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음악, 음악가 이야기

바이올린의 황금기를 장식했던 숨겨진 보석들 - (2)미셸 오끌레어(Michele Auclair), 페터 리바(Peter Rybar)

by onekey 2024. 3. 1.
박제성2013-07-25 17:58
추천 38 댓글 0
 
20세기의 많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은 그 강렬한 개성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는 문화적, 경제적, 기술적 혜택을 누렸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는 자신의 실력과는 무관하게 교육과 후진양성에 매진하여 자신보다 더 나은 후배들을 길러내는데 전념했던 바이올리니스트들 또한 존재했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아우어의 제자였던 이졸데 멩게스나 예프렘 짐발리스트 같은 인물들이 그 좋은 예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 뛰어난 개성을 가지고 있었을 뿐더러, 느뵈와 같이 사고로 일찍 서거하지도, 래빈처럼 정신분열에 시달리지도, 부스타보처럼 세상에서 급격히 잊혀지지도 않았다.
 
예술가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심사숙고한 결정에 의해 화려한 무대를 뒤로 했지만, 그래도 그들은 자신의 재능을 교육이라는 분야에 쏟으며 자신의 이름을 역사의 한 페이지에 오롯이 새겨 넣었다.
 

프랑스의 향기, 미셸 오끌레어
 
미셸 오끌레어(Michele Auclair)는 1924년 11월 16일 파리에서 태어난(1930년생이라는 설도 있다) 여류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음악에 대해 열정적인 부모님 밑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네 살 때 베토벤의 크로이처 소나타를 듣고 처음으로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한 그녀는 후일 “지금도 마지막 악장을 듣노라면 어릴 때 받았던 느낌이 그대로 떠오릅니다”라고 술회했다.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여 쥘르 부셰리를 사사하며 음악적 완성도를 키워나갔다.
 
또한 자크 티보와 보리스 카민스키, 지네뜨 느뵈의 스승이었던 린느 탈뤼엘 등으로부터도 레슨을 받으며 프랑스 바이올린의 정수와 향기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특히 미셸 슈발베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숭배해 마지않았던 쥘르 부셰리(Jules Boucherit, 1877~1962)의 영향이 컸는데, 그는 티보와 더불어 파리 음악원 바이올린 파트의 상징적인 쌍두마차로서 오끌레어, 느뵈, 마뉴엘 로젱탈, 앙리 테미안카 등을 길러냈을 뿐더러, 늦은 나이에 40여년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 데니세 소리아노(Denise Soriano, 1916~2006)와 결혼하기도 했다. 티보와 카민스키도 그녀의 음악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그 외에 지휘자 샤를르 뮌시 또한 그녀의 인생을 바꾸어놓을 만한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1943년 오끌레어는 마그리트 롱 상(Prix Marguerite Long)과 자끄 티보 상을, 1945년에 제네바 국제 콩쿠르(Concours International de Geneve)에서 수상했고, 파리 해방 이후 영국 군대를 위한 순회 공연을 시작으로 약 25년 동안 콘서트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영광된 삶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특히 1945년 2월 4일 파리에서 샤를르 뮌쉬의 지휘와 파리 음악원 관현악단과의 협연으로 이루어진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K.216을 연주는 그녀에게 첫 번째 데뷔 연주회로서 모든 이들로부터 격찬을 받았고, 이후 유럽과 남미를 여행했으며 베를린 필을 포함한 수많은 1급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가졌다. 1951년에는 샤를르 뮌쉬가 이끄는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여 격찬을 받았고, 그녀의 재능에 감탄을 마지않았던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는 1958년 그녀를 소련으로 초대하여 키릴 콘드라신이 지휘하는 모스크바 필하모닉과 차이코프스키 협주곡을 협연하게끔 중개를 해주었다.
 
