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방송되었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약방의 감초’격으로 등장하는 배경음악은 드라마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일등공신이었다. 이순신이 해전을 앞두고 상념에 젖어 밤바다를 바라볼 때 아래로 깔리는 숭고한 음악은 화면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듣는 이를 감동으로 몰고 갔다. 매회 드라마의 가장 심각한 장면에는 어김없이 등장하는 이 음악은 바로 오스트리아 작곡가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7번의 2악장 ‘아다지오’의 도입부다. 이 ‘아다지오’ 악장의 총 연주시간만 25분에 달하는 가히 ‘천국’적인 길이를 가진다.
일반인들에게는 어쩌면 생소할 지도 모르는 작곡가 안톤 브루크너(1824-1896). 그를 16세기에 살다 간 이순신과 놓고 보면 어디 하나 비슷한 점이라곤 찾을 수 없어 보인다. 허나 ‘인간’이라는 본질적인 면을 놓고 보면 두 사람은 너무도 합치점이 많이 발견된다. 돈과 명예 그리고 세속적인 것들에 결코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의 예술과 신앙에만 매진했던 브루크너는 오로지 나라의 안위와 부하들의 살고 죽음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졌던 이순신과 그토록 닮아있는 지도 모른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잊고 지내는 ‘휴머니즘’의 결정체가 아닐까.
2006년 8월, 오스트리아 제 2의 공업도시 린츠는 작열하는 태양만큼이나 뜨거웠다. 린츠역 북쪽, 도나우 강을 건너기 직전 구도심 중앙광장의 삼위일체기념탑은 수도 빈에 있는 그것과 같이 위용을 자랑한다. 린츠 구시가에서 남쪽으로 15km 더 달려 도착한 곳은 안스펠덴(Ansfelden). 브루크너의 생가가 있는 ‘잘츠부르크 알프스’의 동쪽 기슭에 자리한 아름답기 그지없는 고즈넉한 시골마을이다. 왜 브루크너의 음악이 그토록 자연을 추구했는지 그 이유를 알게 해 준다. 안스펠덴에서 동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거대한 80m 첨탑 3개가 하늘을 찌르며 솟구쳐 있는 성 플로리안 수도원이 나온다. 한여름 처량 할 만큼 짙게 드리운 녹음과 무려 200m에 달하는 빨강 지붕의 바로크식 건물에 먼저 압도당했다. 1071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참사회의 수도원이 있던 곳으로, 성 플로리안의 무덤위에 세워져 1751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어디선가 천상의 울림이 들려왔다. 수도원 2층의 대성당에서 나오는 소리, 그건 빈 슈테판 대성당과 함께 오스트리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성 플로리안 수도원 교회의 파이프오르간의 웅혼한 음향이었다. 1851년에 수도원 종신(終身) 오르가니스트로 임명되어, 1875년 11월 19일 브루크너가 처음 연주해 봉헌된 오르간을 실제로 보니 숨이 턱턱 막혀 온다. 그건 바로 브루크너 음악의 시작이자 끝이며, 교향곡에서 관현악으로 일관되게 재탄생해 나타나는 천국적인 오르간 음형의 다름 아니다. 교향곡 7번 ‘아다지오’ 악장의 바그너튜바로 화한 오르간이다.
지하로 향했다. 카타콤베가 있는 그곳에 브루크너의 묘지가 있었다. 서늘한 추위가 엄습했다. 수도원에서 순교한 5,000여명의 수도승의 유골에 둘러싸인 브루크너의 석관은 그의 유언대로 파이프오르간 바로 아래에 위치한다. 이 신비로운 체험은 이후 필자가 브루크너 음악을 이해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다.
