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수2011-09-09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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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와 악마, 그 누구도 선택할 수 없었던…
차이코프스키의 연인들, 우울증, 그리고 죽음
세상을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커다란 분수령을 맞이하는 시기가 찾아오는 법이다. 차이코프스키에게는 1877년이 운명의 해였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그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두 명의 여성이 등장했다. 안토니나 이바노브 밀류브코바와 나데주다 폰 메크 부인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의 인생에서 이들이 연기한 배역은 극과 극으로 달랐다. 차이코프스키보다 아홉 살 연하인 안토니나가 아내라는 이름을 가진 악마의 모습으로 찾아 왔다면, 그보다 아홉 살 연상인 나데주다는 때로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풀고 받아 주는 어머니 같은 인자한 모습으로, 때로는 세상사와 예술에 대하여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영혼의 벗으로, 때로는 이 세상 누구보다 서로 아끼고 사랑했지만 편지를 통해서만 만남을 이어갔던 환상의 연인으로 다가왔다. 나데주다야 말로 일평생 우울증에 시달리면서 신경쇠약으로 고생했던 그의 인생을 지켜 준 수호천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14년 동안 계속되던 이들의 관계가 편지 한 통에 하루아침에 종말을 고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1877년 당시 차이코프스키는 교수로 재직한 지 10년을 맞이하는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교육 경력을 한창 쌓아가고 있었고, 작곡가의 입지도 다져가고 있었다. 스물아홉 살 되던 해인 1869년에는 <로미오와 줄리엣> 서곡, 그 이듬해에는 ‘안단테 칸타빌레’로 잘 알려진 현악4중주 제1번, 1873년에는 현악4중주 제2번 등을 작곡했고, 1874년에는 그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린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을 내놓았고 1876년에는 또 다른 대표작 <백조의 호수>와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를 작곡했고, 그리고 1877년에는 오페라 <예프게니 오네긴>과 제4번 교향곡 작곡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시대를 서서히 열어가고 있었다.
악마는 아내라는 옷을 입는다
창작과 달리 당시 그의 개인사는 비극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협박에 가까운 밀류브코바의 강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심한 결혼식을 사흘 앞둔 1877년 7월 15일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그는 이런 글을 남긴다.
“결혼에 대해서라면 타고난 혐오감을 갖고 있는 서른일곱 살이나 된 제가 갑자기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무리하게 결혼하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지요. 저의 양심은 깨끗합니다. 달리 어찌할 방도가 없기 때문에, 현 상황이 제게 요구하는 사랑 없는 결혼을 하려고 합니다.” [이 글에서 인용하는 그의 편지 대부분은 에버렛 헬름이 쓴 『차이코프스키』(윤태원 옮김, 한길사, 1998)에 크게 의지하고 있다]
“결혼에 대해서라면 타고난 혐오감을 갖고 있는 서른일곱 살이나 된 제가 갑자기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무리하게 결혼하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지요. 저의 양심은 깨끗합니다. 달리 어찌할 방도가 없기 때문에, 현 상황이 제게 요구하는 사랑 없는 결혼을 하려고 합니다.” [이 글에서 인용하는 그의 편지 대부분은 에버렛 헬름이 쓴 『차이코프스키』(윤태원 옮김, 한길사, 1998)에 크게 의지하고 있다]
그의 인생에서 결혼이 이슈가 된 것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1868년 당시 스물여덟 살이었던 차이코프스키는 소프라노 가수인 데지레 아르토와 연인 관계를 맺으면서 그녀와 결혼할 결심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르토의 배신으로 인하여 이들의 관계는 얼마 되지 않아 파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9년이 지난 후 등장한 새로운 혼담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흘러갔다. 애정 없는 결혼이라는 상식 밖의 주제가 등장했던 것이다.
1877년 7월 18일 거행된 결혼이 그의 인생 최악의 패착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모스크바 음악원 학생 시절 자신을 짝사랑했던 제자와의 결혼 생활은 신혼여행 때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석 달 뒤에는 사실상의 파경 상태로 치달았다. 신혼여행에서 그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고백했고, 그의 아내 또한 이를 감수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당시 이들의 결별은 이미 초읽기에 들어간 상태였다.
