘린다. 에드가르도를 향한 하염없는 그리움과 사랑을 이렇듯 애절하게 부르짖고는 그녀는 결국 쓰러진다.
 
이 비극 오페라의 절정 부분으로서 3막 2장에 나오는 이 장면은 한 번 들으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선율과 콜로라투라의 극한 기교를 보여준다. 하늘나라에서조차도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리라는 루치아의 고백은 실로 듣는 이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감동적인 시이며 최고음 E♭음 ―기록으로는 G음을 내게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을 내게 하는 카덴차는 고음 악기인 플루트가 무색하리만큼 전율을 느끼게 한다.
 
세상의 권세와 지위에 사로잡혀서 누이동생의 고통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엔리코의 야심의 철저한 희생물로 전락하여 끝내는 죽음이라는 파국으로 치닫는 이 비극은 단지 19세기의 3막짜리 오페라의 줄거리라는 차원을 넘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매일같이 자신과 또 그 테두리 안의 집단의 이익만을 위해 비방과 고성이 난무하는 세태와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이며, 오히려 더할지도 모른다.
 
때로 우리는 음악을 각양각색의 예술 장르 중의 하나로 인식할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우리의 삶과 사회에 맥락을 맞춰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능란한 성악가의 기교보다는 그 가수의 삶과 생활과 인생관을 먼저 이해하고 선율보다는 가사와 곡의 배경에 더 비중을 두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마리아 칼라스에 열광한다. 그녀가 영면한 지, 사망한 지 40년이 되어가지만 언론은 무엇이든 끊임없이 기사화하여 전 세계를 칼라스 열풍으로 식을 줄 모르게 하고 있다. 특히 내년은 40주기를 맞아 더욱 떠들썩하게 음악 팬이라면 누구든지 한 번쯤은 칼라스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사실 칼라스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1950년에서 1960년대 초반까지 세계의 거의 모든 신문과 대중 매체에서는 ‘탐욕’스럽게 그녀에 대한 기사를 다루었다. 음악적인 것 뿐 아니라 사생활에 이르기까지 칼라스에 관련된 것이면 그것이 진실이든 허위이든 무엇이든지 대중의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을 그들의 저속한 상업성과 맞물려서 채워 주었다. 심지어 칼라스가 노래하는 아리아 한 곡조차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까지도 그랬다. 예술보다는 생활과 주변 인물에 대한 소문에 더 신경을 썼고 무엇이든 스캔들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대중 앞에서 칼라스는 새장 속에 갇힌 새였던 것이다.
 
 

▲ 마리아칼라스와 오나시스
 
 
특히 인기의 절정에 있었던 1956~57년 시즌에는 칼라스의 사소한 말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기사거리가 되었을 만큼 자유가 없었고 언론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미리 생각하기 전에는 말과 행동도 자유로이 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대중들은 그녀가 몸이 아프다는 것조차 용납하려 들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1947년에서 1959년까지 죠반니 바티스타 메네기니(1896~1981)와의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오나시스의 품으로 갔을 때 이러한 언론의 행각은 극에 달했다.
 
사람들은 28년의 나이 차가 나는 메네기니, 칼라스 부부를 흔히 보아 온 돈 많은 졸부와 철없는 여인의 장난질 정도로 치부하였다. 그러나 메네기니의 헌신적인 칼라스에 대한 애정, 그리고 칼라스의 메네기니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되면 제멋대로 내리는 판단과 고정관념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알게 된다. 적어도 1982년 메네기니가 ‘나의 아내 마리아 칼라스’를 출간하기 전까지 칼라스에 대한 자서전과 책들은 무대 위의 그녀를 단 한 번 보았거나 단 몇 분 이야기해 보고 예술에 대한 결론을 내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쓴 글이었다. 진실로 음악을 이해하거나 직접 알고 지낸 것이 아니라 칼라스를 ‘거만하고 변덕스러우며 전제적인 디바’로 몰아가기를 원했던 것이다.
 
메네기니를 통해 칼라스가 인간적인 감성을 가지고 신체적인 결함에도 불구하고 광적으로 아기를 갖고 싶어 했던 평범한 여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인간미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수많은 오페라의 주인공을 그토록 충실히 재현해 낼 수 없을 것이다. 칼라스는 부부애와 가정의 행복에 대한 청교도적인 결벽성을 지니고 있었다. 적어도 메네기니와 함께 한 12년 세월의 최대 관심사는 두 사람 사이의 행복과 사랑이었던 것이다.
 