브루크너를 듣고 있으면 한없이 안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무한한 정적의 세계에 몸을 맡기게 된다. 끝도 없이 지속되는 아다지오의 음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때로는 ‘알레그로’와 ‘스케르초’ 조차도 그 이어지는 영속성에 기나긴 시간의 여행을 하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가 평생을 두고 연주했던 오르간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오르간의 기나긴 지속음을 그 성스러움과 함께 교향악에 투영한 것이기 때문이다. 교향곡 3번의 아다지오 악장을 들으며 어찌 편하게 누워있을 수 있으랴. 심오한 종교성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겉으로 드러난 소리의 울림만으로 이미 충분히 경건하다. 그만큼 브루크너의 교향곡은 가장 길면서도 가장 아름답다. 길어야 5분을 넘지 못하는 대중음악에 길들여진 바쁘게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브루크너는, 듣고 있으려면 따분하기 그지없는 인내의 한계를 요구하게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편견을 극복하고 브루크너에게 경도될 때 우리는 비로소 새로운 자유의 세계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브루크너는 스스로를 ‘오스트리아의 촌사람’이라 자처하면서, 생애의 대부분을 오스트리아 린츠 교외의 산 중턱에 위치한 성 플로리안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봉직했다. 시골의 대자연과 그가 믿었던 신의 숨결이 배어있는 성당으로부터 비롯된 음악적인 영감이 교향곡의 뿌리를 형성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브루크너는 브람스보다 9년 이른 1824년 오스트리아의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브람스와는 달리 그는 비인 음악계에서 좀처럼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리고 그 자신이 음악가가 누릴 수 있는 명성을 철저히 차단한 채 묵묵히 자신의 성을 쌓아 올리는데 열중했다. 10세 때부터 교회의 오르간을 연주했을 만큼 그의 음악의 기본은 신앙과 깊게 연관되어있다. 그래서 브루크너가 추구해간 음악세계는 충만한 하늘나라의 감동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교향곡 4번이 성공을 거두기 전까지 브루크너는 철저히 음악계에서 외면당하고 있었다. 브루크너 자신도 자신의 교향곡이 생전에 연주되는 것을 자주 듣지 못했다고 한다. 심지어 작곡에 손을 댄지 20년 가까이 지난 뒤인 1894년 초연했던, 대 건축물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교향곡 5번은 건강이 심히 악화되어 끝내 실연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그나마 인정을 받기 시작한 시기가 나이 50이 넘어서였으니 브루크너만큼 대기만성의 전형을 보여준 작곡가도 없을 것이다. 브루크너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따위에는 아예 관심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직선적인 사람이었고 이러한 성격은 겉치레의 예의범절을 중시하는 비인 사교계에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오직 말없는 대자연만을 벗하며 시간을 소일했다.
“그는 쓸쓸할 때면 나뭇잎이나 길가의 돌, 여자 옷에 달린 진주 따위를 세는 버릇이 있었다. 이윽고 도나우 강가의 모래알까지 세다 끝내 못다 계산하게 되면 미친 듯이 혼란 상태에 빠지는 일이 있었다. 교향곡 4번의 성공으로 의기양양해진 그는 그날 밤 지휘를 맡은 한스 리히터에게 달려가 ‘적지만 받아주시오!’ 하고 고작 은화 한 개를 손에 쥐어주었다. 당대 최고의 지휘자 리히터는 훗날 회중시계 줄에 그 은화를 달고 다니며 이야기거리로 삼았다고 한다.” (안동림, [이 한 장의 명반] 중에서)
이 일화는 촌스럽고 순수한 브루크너의 성격의 단면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브루크너는 교향곡이라는 음악의 형식을 빌어 대성당 같은 음의 건축물을 이룩한 작곡가다. 브루크너는 생전에 9개의 교향곡을 발표했다. 오늘날 0번이라고 알려진 것을 합치면 10곡인데 마지막 교향곡 9번은 끝악장이 미완성으로 남아있다. 제9번이 걸작으로 꼽히지만 무려 80분에 이르는 길이를 가지고 있는 제8번은 그야말로 심연의 바다와도 같으며, 그가 가장 존경했던 바그너에게 바쳤던 제3번의 아다지오 악장은 소위 ‘브루크너 아다지오’의 진수를 보여준다. 하지만 비인 음악계에서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브루크너에 대한 평가의 기준이 달라지게 한 계기를 만들어 준 교향곡이 바로 제4번 ‘로맨틱’이다. 1881년에 초연되었으니 어떠한 비난과 야유에도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갔던 브루크너는 그의 나이 57세에야 당시 음악계에 이름을 올린 셈이 되었다. 다른 작곡가 같으면 중요한 작품이 거의 다 발표되고도 남았을 나이이다.
애초에 브루크너는 세상적인 성공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린츠 근교의 시골마을에서 흙을 벗 삼아 유유자적한 삶을 즐기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교향곡과 같은 무게 있는 대곡을 쓰기 시작한 것도 나이 40이 가까워서였다. 교향곡 1번이 발표된 해가 1966년, 그의 나이 42세 때였다. 그리고 다시 침묵했다가 6년이 흘러서야 교향곡 2번을 내놓았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 나오는 교향곡 제7번은 작곡가의 나이가 환갑에 이른 1883년에 완성되었다. 삶의 희로애락을 겪은 백발의 노인이 추구한 세계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더구나 1883년 2월 13일에는 브루크너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존경해마지 않았던 작곡가 바그너가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교향곡 7번의 2악장에는 바그너를 애도하는 ‘진혼곡’과도 같이 끝없이 지속되는 무한 ‘아다지오’가 종교적인 냄새를 풍긴다.
교향곡 0번과 초기의 2번까지가 본격적인 교향곡 작곡을 위한 예비단계라 한다면 3번에서 6번까지는 바그너의 영향을 받아 관현악법이 엄청난 확장을 하게 된다. 그리고 7번에서 미완성으로 끝난 9번에 이르면 ‘무념무상(無念無想)’의 해탈에 경지에 도달해, 편성 뿐 아니라 장중하게 이를 데 없는 울림과 깊은 종교성은 기도하는 모습의 다름 아니다.