안토니나와의 극심한 성격 차이를 견디지 못한 그는 8월 7일 도망치듯 카멘카로 여행을 떠나서 냉각기를 가져 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안토니나의 속물근성과 호색기질에 대한 혐오의 감정만 더 커질 뿐이었다. 그 결과 모스크바로 돌아온 3주 후 그는 한밤중에 집을 뛰쳐나가 모스크바 강에서 자살을 기도했지만 그것도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집에 돌아온 그는 아내에게 밤낚시를 하다가 물에 빠졌다고 둘러댔지만, 이후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며 병석에 눕고 말았고, 적당한 핑계를 아내에게 둘러대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난 후 다시는 그녀를 찾지 않았다. 이후 이들은 법률상의 혼인 관계만 지속하였는데, 이후 안토니나는 수시로 차이코프스키에게서 생활비를 받았으며, 그가 세상을 뜨기 3년 전인 1890년까지 그를 괴롭혔다.
안토니나와의 극심한 성격 차이를 견디지 못한 그는 8월 7일 도망치듯 카멘카로 여행을 떠나서 냉각기를 가져 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안토니나의 속물근성과 호색기질에 대한 혐오의 감정만 더 커질 뿐이었다. 그 결과 모스크바로 돌아온 3주 후 그는 한밤중에 집을 뛰쳐나가 모스크바 강에서 자살을 기도했지만 그것도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집에 돌아온 그는 아내에게 밤낚시를 하다가 물에 빠졌다고 둘러댔지만, 이후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며 병석에 눕고 말았고, 적당한 핑계를 아내에게 둘러대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난 후 다시는 그녀를 찾지 않았다. 이후 이들은 법률상의 혼인 관계만 지속하였는데, 이후 안토니나는 수시로 차이코프스키에게서 생활비를 받았으며, 그가 세상을 뜨기 3년 전인 1890년까지 그를 괴롭혔다.
천사 같은, 어머니 같은, 연인 같은, 그러나…
이 시기를 전후하여 그와 급속도로 가까워졌던 여인이 나데주다 폰 메크 부인이었다. 1876년 남편이 세상을 떴을 당시 45세였던 그녀는 이미 열한 명의 자녀를 슬하에 두고 있었고, 엄청난 재산을 소유한 러시아 당대의 부호(富豪)였으며, 음악 소양도 풍부한 여성으로서 당시 예술 후원자를 자임하는 인물이었다.
당초 이들의 관계는 부유한 예술 애호가와 가난한 음악가의 호의적인 만남으로 출발하였다. 1876년 후반 그녀는 자신이 의뢰한 바이올린 소품에 대한 감사의 편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차이코프스키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그녀가 차이코프스키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는 것은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녀의 재정 지원 덕택으로 차이코프스키는 1878년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직을 버리고 작곡 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었으며, 20대 초반 법률학교를 졸업하고 공직생활을 하면서 누렸던 호화로운 생활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매년 6,000루블이라는 엄청난 액수의 돈을 차이코프스키에게 연금으로 지급했던 것이다.
이들의 관계는 날이 갈수록 복잡 미묘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녀가 제시한 독특한 교제 조건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1877년 3월에 보낸 편지에서 폰 메크 부인은 “현재의 내 기분은 멀리 떨어져서 당신을 생각하고 당신의 음악 속에서 당신을 찾는 것에 만족하고 싶습니다”라고 쓰면서, 자신과 차이코프스키가 면대(面對)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달했고, 그 또한 이 제안을 수용했던 것이다. 실제로 이들 두 사람은 1879년 브라일로프의 산책로에서 만났지만 아무 말도 나누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이들은 이후 14년 동안 무려 1,200여 통에 달하는 서신을 교환하면서, 우정과 사랑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특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곰곰 따져 보면 부유한 미망인과 동성애 취향 때문에 결혼 생활을 지속할 수 없었던 가난한 예술가가 맺어가는 이러한 만남은 양자 모두 손해 볼 것이 없는 거래였다. 각자의 품위를 지키면서도 서로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이상적인 관계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데주다는 차이코프스키에게 재정 후원자이자 심리상담가였고, 심리적 안정을 안겨주는 어머니나 손위누이 같은 존재였으며, 대인기피증으로 인한 공포와 외로움을 달래는 영혼의 동반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14년에 걸친 이들의 관계도 그의 나이 50세 되던 해인 1890년 종말을 고한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서신 교환이 뜸해지면서, 이 해 9월 그녀는 더 이상의 재정 지원을 할 수 없다는 내용의 편지를 차이코프스키에게 보내고 그와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끊어 버렸던 것이다.
