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비발디가 매우 사랑스런 음악가라고 생각한다. 비발디 하면 일단 사계절부터 떠오르겠지만, 그가 협주곡으로 남긴 느린 악장들은 동시대 인물이었던 바흐의 틀에 꽉 찬 듯한 느린 선율이나 모차르트의 아름답다 못해 슬프기까지 한 아다지오 악장과 함께 삼대 산맥을 이루는 멜로디 라인이라고 생각한다. 비발디의 느린 협주곡 악장들은 바로크란 형식의 틀에 짜 맞춰지지도, 그렇다고 후기 고전파나 낭만파의 지루할 듯 말 듯 늘어지는 길이의 변주도 아닌, 말 그대로 사랑스럽다라는 말이 정확히 어울리는 작품들이다.
그런 비발디의 사랑스런 선율미 가득한 협주곡은, 유명한 바이올린 협주곡이나 현악 합주곡이 아닌 류트나 만돌린을 위한 협주곡이다. 그저 클래식의 변방쯤으로 치부되는 류트(현재는 기타)나 만돌린(이 악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사람도 상당수인)을 위한 협주곡집이 비발디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선율을 가지고 있다면 의아해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앨범을 들어보면 그런 소리는 쑥 들어가고 말 것이다.
비발디 <기타와 만돌린 협주곡집>
기타 : 나르시소 예페스
만돌린 : 타카시 & 실비아 오키
지휘 : 파울 쿠엔츠
연주 : 파울 쿠엔츠 실내악단
DG 476 147-4(Eloquence Canada catalogue number)
우선 곡에 대한 얘기부터 하자. 이 앨범의 백미는 류트, 2 바이올린과 바소 콘티누오를 위한 협주곡 D장조(보통 줄여서 기타 협주곡 D장조)의 제2악장이다. 이 2악장은 영화 <리틀 로맨스>에 쓰여서 더욱 유명해졌는데, 일단 영화 줄거리를 알면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다.
다이안 레인의 데뷔작으로, 베니스의 저녁 종이 울릴 때 곤돌라를 타고 탄식의 다리를 지나며 키스를 하면 둘의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사기꾼 할아버지(로렌스 올리비에)의 거짓말을 믿고 베니스로 애정 행각을 떠나는 어느 바람난 소년 소녀 이야기다. 베니스가 목적지이고, 쓰인 작품이 베니스 출생인 비발디의 작품이다. 감독 조지 로이 힐과 이 영화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한 조르쥬 들르뤼의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그리고 이 앨범의 LP 재킷에 그려져 있는 다리와 곤돌라의 배경 그림은 영화와 너무도 잘 맞아떨어진다. 앨범 녹음 연도가 1972년이고 영화는 1979년에 나왔으니 재킷이 오리지널 커버 그대로라면 기막힌 우연의 일치라 할 수 있다.
그럼 이제 앨범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애호가들 누구에게나 아끼는 작품에는 보통 레퍼런스라고 부르는 각인된 모범 연주가 있듯이, 이 연주는 필자에게 그러한 것이다. 10현 기타를 제작해 연주와 레퍼토리를 확장한 나르시소 예페스의 기타는 비발디의 이 작품이 가진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그야말로 극명히 표현하고 있다. 음 하나하나를 오랜 독공에 의해 쌓인 깊은 탄현으로 표출하는 예페스의 울림은 로맨티시즘의 극치다.
이 작품 연주의 관건은 템포로, 아무리 악보에 '라르고'로 지정되어 있어도 수많은 연주들이 '모데라토' 이상의 속도로 연주하여 그 맛을 현저히 떨어뜨리고 있는데, 그에 비해 예페스는 최대한도로 선율미를 살려 느린 템포로 연주하고 있다. 악보에 충실한 연주를 펼치는 것으로 유명했던 예페스의 모범스런 스타일이 정확히 맞아떨어진 대목이다.
악보를 보면 점 16분 음표와 32분 음표의 연속이라 자칫 템포 설정이 빨라질 수 있는 위험이 있고, 이 부분에서 예페스는 완벽한 템포를 설정하고 있다. 세고비아와 예페스 이후 현대 기타계를 양분했던 존 윌리암스와 쥴리안 브림의 연주와 비교하면 더더욱 예페스의 연주가 빛을 발한다. 윌리암스는 자신의 편곡까지 붙여 빠른 속도로 연주해 거의 애드리브를 보여주고 있고, 류트를 연주한 브림 또한 류트의 금속성 소리가 작품의 아련한 낭만성을 오히려 해치고 있다.