 
◀ Maria Callas in Concert Hamburg, 1959 and 1962 실황앨범
 
투명하면서도 강렬한 음색, 엄격하고 정밀하게 조탁된 음악성, 극적인 힘을 발휘하는 감정의 격렬함, 천재적 영감의 번득임 등 온갖 찬사와 현란한 수식어를 동원해도 부족함 없는 칼라스는 단일 연주자로는 20세기 최고의 레코드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다. 지금도 모노로 녹음된  음반은 전혀 빛을 잃지 않고 있다. 1962년 오나시스와의 사랑에 금이 가기 시작하던 때에  함부르크에서 가진 칼라스의 역사적인 공연 실황이 있다. 지휘자와 손을 맞잡고 등장한 칼라스의 모습은 오페라 무대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그 강렬하게 꿰뚫어보는 눈빛, 아직 노래는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이미 극장 안은 숨죽이는 청중과 가수는 혼연일체가 되어 있었다. 이윽고 첫 음성이 나오고 끝날 때까지 시종일관 그녀는 슬픈 표정이었다. 삶을 달관한 듯한, 아득히 먼 천국을 동경하는 눈빛이 가슴을 여지없이 파고든다. 카르멘은 관능적인 여인이 아니었다. 세상에 대해 무서운 저주를 온몸으로 퍼붓는 연기는 이미 노래의 차원을 넘어선 절규에 가까운 것이었다.
 
마리아 칼라스는 1923년 그리스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뉴욕 맨해튼의 한 아파트에서 불우하고 어려웠던 어린 시절을 보낸 칼라스를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어머니조차 그녀에게는 사랑을 주지 않았다. 칼라스의 목소리는 개발되기 전에는 평범한 것이었다. 실로 눈물겨운 각고의 노력 끝에 자신만의 강렬한 발성법을 터득할 수 있었고 2차 대전 후 뉴욕으로 가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감독에게 오디션을 받았으나 결과는 ‘No’였다. 칼라스는 무료로라도 좋으니 '토스카' 출연을 간청했지만 극장에서 뚱뚱하고 평범한 가수에게 타이틀을 맡길 이유가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칼라스는 이탈리아 베로나의 아레나 극장에서 폰키엘리의 ‘라 죠콘다’로 데뷔하게 된다. 이때도 주최 측에서는 칼라스의 다급한 처지를 이용해 삼류 가수 정도의 형편없는 조건으로 계약을 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던 칼라스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그나마 빌린 여행 경비로 화물선을 타고 이탈리아로 향했다.
 
베로나에서 공연은 훌륭했지만 특별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칼라스는 이후 공연 제의를 전혀 받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칼라스에게 도움 주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은 대개는 그녀가 유명해진 다음의 일이었고 그것도 돈을 벌어 보려는 목적이었다. 오직 한 사람, 베로나에 도착한 바로 그날 밤에 칼라스를 알아보고 도와주겠다고 나선 메네기니만이 평생의 반려자요 조력자였다. 10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비만한 체구 때문에 발목이 붓고 온갖 피부병에 시달리는,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성공의 기미가 보이지 않을 것 같은 무명 가수를 아무 대가없이 품에 안은 셈이다. 칼라스는 행운아였다. 자신의 전부를 이해하고 사랑하여 무대에 설 수 있도록 해 주었던 메네기니를 만나지 않았던들 칼라스는 영원히 존재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메네기니는 진정 칼라스를 사랑했다. 책을 쓴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결혼 생활에 대한 언론의 악의에 찬 왜곡된 표현 때문이었다. 심지어 노래에 대해 극찬을 하면서도 정작 칼라스의 예술을 탄생하게 한 장본인인 메네기니와 그들 부부에 대한 부분은 서슴없이 날조된 펜의 칼부림을 멈추지 않았다. 
 
메네기니는 “나는 마리아를 위해 살았고, 나의 삶의 대부분을 그녀를 위해 바쳤으며 한결같이  사랑했다.” 고 고백한다. 칼라스 또한 메네기니가 없으면 한 순간도 살 수 없었다. 12년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남편의 생일 아침이면 언제나 편지와 선물을 준비했고 공연 때문에 떨어져 있을 때는 꼭 긴 사랑의 편지를 보내곤 했다. “우리가 항상 이처럼 만족할 수 있도록 신께 기도해요. 당신의 충실한 아내 마리아...”
 