당초 이들의 관계는 부유한 예술 애호가와 가난한 음악가의 호의적인 만남으로 출발하였다. 1876년 후반 그녀는 자신이 의뢰한 바이올린 소품에 대한 감사의 편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차이코프스키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그녀가 차이코프스키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는 것은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녀의 재정 지원 덕택으로 차이코프스키는 1878년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직을 버리고 작곡 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었으며, 20대 초반 법률학교를 졸업하고 공직생활을 하면서 누렸던 호화로운 생활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매년 6,000루블이라는 엄청난 액수의 돈을 차이코프스키에게 연금으로 지급했던 것이다.
이들의 관계는 날이 갈수록 복잡 미묘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녀가 제시한 독특한 교제 조건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1877년 3월에 보낸 편지에서 폰 메크 부인은 “현재의 내 기분은 멀리 떨어져서 당신을 생각하고 당신의 음악 속에서 당신을 찾는 것에 만족하고 싶습니다”라고 쓰면서, 자신과 차이코프스키가 면대(面對)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달했고, 그 또한 이 제안을 수용했던 것이다. 실제로 이들 두 사람은 1879년 브라일로프의 산책로에서 만났지만 아무 말도 나누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이들은 이후 14년 동안 무려 1,200여 통에 달하는 서신을 교환하면서, 우정과 사랑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특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곰곰 따져 보면 부유한 미망인과 동성애 취향 때문에 결혼 생활을 지속할 수 없었던 가난한 예술가가 맺어가는 이러한 만남은 양자 모두 손해 볼 것이 없는 거래였다. 각자의 품위를 지키면서도 서로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이상적인 관계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데주다는 차이코프스키에게 재정 후원자이자 심리상담가였고, 심리적 안정을 안겨주는 어머니나 손위누이 같은 존재였으며, 대인기피증으로 인한 공포와 외로움을 달래는 영혼의 동반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14년에 걸친 이들의 관계도 그의 나이 50세 되던 해인 1890년 종말을 고한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서신 교환이 뜸해지면서, 이 해 9월 그녀는 더 이상의 재정 지원을 할 수 없다는 내용의 편지를 차이코프스키에게 보내고 그와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끊어 버렸던 것이다.
이 편지에서 폰 메크 부인은 연금 지급 중단에 대하여 자신이 파산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이를 알게 된 차이코프스키는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입고 분노로 치를 떨었고, 자신이 세상을 뜰 때가지 그녀를 저주했다. 한 사람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사랑이 그보다 더 격렬할 수 없는 불신과 증오로 바뀌는 극단적인 양면가치의 상황이 연출되었던 것이다.
위대한 음악 영혼에 깃든 음울한 진실
안토니나와의 파경과 나데주다와의 비정상적인 교제는 모두 차이코프스키 자신이 근본원인을 제공한 것이었다. 사실을 적시하면 이들 두 사건은 그의 동성애 성향 때문에 야기된 것이라고 해야 옳다. 그의 성(性) 취향이 그의 결혼 실패의 근본원인을 제공했다면, 비록 상대방의 제안을 받아들인 결과라고는 하지만, 외면상 ‘플라토닉 러브’를 구현한 듯한 폰 메크 부인과의 교제는 여성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차이코프스키 특유의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의 성(性) 취향을 부정하고 극복하기 위하여 무던히 노력했던 것 같다. 1876년 그는 자신의 동생 모데스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결혼하기 위하여 오늘부터 열심히 노력해 보기로 했다. 나의 행복을 위하여 가장 소중한, 그리고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장애가 되고 있는 나의 그 경향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전력을 다하여 그 경향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굵은 서체 필자)
여기서 그가 말하는 ‘그 경향’이란 표현이 무엇을 암시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렇게 보면 그의 자살 기도라는 최악의 결말로 치달았지만, 안토니나와의 결혼은 자신의 성 취향을 극복하기 위한 그의 노력이 현실로 나타난 결과였던 셈이다. 동성애를 죄악시하는 당시 사회의 분위기를 그 자신이 의식하지 않았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성애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그가 기울였던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던 것 같다. 최근 성 취향이 그의 죽음과 직접적인 인과관계에 있다는 주장이 세를 얻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그렇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여성과의 관계 설정에서 폰 메크 부인과의 교제 같은 비정상적인 방식에 그가 만족했던 이유를 설명하기도 그리 어렵지 않다. 이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그 이상의 차원에서 해석할 여지도 적지 않지만 말이다.
