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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음악가 이야기

구스타브 클림트: 피아노 앞의 슈베르트

by onekey 2024. 2. 29.
김효진2009-05-02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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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겨울, 자신의 저택에서 작업하고 있던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는 왼쪽의 심장에 강렬한 통증을 느꼈다.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에밀레를 불러와".

에밀레 플뢰게는 클림트와 이십 칠년동안 알고 지낸 사이이며, 이 두 사람은 서로의 삶에 깊숙하게 개입해 있었다. 에밀레는 열 일곱이었고, 클림트가 스물 아홉살이던 1891년의 첫만남 이후 내연의 관계로 발전해왔다. 무엇보다 클림트가 그녀의 초상화를 무려 네 번이나 그렸다는 의미는 굉장히 크다. 왜냐하면 그가 두 번 이상 그린 초상화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화를 두 번 그린 것을 제외하면).

우리는 클림트가 여인의 초상만을 그린 것이 아니라는 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 한다. 다행히 그도 음악과 관련된 그림을 그렸고, 여기에는 '피아노 앞의 슈베르트'(Schubert am Klavier)도 포함된다. 이 그림은 1899년에 그려졌으며, 니콜라우스 둠바의 주문에 의해서였다. 성공한 실업가였던 둠바는 자신의 새로운 저택을 장식할 그림이 필요했고, 음악실의 공간에 걸려질 그림의 화가로 클림트가 선택되었다.

전체적으로 신비한 분위기가 작품을 감돌고 있으며, 여기에는 클림트가 광원으로 촛불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슈베르트(Franz Schubert, 1797∼1828)는 자신의 어떤 작품을 연주하고 있는 것일까? 즉흥곡일까, 아니면 피아노 소나타일까. 그림 안에서 슈베르트는 매우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으며, 양 옆의 여인들은 노래를 부르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촛불을 이용한 그림으로 유명한 바로크 시대의 프랑스 화가 조르주 드 라 투르(Georges de La Tour, 1593∼1652)를 알고 있다. 하지만 클림트가 라 투르를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이 화가는 20세기에 재발견되었고, 그 이전에는 완전히 잊혀진 화가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여인의 복장이다. 슈베르트가 살아있던 당시에는 이런 스타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클림트는 이 그림에서 19세기 말 빈에서 유행하던 복식 스타일을 적용시켰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슈베르트가 연주하고 있는 피아노도 19세기 초반의 브로드우드나 에라르의 초기 모델이 아니며, 1890년대의 스타인웨이나 치커링 스타일처럼 보인다. 물론 역사적인 사실을 고스란히 복원했는냐, 혹은 그렇지 않느냐가 작품의 질을 평가하는 결정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다.

클림트가 활동하던 시대에는 역사적인 고증은 하나의 고려 사항일 뿐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었으며, 대부분의 화가들은 상상을 토대로 작업했다. 더구나 슈베르트는 그가 살아있던 당시에는 이렇다 할 명성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실제로 연주되는 경우가 드물었다. 기껏해야 그와 친구들의 친목단체인 슈베르티아데에서나 종종 연주되는 수준이었다.

이 작품에서 클림트 특유의 화법은 매우 창조적으로 발휘되었다. 하늘거리는 색채와 거울에 반사되는 빛, 인물들의 표정에서 감지되는 심리적인 긴장감은 그가 이전의 역사주의 양식에서 벗어나고 자신의 독자적인 스타일로 나아가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요컨대 이 작품은 클림트 자신에게나 우리들 모두에게나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명암은 강렬하게 대비되면서, 촛불은 슈베르트 자신의 불꽃같은 삶을 은근히 상징한다. 관객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왼쪽에 있는 슈베르트와 오른쪽 하단의 여백, 그리고 촛불 사이의 떠돌게 만든다.

인물들의 표정은 굳어있고, 여인들의 화려한 옷감은 슈베르트의 검은색 연미복과 충돌한다. 그림에서는 어떤 엄숙함마저 느껴지며, 화가는 슈베르트에게 숭고함을 부여하였고, 색채는 이러한 분위기를 의도하기 위해 착 가라앉아 있다.

클림트는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을 하나의 모토로 생각하고 있었고, 슈베르트 또한 그러한 범주에서 이해되었다. 실제로 그가 그린 또 하나의 작품인 〈Nuda Veritas〉에는 프리드리히 쉴러의 '그대의 행위와 예술이 모든 사람을 즐겁게 할 수 없다면, 소수의 사람을 만족시켜라'는 문구가 함께 있다.

슬프게도 이 작품은 1945년 임멘도르프성(Schloss Immendorf)의 화재로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따라서 이 그림은 이미지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