당시 리허설이 끝난 뒤 몇몇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그녀에게 다가와 ‘어떻게 연주에서 프랑스 악파의 분위기보다 러시아 악파의 분위기가 더 짙게 느껴지는가’에 대해 질문을 받았는데, 그녀는 자신이 보리스 카민스키의 제자인 것을 밝히자 오히려 러시아 연주자들이 더 당황했다고 한다. 그녀는 ‘여자 티보’로서 프랑스 바이올린의 근육질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했던 연주자임과 동시에 제정 러시아 시대부터 내려왔던 러시아 바이올린의 귀족적인 향기 또한 동시에 구사할 수 있었던 탁월한 거장이었다.
 
왼손에 약간의 문제가 발생하면서 더 이상 자신의 연주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화려한 연주회 무대를 뒤로 하고 60년대 이후 학교로 들어가버린 오끌레어는 1969년 이후 파리음악원의 수석 교수로 재직하면서 수많은 제자들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입상토록 지도한 위대한 스승으로 남게 되었다. 1990년대 초 파리 음악원을 정년퇴임하고 미국 뉴 잉글랜드 콘서바토리의 초빙교수로 재직하고 가끔씩 일본 도쿄의 도호 음악원의 객원교수직을 수행해왔다.
 
프랑스의 진정한 에스프리와 러시아의(아우어 악파의 그것이 아닌) 향취를 간직했던 그녀는 제자들에게는 ‘완벽주의자’의 이미지로 남아있다고 한다. 레슨 내내 말보로 담배를 연달아 피며 개인의 체형과 물리적 힘보다는 정신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혹독한 선생님의 이미지가 바로 오끌레어다.
 
“의사 교환과 예측의 예술적 재능, 확장의 예술적 재능, 기질, 해답을 찾아내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바로 진정한 해석가가 될 수 있는 요소들이다”라고 스스로 말한 것처럼, 그녀는 기술적인 문제만큼이나 인내심과 집중력, 무자비할 정도로 강도 높은 반복훈련을 요구했다. 오끌레어는 60년대 후반 이후 애호가들의 시야에서는 사라졌지만 교육자로서 꾸준히 활동한 공로로 1995년에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기도 했다.
 

현대 바이올린의 시인, 페터 리바

페터 리바(Peter Rybar)는 1913년 8월 29일 비엔나에서 태어난 20세기의 중요한 바이올리니스트이다. 콘서트 바이올리니스트이자 4중주단의 리더, 오케스트라의 리더, 지휘자, 교육자로 활동하며 바로크, 고전, 낭만, 현대를 모두 섭렵했던 그는 고전 레퍼토리를 낭만으로부터 구제한 한편 동유럽과 현대 바이올린 레퍼토리를 무관심으로부터 구출해낸 거장이었다.
 
부모는 모두 체코인으로서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각별한 교육과 보호를 받았고, 이후 프라하 국립 콘서바토리에 입학하여 요제프 수크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파리와 런던에서는 칼 플레쉬를 사사하며 자신의 연주력을 완성시켰다.
 
프라하 국립 콘서바토리 시절 그가 체코 4중주단의 제2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던 요제프 수크(현재 활동하는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수크의 아버지)로부터 체코의 현악 전통을 이어받았다. 그의 가녀린 듯 미세하게 떨리는 비브라토가 자아내는 묘한 향수감은 바로 이 시기에 습득된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 그는 여러 음악가들과 교분을 나눌 수 있었는데, 피아니스트 루돌프 피르쿠츠니(이후 에리카 모니리의 파트너로 활동)와 지휘자 발터 쥐스킨트, 라파엘 쿠벨릭 등과 음악세계를 공유했다.
 
