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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음악가 이야기

누가 마이크를 두려워하랴?

by onekey 2024. 3. 1.
박성수2010-12-15 15:44
추천 36 댓글 0
 

▣ 누가 마이크를 두려워하랴?


음악가들에게 녹음은 무대 공포증에서 벗어나게 해 줄 축복인가? 새로운 재앙인가? 녹음에 대하여 음악가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자신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알아 볼 수 없었던 나르시스의 비애! 마이크를 두려워했던 사람들… 마이크를 통하여 위대한 예술가가 되었던 사람들… 녹음과 음악가에 얽힌 다양한 문제들을 살펴본다.

 

 

음향의 저장과 재생!

 

이제는 너무도 일상적인 기술이 되어 버렸지만, 1877년 에디슨이 포노그래프를 발명했을 당시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었고 경이였다. 한 순간의 시간 속에서 '덧없이 울렸다가는 사라져 버렸던 음향'을 붙들어 매고 필요할 때 다시 꺼내 들을 수 있다는 것! 이 기술로 인하여 가장 혜택을 보았던 것은 물론 음악이었지만, 녹음을 통하여 음악 또한 지난 한 세기 동안 혁명적인 변화를 겪어 왔다. 그렇다면 이러한 음반의 세기 속에서 음악가들은 녹음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실제로 지난 한 세기 동안 음악가들은 녹음에 대하여 대단히 다양한 태도를 보여 왔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녹음에 대하여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던 음악가는 그리 많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주 심한 경우에는 마이크 공포증을 보였던 음악가들까지도 있었던 것이다. 연주가들을 괴롭히는 지독한 무대 공포증을 경험하지 않도록 해 주는 녹음 작업을 좋아하지 않는다? 반복 녹음을 통하여 최고의 연주를 실현하는 것이 왜 싫다는 말인가?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마이크 공포증이 대가급 연주가들에게서도 빈번하게 발견된다는 점이다.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는 '나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마이크를 무서워한다' 라고 말한 바 있으며, 아트루르 그뤼미요 또한 녹음이 시작되면 마이크가 무서워지며, 녹음이 진행 중임을 표시하는 '빨간 불빛이 들어와 있다는 생각만 해도 무시무시한 느낌이 든다' 라는 고백을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연주가들이 마이크를 혐오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무엇보다 먼저 그것은 녹음이 가지고 있는 '객관화의 효과'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연주가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감상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연주'를 듣는다는 것 자체가 이들에게는 대단히 낯선 체험인 것이다. 그러나 녹음기로 재생되는 자신의 음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것이 어디 연주가들만 경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자신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면서 위화감을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자신의 음성을 재생하는 경우 사람들은 대부분 그 음성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음성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은 쿠르트 마주어가 전하는 푸르트뱅글러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진지하게 살펴 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녹음된 자신의 연주를 처음으로 듣던 푸르트뱅글러가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자신의 연주를 더 이상 듣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로 있었던 일입니다. 그가 그렇게 했던 것은 그가 자신의 연주에서 결점을 발견했기 때문이었지요. … 한 마디로 그는 자신이 저질렀던 실수를 알게 되었던 겁니다.'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곤란하지만, 이 증언은 객관적인 입장에서 자신의 '연주'를 처음으로 들었던 푸르트뱅글러가 받았던 충격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는 듯하다. 이 이야기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자신의 연주를 듣는 순간 음악가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양상에 대하여 말해 주고 있으며, 더 나아가 객관적으로 재생되는 자신의 연주와 현재 그 연주를 듣고 있는 자신 사이에 놓여 있는 물리적․심리적 거리를 극복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에 대해서도 말해 주고 있다. 결국 녹음은 이러한 체험을 통하여 음악에 대한 음악가의 태도와 인식을 바꾸는 중대한 계기를 제공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아름다운 음성에 취할 수 없는 나르시스의 아이러니가 탄생했다고 해도 말이다.