동성애 경향만큼 일생 동안 그를 괴롭혔던 내부의 적은 바로 우울증이었다. 그가 유난스러울 정도로 신경이 날카롭고 감성이 풍부했고, 어머니의 사랑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유년기를 보냈고, 청년기 이후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대인공포증, 피해망상증, 우울증 등에 시달렸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의 생활 태도 또한 검소함․절제와는 거리가 먼 것이 사실이었다. 실제로 그는 1861년 자신의 여동생 샤샤에게 보낸 편지에서 “너도 알다시피 나에게 결점이 있잖니. 나는 돈을 조금만 가지고 있어도 유흥비로 다 써버리지 않니. 물론 이러한 행동이 아주 상스럽고 현명치 못하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내 성격 탓인 걸 어떻게 하겠니…”
무절제한 생활 습관까지 질병으로 보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기 힘들 정도로 극도로 신경이 예민하고, 외부의 자극에 대하여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대응하며, 때때로 까닭 없이 침울함에 빠지고 발작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모습은 단순히 그가 여린 심성의 소유자였기 때문만은 아닐 수도 있다고 정신과 전문의들은 설명하고 있다. 이들 증상은 그가 정동장애(affective disorder)로 불리는 우울증과 조증(躁症)과 같은 기능성정신병을 앓고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는 것이 전문의들의 주장이다.
유명 작곡가들의 사인을 분석한 저서 『모차르트의 귀』(음악세계, 2000)에서 법의학자 문국진 교수는 정신과 전문의 포 뮤렌달 박사의 연구를 인용하여 ‘차이코프스키가 26세에서 52세에 이르는 26년 동안 총 12회의 우울병기(期)가 있었다’고 하며, 이와 함께 ‘자율신경의 이상증상’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 결과 ‘그는 신경질과 히스테리가 발작적으로 나타났으며, 주기적으로 두통․위장 장애․신경쇠약 등이 나타날 때마다 침대에 누워 안정제를 먹었다’고 전하고 있다. 전기 작가인 허버트 와인스톡은 차이코프스키에게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심리적 위기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환각과 병적인 불안 상태는 그에게는 거친 현실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으며, 그를 항상 공포 속에 몰아넣었다. 분명히 그는 신경쇠약 환자였던 것이다. 그가 동성애자였으며 그 때문에 불행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기정사실들과 여러 암시들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그의 정신적 동요와 정신착락의 근본적인 원인은 성욕 억제라는 힘든 일과 타인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사랑하려는 헛된 시도, 그리고 악의에 찬 냉혹한 사람들이 그의 숨겨진 성격과 본래의 호색적인 취향을 발견해 낼지도 모른다는 끊임없는 공포에 있었다.”
그럼에도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의 성(性) 취향을 부정하고 극복하기 위하여 무던히 노력했던 것 같다. 1876년 그는 자신의 동생 모데스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결혼하기 위하여 오늘부터 열심히 노력해 보기로 했다. 나의 행복을 위하여 가장 소중한, 그리고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장애가 되고 있는 나의 그 경향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전력을 다하여 그 경향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굵은 서체 필자)
여기서 그가 말하는 ‘그 경향’이란 표현이 무엇을 암시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렇게 보면 그의 자살 기도라는 최악의 결말로 치달았지만, 안토니나와의 결혼은 자신의 성 취향을 극복하기 위한 그의 노력이 현실로 나타난 결과였던 셈이다. 동성애를 죄악시하는 당시 사회의 분위기를 그 자신이 의식하지 않았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성애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그가 기울였던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던 것 같다. 최근 성 취향이 그의 죽음과 직접적인 인과관계에 있다는 주장이 세를 얻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그렇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여성과의 관계 설정에서 폰 메크 부인과의 교제 같은 비정상적인 방식에 그가 만족했던 이유를 설명하기도 그리 어렵지 않다. 이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그 이상의 차원에서 해석할 여지도 적지 않지만 말이다.