누가 칼라스를 오만하고 변덕스런 프리마돈나의 대명사라 하겠는가. 그녀는 가정에서 상냥한 아내였으며 무대에서는 철저한 프로 예술가였다. 하지만 칼라스는 가수들을 흥행과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며 ‘갑질’이 만연했던 당시 극장주들에게 당당히 맞섰던 유일한 가수였다. 이 때문에 언론은 칼라스의 공격적인 성향을 과대 포장했다. 수년간의 친분도 가차 없이 버리고 쫓아내는 횡포가 당연하게 여겨졌던 오페라계에서 칼라스는 메네기니와 함께 반기를 들고 오히려 악명 높은 라스칼라 극장주 기링겔리를 발 앞에 무릎 꿇게 했다. 또한 칼라스를 철저하게 무시했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감독이 제 발로 찾아와 출연해 달라고 애원하게 했던 것이다.
 
칼라스는 너무도 연약한 여인이었다. 한시도 남편 없이는 안정을 취할 수 없었고 말년에도 그녀의 운전수에게 휴일에도 같이 있게 하려고 온갖 꾀를 다 썼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칼라스는 오나시스에게서 모든 것을 잃었다고 고백한다. 처음에는 목소리를 잃고 나중에는 자신을 잃었다고 후회했다. 그녀는 죽기 며칠 전 지인에게 털어놓았다. 
 
“얼마나 메네기니를 그리워하는지 모릅니다. 평생 많은 죄도 저질렀고 이제 그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칼라스는 1977년 9월 16일 54세로 타계했다. 과다한 수면제 복용으로 인한 심장 마비가 공식적인 사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죽음은 의문투성이다. 검시조차 하지 않고 3일 만에 화장했다. 모차르트가 공동묘지에 위치도 알 수 없게 매장되었듯이 너무도 허무한 죽음과 장례식이었다.
 
 

▲ 마리아 칼라스가 처음으로 연주한 La Gioconda를 연주한 앨범 자켓
 
 
'이 끔찍한 순간에
내게 남은 건 그대뿐
그대만이 내 마음을 유혹한다.
그것은 내 운명의 마지막 부름
인생의 노상에서 마지막 건너야 할 길'
 
 
‘라 죠콘다’ 4막에 나오는 유명한 아리아 ‘자살’. 칼라스의 이탈리아 무대 첫 오페라가 이것이었고 죽음을 앞두고 적어둔 다섯 줄 글귀도 이 아리아의 도입부였다.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이에 더해 도니제티의 오페라 ‘루치아’에서 루치아는 어쩌면 그녀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피를 토해내는 격정과 분노 그리고 옛 시절에서의 회상은 섬뜩한 전율과 함께 불의한 세상에 대한 경고의 몸짓과도 같다.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칼라스의 음악을 듣기 전에 먼저 그녀의 삶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가지고 그녀의 예술 세계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도니제티 - 도니제티는 대단한 속필가로 유명하다. 그는 〈사랑의 묘약〉도 단 2주만에 완성했다. 그러나 〈루치아〉는 그로서는 드물게 6주일이나 걸려 작곡했다 - 의 오페라 ‘루치아’에서 루치아는 어쩌면 그녀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피를 토해내는 듯한 격정과 분노 그리고 옛 시절에서의 회상은 섬뜩한 전율과 함께 불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 대한 경고의 몸짓과도 같다.
 
관현악에 1막의 사랑의 이중창의 선율이 피아노(p)로 은은하게 나타나면 느닷없이 포르테로 ‘아 솟아오르는 저 무서운 환상’이 알레그로 비바체로 터져 나온다. 칼라스만의 표현력을 엿볼 수 있다. 특히 ‘향로는 피어오르고’의 마지막 부분 카덴차에서 플루트와 함께 하는 그녀의 절규는 온통 감동의 도가니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르마 역의 마리아 칼라스, 폴리오네 역의 필립 페쉬, 그리고 아달지자 역에 스타냐니가 각각 맡아 열연한 벨리니의 ‘노르마’도 역시 세라핀 지휘의 밀라노 라 스칼라 합창단과 오케스트라였다. 
 