 

 

그렇다면 푸르트뱅글러가 자신의 연주에서 잘못을 발견했다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에 대해서는 녹음이 야기한 '음악 지각 방식의 변화'에 대하여 언급해야 할 것 같다. 1930년대에 발표된 유명한 논문인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에서 발터 벤야민은 프로이트의 저서 '일상 생활의 정신 병리학'과 영화에서의 시각적 지각의 상관 관계를 다루면서, '영화 역시 결과적으로 넓은 시각의 세계뿐만 아니라 청각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이와 비슷한 심화를 가져다주었다. 영화가 보여 주는 성과들이 …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영화에 의한 지각의 심화라는 현상의 또 다른 한 면에 불과하다' 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은 20세기 초반 바르토크가 포노그래프로 녹음한 헝가리 민요를 악보로 옮기면서 '이들 녹음을 듣는 것은 현미경을 통하여 음악 대상물을 검사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했던 말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녹음은 음악가들에게 그 이전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음악 듣기'의 방식을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마이클 채넌이 지적하는 것처럼 '녹음은 마음의 귀(inner ear)로 음악을 감상하는 것으로 지각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온 것이다.'

 

 

아! 영원한 기록이여… 그 끝없는 두려움의 대상이여…

 

그러나 연주가들을 괴롭혔던 것은 자신의 연주를 영원한 기록으로 남긴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공연장에서 이루어지는 청중과의 일회적 대화 형식에 익숙한 연주가들에게 '당신의 연주를 영원한 기록으로 남깁시다' 라고 말하면서 접근했던 초기의 유명한 음반 제작자 프레드 가이스버그 같은 사람의 제안은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그는 녹음을 하는 연주가들에게 '후손을 위하여' 녹음을 하고 있다는 사명감을 되새기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당부는 음악가들을 더욱 무기력하게 만들뿐이었다. 그보다 훨씬 뒤의 일이지만 제르킨이나 세고비아 같은 연주가들이 녹음 작업 자체를 '고문'으로 여겼던 것은 바로 이러한 측면 때문이었다고 베테랑 음반 제작자인 토머스 프로스트는 말하고 있다.

 

영속성에 대한 이러한 부담감은 1919년 부조니가 녹음 작업을 끝내고 난 뒤 자신의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도 잘 나타나 있다. 녹음은 '멍청하고 또한 부담스러운 일이었는데 … 수수께끼 같은 것을 지나서 … 페달을 내려다보았다오(왜냐하면 음향이 좋지 않기 때문이었소). 이 악마 같은 기계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강하게 연주하거나 약하게 연주해야 할 어떤 음표에 대하여 생각해 보면, 잘못 연주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어느 누구라도 그냥 흘려버릴 수 없고, 연주가 이루어지는 시간 내내 모든 음표가 그 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어야 한다오. … 이것이 바로 부조리한 그라모폰 사업이지' 라고 그는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스트레스를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 예는 세 사람의 영국 국왕의 대관식 미사에서 오르간을 연주했던 월터 앨콕이 1928년 솔즈베리 대성당에서 바흐의 '전주곡과 푸가' D장조 BWV 542를 녹음할 당시 자신의 심리 상태를 묘사한 표현일 것이다. '녹음의 책임자가 손을 들고 서서 스튜디오 안에 있는 공모자인 자신의 형제에게서 오는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풀 사이즈로 된 오르간으로 D장조의 음계를 연주하기 위하여 부츠를 신고 기다린다고 생각해 보시오!' 이처럼 녹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았던 노대가까지도 심각한 무력감에 빠지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전(戰前) 세대의 연주가들이 느꼈던 녹음 혐오증에는 78회전 시대 녹음 기술의 한계가 크게 작용했다. 1925년 음향 에너지를 전기 신호로 변환하는 마이크가 등장하면서 녹음 기술은 음악 녹음에 필요한 주파수 대역의 상당 부분을 수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셀락 디스크의 표면 잡음이나 마이크의 특성․감도 문제, 디스크의 수록 시간 등과 같은 기술적인 문제로 인하여 연주를 있는 그대로 수록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파데레프스키는 이러한 측면 때문에 녹음 작업을 혐오했던 연주가였다. '폭이 대단히 넓으면서도 술술 풀려 나오는 듯한 다이내믹'을 구사했던 그의 음악을 그 당시의 녹음 장치가 제대로 소화해 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 결과 그는 표현의 스케일을 줄여서 연주를 해야 했고, 녹음 장비는 그러한 표현을 더욱 작게 줄여서 수록했던 것이다.