이렇듯 체코 시절의 인연에 의해 파리 시절 체코 작곡가 브로니슬라프 마르티누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 이후 연주회와 레코딩을 통해 마르티누의 음악을 적극적으로 소개하게 된다. 한편 스트라빈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초연을 맡는 행운을 얻게 되어 유럽 전역에 그의 이름을 떨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직후부터 리바는 스위스의 빈터투르에 새로운 터전을 잡고 여기서 나머지 일생을 보내게 된다. 여기서 그는 바이올리니스트뿐만 아니라 빈터투르 4중주단과 빈터투르 교향악단의 리더, 콘서바토리의 교수로서 음악적 역량을 넓혀가게 된다.
 
전후 1952년 피아니스트 마르셀르 데펜(Marcelle Daeppen)과 결혼하여 듀오 리사이틀을 활동함과 동시에 에트빈 피셔, 빌헬름 박하우스 등과 리사이틀을 갖는 한편, 이 시기 클라라 하스킬과 역사적인 조우를 갖는다. 당시 리바는 하스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지만 그녀의 재능에 탄복한 뒤 더 많은 연주를 갖고 녹음까지 남기게 된다. 하스킬이 그뤼미오와 베스트 듀오를 이루었지만 그 이전에 이미 리바라는 최고의 파트너와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그는 솔리스트이자 앙상블리스트, 최고의 오케스트라 리더로서 유럽 전역의 페스티벌과 콘서트에 등장하게 된다.
 
바르톡, 스트라빈스키, 프로코피에프, 힌데미트, 오네게르, 마르티누의 작품들을 초연을 도맡은 한편 15회의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 연속 전곡 연주회와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를 순회하며 10회에 걸친 베토벤 3중 협주곡 연주회(피아노는 이트빈 피셔, 첼로는 안토니오 투사) 등을 마치며 명실상부한 유럽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등극한다.
 
1971년에는 볼프강 자발리쉬의 권유로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의 수석 바이올리니스트 자리를 수락하여 1980년까지 활동했고, 이후 은퇴하여 스위스 루가노 근처의 카슬라노에서 바이올린 페다고지를 열며 2002년 10월 4일 89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바이올린에 대한 애정을 한 번도 잃지 않았다. 예술과 삶 모두에서 영원히 존경받은 그는 시몬 골트베르크처럼 날카로운 혜안을 가진 신중한 개혁가였으며 동시에 헨릭 셰링(세 사람 모두 칼 플레쉬의 제자)과 같은 새로운 보수주의자였다.
 
 
오끌레어의 레코딩

1950년 오클레어는 미국의 마이너 레이블인 REMINGTON에서 쿠르트 워스(Kurt Woss)의 지휘로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과 빌헬름 로이브너(Wilhelm Loibner)의 지휘로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콜 니드라이(Kol Nidrei)를 녹음했다.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은 오클레어의 비투오소적인 재능과 천재적인 음색에 대한 감수성을 보여주는 명연으로서 러시아 연주자들도 부러워했던 그녀의 러시아적인 동시에 개성적인 표현력을 보여주고, 부르흐 협주곡은 짙고 농염한 음색과 표현력이 작품을 보다 사색적이며 극적인 스토리를 갖게끔 이끌어나간다.
 
한편 1953년에 녹음한 크라이슬러 작품집은 비할 바 없는 분위기와 신비로울 정도로 영롱한 음색이 솟구치는 마법적인 연주로서 한 번 들으면 그녀의 음색에 취해 좀처럼 빠져나올 수 없게끔 만드는 음반이다. 이들 세 음원은 그녀가 처음 왼손에 이상이 생긴 1958년 이전의 레코딩으로서 오끌레어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절대절명의 명반으로 손꼽히는데, 일본의 Green Door 레이블로 복각, CD로 발매되어 애호가들의 관심과 새로운 감동을 이끌어내고 있다.
 