브루크너를 들을 때는 몇 가지 포인트가 있다. 평생을 오르가니스트로 봉직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지켰던 브루크너는 오르간의 효과를 교향곡에도 반영했는데 지속적인 저음악기의 긴 음의 나열이 그것이다. 또한 1악장에는 반드시 현악기의 미세한 ‘트레몰로’를 타고 대체로 혼으로 제시되는 1주제가 아스라이 멀리서 들려오는 ‘브루크너 개시(開始)’는 그의 교향곡이면 어김없이 나타난다. 새벽 안개를 헤치고 여명이 밝아오는 서늘한 느낌. 이것은 태초의 시작이며 동시에 일상의 시작을 알리는 고요한 팡파르이다. 이어 웅대한 금관군의 포효는 예의 그 유명한 ‘브루크너 리듬’으로서 셋잇단음표의 포르테이다. 이 브루크너 특유의 리듬은 그의 교향곡뿐만 아니라 합창곡에도 등장하는 가장 중요한 모티브가 되는 부분이다. 이 리듬의 템포를 지키지 않으면 브루크너 음악의 참 맛을 느끼기는 어렵다.
느린 2악장은 ‘브루크너 아다지오’의 전형으로 이는 호수의 명징한 일말이며 깊은 바다의 끝없이 거대한 에너지의 침묵이다. 약음기를 낀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비애감을 품고 등장하면 첼로가 슬픈 노래를 부른다. 전개부의 폴리포니는 작곡가의 절묘한 대위법 작곡 기교를 보여주며 그 거룩한 신앙심은 이른바 ‘브루크너 휴지(休止)’라 불리는 잠시간의 호흡 정지에서 절정을 이룬다. 풍성하게 빨려 올라가는 듯한 현의 울림은 느린 악장의 극치를 보여준다, 지극히 오르간 적이다. 이 ‘브루크너 휴지’는 각 부분이 끝나는 곳이면 감초처럼 나타나 긴장감을 극도로 유발한다.
3악장 스케르쪼는 백마 탄 기사들의 한바탕 춤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진지한 절도는 지켜진다. 혼에 이어 트럼펫 등의 금관군이 서서히 크레센도하는 도입부는 곧 전합주(全合奏)의 힘찬 음향으로 고조된다. 피리소리, 새소리, 바람소리를 연상케하는 갖가지 주제가 흥미롭다. 트리오 부분은 전원곡이라 할만큼 따스하고 평화롭다. 관악기군의 도약이 돋보이는 어깨춤이 절로 나는 ‘행진곡’이다. 특히 고음악기인 트럼펫과 이를 받쳐주는 트롬본, 혼의 활약이 눈부시다. 4악장은 보통 20분이 넘는, 대미를 장식하는 장엄하고 웅대한 피날레이다. 브루크너적인 깊이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생명력 넘치는 환희의 송가이다.
“로마의 어떤 황제도 이보다 더 빛나는 승리를 바랄 수 없었을 것이다.”
후고 볼프는 교향곡 8번의 초연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브루크너의 교향곡 8번은 전 교향곡 가운데 가장 연주시간이 길고 가장 편성이 크다. 최고의 명연으로 평가받고 있는 첼리비다케 지휘의 뮌헨 필하모닉 연주실황의 경우 전곡 104분에 느린 3악장만 무려 35분에 육박한다. 길어도 ‘너무 긴’, 어마어마한 대장정이라 할 만하다. 작곡가 자신도 가장 애착을 가졌던, 완성작으로는 마지막이 되었던 이 작품은 1884년에서 1887년 사이에 쓰여졌으나 7번을 지휘했던 헤르만 레비에 의해 거부당했다. 예의 개작을 거듭한 끝에 1892년에 빈 필하모닉에 의해 초연되었다.
2001년 12월 93세로 타계한 일본 오사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아사히나 다카시는 생전에 브루크너 교향곡 전집을 3번 녹음한 열렬한 브루크너 찬미자였다. 아사히나는 일찍이 브루크너 협회의 회장을 역임했던 거장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죽기 1년 전인 1953년, 라이프치히의 한 호텔 로비에서 그를 만났다. 단 몇 분에 불과한 이 역사적인 만남은 아사히나의 음악적 삶을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는데 푸르트벵글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브루크너는 절대로 원전판(Original Fassung)에 의해 연주되어야 하네. 이것만은 꼭 명심하게!”
이후 아사히나는 이 대지휘자와의 약속을 반드시 지켰다고 한다. 브루크너의 교향곡은 갖가지 판본이 있는데 원전판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브루크너는 자신의 겸손함으로 인해 작품의 개정을 여러차례 시도했다. 뢰베와 샬크 형제에 의해 개악(改惡)된 생전의 개정판에서부터 로베르트 하스와 레오폴드 노바크의 원전 개정판이 있고 최근의 윌리엄 캐러건의 판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마지막으로 라틴어 경구를 소개하며 마무리한다.
“Memento homo, quia pulvis es, et in pulverem reverteris.”
“기억하라 인간들아, 너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 음악칼럼니스트 유혁준(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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