 

 

그리고 초기 스튜디오의 음침한 환경 또한 음악가들의 녹음 혐오증을 더욱 부추기는 것이었다. 특히 마스터 디스크의 표면을 입힌 왁스가 굳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높은 실내 온도를 유지했던 스튜디오는 연주가에게는 참기 어려운 곳이었다. 이럴 경우 악기의 조율이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지만, 이것 또한 녹음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처럼 열악했던 스튜디오 환경도 1940년대 후반 테이프 녹음과 함께 등장한 현대적 개념의 스튜디오와 함께 상당 부분 개선이 이루어졌지만, 이처럼 안락한 환경도 연주가들의 마이크 공포증을 크게 완화해 주지는 못했던 것 같다. 녹음에 알맞게 연주 스타일을 조정하는 미학 문제가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호그우드 같은 지휘자는 스튜디오에서 함께 작업하는 음악가들을 고의로 '속박'하고자 노력한다고 하면서, 그렇게 하는 이유는 라이브 연주에서 환호를 이끌어 내고 연주를 성공으로 이끄는 '난폭한 모험적 음악 해석'이나 '환상적인 카덴차' 등을 보여 주는 음악 해석이 음반을 반복하여 감상하는 과정에서 거의 대부분 식상한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에 따르면 일회성․순간성에 기반을 둔 음악 표현 방식은 반복 청취․영원성을 담보해 주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된다. 바로 여기서 대두되는 것이 바로 정확성의 문제였다. 1928년 BBC의 한 엔지니어는 마이크가 가지고 있는 '냉혹한 객관성'에 대하여 '시각적 매력으로 인하여 청감 상의 증거가 힘을 잃는 공공장소에서의 검열을 통과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민감한 전기 기구를 이용하여 연주를 사진처럼 재생해 보면 그 연주가 기교나 정교함을 얼마나 결여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주장은 음악이 필요로 하는 생동감과 정확성을 녹음에 담아내야 한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녹음 작업이 '연주에서 영감, 자유로움, 음표의 율동 또는 시적 감흥을 제거해 버린다' 라고 했던 부조니의 주장이나, '만약 당신이 음표를 잘못 연주하는 위험을 감수할 수 없다면, 당신이 연주하는 음표는 무의미한 것이 되기 쉽다' 라고 했던 클리포드 커즌의 주장을 생각해 본다면, 녹음에 무결점에 가까운 정확함과 자연스러움․열정․시적 영감 등등을 담는다는 것은 손쉽게 실현할 수 있는 목표가 아니었다.

 

 

냉철한 열정이 살아 숨쉬는 음악을 만들기 위하여

 

그러나 녹음이라는 새로운 기술적 환경에 자연스럽게 적응한 연주가들이 적지 않았던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스튜디오를 '태평스러운 곳'이라고 했던 제랄드 무어나, '녹음은 아주 쉬운 일이다. 스튜디오로 걸어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라고 했던 오페라 가수 잔 피어스 같은 연주가들이 그들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전전 세대 가운데서도 스튜디오를 거부하지 않았던 음악가들이 상당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라흐마니노프, 크라이슬러, 샬리아핀, 슈나벨 등등이 그들이었다. 이들 가운데서 예술적 완성도를 위하여 반복되는 녹음 작업도 마다하지 않았던 라흐마니노프를 제외하고 보면, 이들 대부분은 녹음 자체를 사무적인 스타일로 처리하는 연주가들이었다.

 

 

그런 반면 카잘스나 토스카니니 같은 다소 예외적인 음악가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녹음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스튜디오 안에서는 마이크의 존재 자체를 아예 무시해 버리는 사람들이었다. 바비롤리에게서 '저 사람은 아직도 자신이 젊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것 같군' 같은 말까지 들었던 토스카니니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는 언급하지 않겠지만, 카잘스는 녹음 작업에서 동일한 작품을 매번 전혀 다른 해석으로 연주를 하여, 편집 작업을 하는 엔지니어들을 곤란에 빠뜨렸던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녹음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는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처럼 보인다.