벨리니는 이탈리아 출신이면서도 프랑스인의 감성을 가지고 있는 작곡가이다. 그는 쇼팽과 친구였으며 또한 친구이기도 했을 만큼 공통점이 많았으며 로맨틱한 면을 고루 가지고 있었다. 벨리니의 오페라에서 나타나는 느리고 긴 선율은 그의 짧은 생애와는 상반되게 길고 긴 여운을 드리우고 있다. 벨리니처럼 선율미 넘치는 곡을 쓴 작곡가는 달리 없다. 그의 ‘몽유병의 여인’, 그리고 ‘청교도’에서 나타나는 벨칸토 아리아의 정수들은 이 작곡가의 인생관과 예술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특히 그 중의 백미라 할 만한 ‘노르마’는 ‘루치아’와는 달리 프리마돈나만을 위한 오페라가 아니라 다른 주역들도 훌륭해야 한다. 예를 들어 노르마와 아달지자의 2중창 ‘영원한 사랑을 위해서’는 아달지자의 열정적인 도약이 있어야 하는 대목이다. 아달지자 역을 맡은 가수는 성량이나 드라마 연기에 있어서도 노르마와 거의 같은 수준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스티냐니는 칼라스와 호흡을 훌륭하게 맞추고 있다. 
 
바그너는 “벨리니의 모든 창작물 가운데 ‘노르마’는 가장 깊은 진실과 가장 풍요로운 멜로디를 결합시킨 최고의 걸작이다.”라고 평했으며 벨리니 자신도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노르마’는 살리고 싶다.” 라고 말할 정도로, 벨리니의 특색을 유감없이 발휘한 최대의 걸작이 아닐 수 없다. 노래가 흐르는 선율에서는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순수미가 있고 또 단순한 표현이면서도 힘찬 격동이 있다. 특히 달의 여신에게 직접 말을 거는 ‘정결한 여신’은 이 오페라의 백미로서 가장 설득력 있는 명곡이다. 마리아 칼라스가 들려주는 ‘카스타 디바’는 온갖 고뇌를 짊어진 여사제 노르마의 심정을 극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벨리니의 ‘노르마’의 노르마와 ‘청교도’의 엘비라는 20세기에 칼라스에 의해 부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는 노르마의 전형을 보여주었으며 앞으로도 그녀를 능가할 만한 노르마는 당분간 나타나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그러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칼라스의 노르마는 단 한 명 칼라스 자신뿐이므로.
 
 
▲ 도니제티 루치아에서 연주하는 마리아 칼라스
 
 
흐린 파란 색 바탕에 긴 결혼식 가운을 걸친 채 두 손을 앞으로 뻗고 있는 루치아가 서 있다. 칼라스․스테파노․곱비 그리고 세라핀이 함께 하는 도니제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의 앨범 표지의 모습이다. 1막 마지막 부분의 ‘산들 바람을 타고’는 ‘광란의 아리아’의 회상의 장면에도 나오는 대목으로 칼라스는 우아한 선율로 노래한다. 스테파노도 역시 같은 선율을 노래하고 이어 이중창은 칼라스, 스테파노의 호흡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알게 한다.
 
2막 마지막의 6중창도 코러스를 수반하는 당당한 콘체르타토이며 극히 화려한 부분이다. 3막 도입부의 혼례의 합창 부분은 그 멜로디가 그대로 찬송가에 나와 있다. 결혼 축하에 어울리는 경쾌하고 밝은 합창이다.
 
3막의 ‘광란의 아리아’ 부분을 지나 3막 3장에서 에드가르도가 부르는 ‘내 조상의 무덤이여’는 E♭장조의 묵직한 전주로 시작되어 슬프디 슬픈 선율이 시작된다. 스테파노는 맑은 그의 음색을 살려 이 부분을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결국 ‘나는 승천의 날개를 폈다’ 를 외치며 에드가르도는 자신의 가슴을 단검으로 찌르고는 루치아의 뒤를 따라 천국에서 맺어지는 기쁨을 마지막 혼신의 기운을 다해 노래하고는 숨을 거둔다. 이윽고 막이 내린다. 스테파노와 곱비의 노래를 들어보라. 때로는 숨결처럼 부드러움에 웃음 짓다가도 폭풍과도 같이 몰아치는 격정적인 음성에 전율한다.
 
- 음악칼럼니스트 유혁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