동성애 경향만큼 일생 동안 그를 괴롭혔던 내부의 적은 바로 우울증이었다. 그가 유난스러울 정도로 신경이 날카롭고 감성이 풍부했고, 어머니의 사랑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유년기를 보냈고, 청년기 이후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대인공포증, 피해망상증, 우울증 등에 시달렸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의 생활 태도 또한 검소함․절제와는 거리가 먼 것이 사실이었다. 실제로 그는 1861년 자신의 여동생 샤샤에게 보낸 편지에서 “너도 알다시피 나에게 결점이 있잖니. 나는 돈을 조금만 가지고 있어도 유흥비로 다 써버리지 않니. 물론 이러한 행동이 아주 상스럽고 현명치 못하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내 성격 탓인 걸 어떻게 하겠니…”
무절제한 생활 습관까지 질병으로 보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기 힘들 정도로 극도로 신경이 예민하고, 외부의 자극에 대하여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대응하며, 때때로 까닭 없이 침울함에 빠지고 발작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모습은 단순히 그가 여린 심성의 소유자였기 때문만은 아닐 수도 있다고 정신과 전문의들은 설명하고 있다. 이들 증상은 그가 정동장애(affective disorder)로 불리는 우울증과 조증(躁症)과 같은 기능성정신병을 앓고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는 것이 전문의들의 주장이다.
유명 작곡가들의 사인을 분석한 저서 『모차르트의 귀』(음악세계, 2000)에서 법의학자 문국진 교수는 정신과 전문의 포 뮤렌달 박사의 연구를 인용하여 ‘차이코프스키가 26세에서 52세에 이르는 26년 동안 총 12회의 우울병기(期)가 있었다’고 하며, 이와 함께 ‘자율신경의 이상증상’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 결과 ‘그는 신경질과 히스테리가 발작적으로 나타났으며, 주기적으로 두통․위장 장애․신경쇠약 등이 나타날 때마다 침대에 누워 안정제를 먹었다’고 전하고 있다. 전기 작가인 허버트 와인스톡은 차이코프스키에게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심리적 위기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환각과 병적인 불안 상태는 그에게는 거친 현실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으며, 그를 항상 공포 속에 몰아넣었다. 분명히 그는 신경쇠약 환자였던 것이다. 그가 동성애자였으며 그 때문에 불행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기정사실들과 여러 암시들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그의 정신적 동요와 정신착락의 근본적인 원인은 성욕 억제라는 힘든 일과 타인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사랑하려는 헛된 시도, 그리고 악의에 찬 냉혹한 사람들이 그의 숨겨진 성격과 본래의 호색적인 취향을 발견해 낼지도 모른다는 끊임없는 공포에 있었다.”
와인스톡의 설명에 따른다면 결국 차이코프스키의 문제는 동성애의 문제로 귀착되고 만다. 그렇다면 그의 동성애 취향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이에 대하여 문국진 교수는 차이코프스키가 유년기 보여 준 어머니에 대한 강한 집착에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나이 열 살 때인 1850년 법률학교의 예비과정에 입학하기 위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왔다가 어머니와 이별하면서 그가 경험한 엄청난 충격은 ‘영구적인 쇼크가 되어 차이코프스키의 일생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어머니 이외의 여성에 대한 사랑을 숙명적으로 거부하는 계기로 작용한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설명을 붙이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성향을 굳힌 결정적인 계기로 그가 14세 되던 해인 1854년 콜레라로 인한 어머니의 사망을 꼽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동성애를 질병으로 볼 것인지 여부가 아니다. 그보다는 차이코프스키의 시대에도 동성애는 여전히 죄악시되는 금기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최근에는 그 자신이 그 금기를 깼기 때문에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그는 자신의 여동생 샤샤의 아들, 그러니까 자신의 조카 블라디미르 다비도프에게 연정을 느끼게 되면서 크게 괴로워했다고 한다. 그리고 최근 밝혀진 바에 따르면 러시아 왕실과 관계가 있는 스텐복크 페르모 공작의 어린 조카와도 실제 동성애 관계에 있었는데, 바로 이것이 그의 죽음을 불러오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한다.