 

그러나 녹음에서 진가를 나타냈던 사람들은 카라얀, 칼라스, 솔티, 번스타인, 피셔-디스카우, 굴드, 프레빈 등등과 같은 전후(戰後) 세대의 음악가들이었다. 이 가운데서 1950년대 중반 이후 최고의 레코딩 아티스트로 군림했던 카라얀은 미셀 글로츠와 귄터 헤르만스와 같은 전담 엔지니어로 구성된 팀을 이끌면서 음반 제작의 전 과정을 직접 통제했던 최초의 음악가였다. 그가 세상을 뜬 지도 상당한 시일이 지난 현재까지도 그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평가가 엇갈리고 있지만, 그가 녹음에서 거두었던 성공만큼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한 마디로 그는 음악과 녹음 사이의 복잡한 상관관계에 대하여 최초의 기준을 세웠던 음악가였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클래식 음악을 철저하게 통속화․상업화해 버리는 치명적인 대가를 지불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데카에서 바그너의 '반지' 전곡을 지휘함으로써 대가의 반열에 올라섰던 솔티와, 1953년 월터 레그와 관계를 맺은 이래로 24년 동안 최고의 소프라노로 군림했던 칼라스 같은 음악가는 대단히 특별한 존재였다. 이들이 녹음에서 거두었던 성과는 EMI의 월터 레그나 데카의 존 컬쇼 등이 제기한 혁신적인 음향 개념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이었지만, 이들은 라이브 연주와 녹음 연주 사이의 차이점을 극명하게 보여 주었던 것이다.

 

이 가운데서 이 문제와 관련하여 칼라스는 이들 두 스타일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는 음악가였다. 그녀는 '실제 청중을 앞에 둔 무대에서도 대단히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만, 스튜디오 녹음에서는 보다 정교한 뉘앙스 표현과 정제된 세부 표현을 해야 한다' 라고 말했던 것이다. 전기 작가인 위르겐 케스팅은 그녀가 1930년대 이후 사라졌던 오래된 벨칸토 전통과 현대적인 감각을 완벽하게 결합해 냈다고 말한 바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현대적인 감각이란 1950년대 이후 성립된 녹음 개념, 즉 '무대가 존재하지 않는 음악 극장' 또는 스테레오 음향으로 강력하게 표현되는 '가상 공간'에 적합한 연주 스타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피셔-디스카우 또한 스튜디오를 안방처럼 생각했던 음악가였다. 그의 반주자였던 제랄드 무어는 그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다. 녹음을 시작하려고 하면, 그는 마이크 앞으로 다가서서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고 엔지니어에게 말을 한 다음 곧장 연주를 시작했는데, 이 때 '부저 소리나 빨간 불빛 때문에 호들갑을 떨거나 우물쭈물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노래를 다 부르고 나면 그는 자신의 반주자와 짤막한 논의하고 난 다음 마이크를 통하여 제작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두 군데를 고쳐야겠군요. 저는 스물 넷째 마디에서 마흔째 마디까지 반복하고 싶은데, 무어 씨는 후주부(Nachspiel)를 반복했으면 하시는군요. 새로운 테이크를 다 녹음한 다음 전체 노래와 교정된 것을 우리에게 들려주시면 좋겠군요.' 이 녹음의 제작자가 바로 EMI를 쥐락펴락 했던 월터 레그였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젊은 가수가 그에게 이러한 주장을 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지만, 어쨌든 이 이야기는 녹음 작업에 대한 전후(戰後) 세대의 태도를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지금까지 19세기 후반 등장한 녹음에 대하여 음악가들이 보였던 다양한 태도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제는 어린아이조차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녹음이지만, 최고의 음악을 녹음해야 했던 음악가들에게 있어서 녹음은 음악가들을 편안한 상태로 이끌어 주는 매체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음악에 대한 새로운 지각 방식, 영원한 기록에 대한 부담감, 새로운 매체가 필요로 했던 음악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새로운 연주 스타일 등등과 같은 심각하고 복잡한 문제가 녹음 그 자체에서 야기되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러한 현상 자체가 철저하게 20세기적인 것이었지만, 녹음을 하면서 음악가들이 당면했던 이러한 문제들은 요셉 호프만이 최초의 클래식 음악을 녹음했던 1887년부터 지금까지도 음악가들에게는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