이후 1958년 이후 조금씩 연주력에 문제를 제기할 당시 Philips에서 남긴 레코딩들 또한 오끌레어의 감수성과 음악성을 십분 느끼기에 무리가 없다. 현재 일본 Philips를 통해 석 장의 앨범이 발매되었는데, 로베르트 바그너가 이끄는 인스부르크 교향악단과 남긴 차이코프스키와 멘델스죤 협주곡(1963년 녹음), 네덜란드의 명지휘자 빌렘 반 오터루가 이끄는 빈 심포니커와 협연한 브람스 협주곡(1958년), 필립스 레이블 가운데 가장 화려한 음색과 단아한 매력을 발산하는 마르셀 꾸로가 이끄는 슈트트가르트 교향악단과의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4, 5번(1961년)이 그것이다.
 
아무래도 이 시기 오끌레어가 남긴 최고의 명연은 피아니스트 제네비에브 조이와 함께 녹음한 슈베르트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작품 전집으로서 슈베르트의 진솔함과 아름다운 선율미를 발산하며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오끌레어만의 성(城일)을 쌓은 역사적인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최근 일본 Erato를 통해 최근 재발매되었다.
 
1950년대 중반 역시 제네비에브 조이와 함께 녹음한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5번 ‘봄’ 또한 스타일과 음색에 있어서 독보적인 연주로서 일본 Einsatz Records를 통해 2007년 CD로 복각되었다. 이 외에 바르톡과 프로코피에프의 바이올린 소나타는 Coup d'Archet 레이블의 LP로, 레끌레어의 바이올린 협주곡 Op.10 No.6과 Op.7 No.6은 Ars Musica 레이블의 LP로 발매되었고, 저 전설적인 마리-끌레어 알랭의 오르간 반주(!)로 녹음한 바흐의 바이올린 소나타 앨범(Discophiles Francais) 역시 일본 도시바-EMI의 LP로 발매된 적이 있다.

1950년 오클레어는 미국의 마이너 레이블인 REMINGTON에서 쿠르트 워스(Kurt Woss)의 지휘로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과 빌헬름 로이브너(Wilhelm Loibner)의 지휘로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콜 니드라이(Kol Nidrei)를 녹음했다.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은 오클레어의 비투오소적인 재능과 천재적인 음색에 대한 감수성을 보여주는 명연으로서 러시아 연주자들도 부러워했던 그녀의 러시아적인 동시에 개성적인 표현력을 보여주고, 부르흐 협주곡은 짙고 농염한 음색과 표현력이 작품을 보다 사색적이며 극적인 스토리를 갖게끔 이끌어나간다.
 
한편 1953년에 녹음한 크라이슬러 작품집은 비할 바 없는 분위기와 신비로울 정도로 영롱한 음색이 솟구치는 마법적인 연주로서 한 번 들으면 그녀의 음색에 취해 좀처럼 빠져나올 수 없게끔 만드는 음반이다. 이들 세 음원은 그녀가 처음 왼손에 이상이 생긴 1958년 이전의 레코딩으로서 오끌레어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절대절명의 명반으로 손꼽히는데, 일본의 Green Door 레이블로 복각, CD로 발매되어 애호가들의 관심과 새로운 감동을 이끌어내고 있다.
 
이후 1958년 이후 조금씩 연주력에 문제를 제기할 당시 Philips에서 남긴 레코딩들 또한 오끌레어의 감수성과 음악성을 십분 느끼기에 무리가 없다. 현재 일본 Philips를 통해 석 장의 앨범이 발매되었는데, 로베르트 바그너가 이끄는 인스부르크 교향악단과 남긴 차이코프스키와 멘델스죤 협주곡(1963년 녹음), 네덜란드의 명지휘자 빌렘 반 오터루가 이끄는 빈 심포니커와 협연한 브람스 협주곡(1958년), 필립스 레이블 가운데 가장 화려한 음색과 단아한 매력을 발산하는 마르셀 꾸로가 이끄는 슈트트가르트 교향악단과의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4, 5번(1961년)이 그것이다.
 