그의 공식 사인(死因)은 1893년 11월 1일 상트페테르부르크 호텔에서 끓이지 않은 물을 마시다가 콜레라에 걸려 11월 6일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스텐복크 페르모 공작의 조카와 벌인 동성애를 인지한 공작 자신이 검찰에 소장을 제출하는 사태로 치닫자, 고위 공직자들이 이 사건을 조용히 처리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명예재판을 열어 차이코프스키에게 명예를 지킬 수 있는 길을 터주지만 죄를 인정하고 자살하라는 판결을 내렸고, 그에 따라 독극물을 먹고 자살했다는 것이 그의 사인에 대한 최근의 연구 결과이다. 이에 대하여 문국진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사망 직전에 차이코프스키가 보인 증상들을 꼼꼼히 살펴본 뒤 그의 사망은 비소 중독에 의한 것이었다고 결론을 내린 바 있다.
지금까지 차이코프스키의 인생 속에 등장한 여성들, 그리고 일평생 그를 괴롭혔던 우울증, 성(性) 취향, 그리고 죽음에 얽힌 비화 등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상의 논의에서도 밝혀진 것처럼 그가 위대한 작곡가였다는 점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리 행복한 인생을 살다간 인물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일평생 그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내면의 갈등을 자신의 가슴에 보듬고 살아가야 했던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이처럼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던 인물이 그처럼 위대한 작곡가가 되었다는 사실에 놀랄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일평생 그를 괴롭히는 심리의 위기 속에서 그가 한시도 버릴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음악이었음을 떠올린다면, 음악은 그 내면 풍경을 비추는 거울인 동시에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그 자신의 언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구사하는 언어는 아주 특별한 것이었다. 그의 내면에 숨어 있는 고통과 갈등을 그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게 그려내는, 그리하여 온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아주 특별한 언어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동성애를 질병으로 볼 것인지 여부가 아니다. 그보다는 차이코프스키의 시대에도 동성애는 여전히 죄악시되는 금기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최근에는 그 자신이 그 금기를 깼기 때문에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그는 자신의 여동생 샤샤의 아들, 그러니까 자신의 조카 블라디미르 다비도프에게 연정을 느끼게 되면서 크게 괴로워했다고 한다. 그리고 최근 밝혀진 바에 따르면 러시아 왕실과 관계가 있는 스텐복크 페르모 공작의 어린 조카와도 실제 동성애 관계에 있었는데, 바로 이것이 그의 죽음을 불러오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한다.
그의 공식 사인(死因)은 1893년 11월 1일 상트페테르부르크 호텔에서 끓이지 않은 물을 마시다가 콜레라에 걸려 11월 6일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스텐복크 페르모 공작의 조카와 벌인 동성애를 인지한 공작 자신이 검찰에 소장을 제출하는 사태로 치닫자, 고위 공직자들이 이 사건을 조용히 처리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명예재판을 열어 차이코프스키에게 명예를 지킬 수 있는 길을 터주지만 죄를 인정하고 자살하라는 판결을 내렸고, 그에 따라 독극물을 먹고 자살했다는 것이 그의 사인에 대한 최근의 연구 결과이다. 이에 대하여 문국진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사망 직전에 차이코프스키가 보인 증상들을 꼼꼼히 살펴본 뒤 그의 사망은 비소 중독에 의한 것이었다고 결론을 내린 바 있다.
지금까지 차이코프스키의 인생 속에 등장한 여성들, 그리고 일평생 그를 괴롭혔던 우울증, 성(性) 취향, 그리고 죽음에 얽힌 비화 등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상의 논의에서도 밝혀진 것처럼 그가 위대한 작곡가였다는 점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리 행복한 인생을 살다간 인물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일평생 그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내면의 갈등을 자신의 가슴에 보듬고 살아가야 했던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이처럼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던 인물이 그처럼 위대한 작곡가가 되었다는 사실에 놀랄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일평생 그를 괴롭히는 심리의 위기 속에서 그가 한시도 버릴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음악이었음을 떠올린다면, 음악은 그 내면 풍경을 비추는 거울인 동시에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그 자신의 언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구사하는 언어는 아주 특별한 것이었다. 그의 내면에 숨어 있는 고통과 갈등을 그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게 그려내는, 그리하여 온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아주 특별한 언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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