비발디 시대에 맞는 원전 연주로 따지자면 분명 류트가 맞지만, 아무리 비교를 해도 역시 현대 기타의 소리가 이 작품에 더 어울린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악보에 따른 템포 설정과 음 하나하나에 얹힌 무게, 그 음표들이 그려내는 선율미를 아련한 로맨티시즘으로 표현하는 예페스의 기타는 연주자는 악보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는 것을 확실히 증명해 보이고 있다. 비발디의 기타 협주곡 연주로는 단연코 최상이라 감히 단언한다.
이 앨범에는 기타 협주곡 D장조와 D단조 외에 그의 대표적인 만돌린 협주곡이 들어가 있다. 영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에 쓰여 일약 유명해진 만돌린 협주곡 C장조와 CF에도 등장했던 두 대의 만돌린을 위한 협주곡 G장조가 같이 수록되어 있다. 수박을 반 쪼개놓은 것 같이 생긴 만돌린의 귀여운 생김새를 그대로 보여주는 이 깜찍한 작품들은 비발디의 악기에 대한 이해도와 더불어 그가 가진 유머러스함을 대변해주고 있다. 앨범에서 만돌린을 연주하는 타카시와 실비아 오키는 만돌린 소리의 천진함을 고스란히 전하고 있어, 만돌린이 생소한 사람이나 만돌린 소리가 어떤지 궁금한 사람에게도 강력 추천 음반이다.
툭하니 튀어져 나오는 만돌린의 고음과 시침 뚝 떼는 듯 땡그랑거리는 소리가 절묘히 어우러지는 만돌린 협주곡 C장조와 그와는 반대로 늘 웃는 사람의 우울한 표정을 목격한 듯한 두 대의 만돌린을 위한 협주곡은 만돌린이란 악기 자체를 강하게 기억시킨다. 그리고 서포팅하는 파울 쿠엔츠와 그의 실내악단도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하다. 독주 악기를 떠받치며 반주에 몰두해야 할 때와 밀고 올라오며 힘 있게 어필해야 할 때를 정확히 파악해 협주곡이 가진 앙상블의 묘미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 트랙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그야말로 선곡과 연주 모두 뛰어난 앨범으로, 금상첨화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이 앨범은 1990년에 DG의 염가 시리즈인 Resonance로 처음 CD화 된 이후 인터내셔널 카탈로그에서 사라졌다. 물론 국내에서도 그 당시 수입된 소량만이 전부였었다. DG에서 예페스의 연주를 슬슬 하나씩 없앨 때마다 안타까웠고, 박스로 묶어서 다시 내보낼 때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갖게도 했지만, 21세기가 되어서도 재발매는 감감 무소식이었다. 사실 이렇게 뛰어난 연주를 왜 썩힐까 궁금해 하면서, 역시 기타란 악기가 인지도에서 밀리고 있구나 하는 안타까움만 더하게 했다. 그러던 중, 유니버설의 3대 레이블인 DG, Philips, Decca를 아우르는 Eloquence란 염가 시리즈가 출시되었고, 캐나다판 카탈로그에서 이 앨범이 고스란히 재발매된 걸 알았다.
사실 지금도 해외 인터넷 사이트에서 Resonance와 이와 같은 Musikfest 시리즈로 발매되었던 당시의 소량 남은 재고를 구할 수는 있다. 하지만 다시 재발매 되었으므로 수고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러나 세계 최고라는 모 도서 음반 사이트와 국내 유명 사이트의 Eloquence 시리즈를 뒤져도 이 앨범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이유는 인터내셔널 카탈로그에는 이 앨범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캐나다판 카탈로그에는 시리얼 번호와 트랙 리스트가 올라와 있다.
기타와 만돌린이 빚어내는 로맨티시즘에 빠져 한 시간을 보내고 나면 작품들이 쓰인 영화가 궁금해질지도 모른다. 오래 전 영화들이지만 그렇다고 궁금증을 외면하기에는 이 앨범이 가진 내용의 질이 압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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