아무래도 이 시기 오끌레어가 남긴 최고의 명연은 피아니스트 제네비에브 조이와 함께 녹음한 슈베르트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작품 전집으로서 슈베르트의 진솔함과 아름다운 선율미를 발산하며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오끌레어만의 성(城일)을 쌓은 역사적인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최근 일본 Erato를 통해 최근 재발매되었다.
 
1950년대 중반 역시 제네비에브 조이와 함께 녹음한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5번 ‘봄’ 또한 스타일과 음색에 있어서 독보적인 연주로서 일본 Einsatz Records를 통해 2007년 CD로 복각되었다. 이 외에 바르톡과 프로코피에프의 바이올린 소나타는 Coup d'Archet 레이블의 LP로, 레끌레어의 바이올린 협주곡 Op.10 No.6과 Op.7 No.6은 Ars Musica 레이블의 LP로 발매되었고, 저 전설적인 마리-끌레어 알랭의 오르간 반주(!)로 녹음한 바흐의 바이올린 소나타 앨범(Discophiles Francais) 역시 일본 도시바-EMI의 LP로 발매된 적이 있다.

 

페터 리바의 음반

리바는 많은 양의 음반을 남기지 않았고 더군다나 자신의 비르투오시티를 자랑하기 위한 소품집도 없지만, 그가 남긴 대표적인 음반들은 한결같이 중용의 미덕과 단아한 아름다움으로 가득차 있는 보물창고와도 같다. 우선 일본 Green Door를 통해 두 장의 음반을 만날 수 있는데, 하나는 한스 몰트카우가 이끄는 웨스트-오스트리아 라디오 교향악단과 협연한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다른 하나는 클레멘스 다힌덴이 이끄는 빈터투르 교향악단과의 비오티의 바이올린 협주곡 22번과 나르디니의 협주곡이 커플링된 음반이다.
 
정갈한 비브라토와 단호한 보잉, 내적 응축이 색다른 에너지를 샘솟게 하는 브람스 협주곡도 예부터 전설처럼 내려오는 명연이지만, 비오티야말로 리바의 명성과 전설을 가능케하는 명연 중의 명연으로 손꼽힌다. 한편 1950년대 중반 클라라 하스킬과 남긴 CD 두 장짜리 리사이틀 앨범(Andromeda)은 리바의 디스코그라피 가운데 첫 손에 꼽힌다. 리바 자신도 몹시 마음에 들어했다는 부조니 바이올린 소나타를 비롯하여 브람스 피아노 5중주, 모차르트 소나타 K454가 수록되어 있다.
 
한편 스위스의 Doron 레이블을 통해 50~60년대 녹음들이 많이 발매되어 있는데, 베토벤, 브람스, 골드마르크, 수크, 멘델스죤, 차이코프스키, 슈만, 시벨리우스의 협주곡이 발매되었다. 지금은 모두 폐반되어 구하기 어려운 형편이고, 이 가운데 스트라빈스키와 바흐의 협주곡 앨범만이 현재 유통되고 있다. 그리고 Telos 레이블에서 리바의 음반이 두 타이틀 발매되어있다. 하나는 부인인 마르셀 리바의 피아노 반주로 연주한 모차르트, 나르디니, 야나체크의 음악을 모은 두 장짜리 앨범, 다른 하나는 야샤 호렌슈타인 지휘의 마르티누의 듀오 콘체르탄테와 현악 4중주, 바이올린, 피아노, 타악기, 현악을 위한 실내 협주곡 등이 수록된 1940년대 레코딩이다.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분야에서도 그의 기량은 탁월하다. 동기생인 헨릭 셰링과 녹음한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 협주곡 BWV1043(Philips)은 음질과 연주 모두에서 최고의 완성도를 자랑하는, 칼 플레쉬 전통의 빛나는 바흐를 만날 수 있는 명연이고, 루이 카우프만과 함께 한 비발디의 두 대의 바이올린 협주곡 RV513(Naxos) 또한 소박하고 감미로운 음향으로 가득 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