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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음악가 이야기

바이올린의 황금기를 장식했던 숨겨진 보석들 - (3)미론 폴리아킨(Miron Borisovich Polyakin), 예프렘 짐발리스트(Efrem Zimbalist)

by onekey 2024. 3. 1.
박제성2013-08-19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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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바이올린 악파의 대부로 잘 알려져 추앙받는 레오폴드 아우어. 과연 그의 제자 가운데 하이페츠, 밀스타인만이 대표적인 스타였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미국으로 건너오지 않고 러시아에 남아 오이스트라흐가 등장하기 이전의 러시아를 대표했던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 미론 폴리아킨과 탁월한 연주실력을 뒤로하고 커티스 음악원에서 교육자로 명성을 쌓아나갔던 예프렘 짐발리스트 또한 결코 잊을 수 없는 스타임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러시아 바이올린의 전설, 미론 폴리아킨

미론 폴리아킨은 저 유명한 바이올린계의 대부 레오폴드 아우어가 일구어낸 아우어 사단 가운데에서 가장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던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다. 짧지만 부유했으며 파란만장했던 삶은 20세기 전반의 음악 예술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미론 보리소비치 폴리아킨(Miron Borisovich Polyakin)은 1895년 2월 12일 러시아 체르카시(Chercassy)의 한 음악가 가족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에 이미 재능 있는 지휘자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인 아버지로부터 바이올린 레슨을 받았다. 종종 아들과 함께 오페라를 보러가곤 했는데, 그 때마다 음악에 대한 놀라운 기억력과 이해에 놀라곤 했다고 한다.
 
한 번은 만취한 팀파니 연주자가 소년에게 자신의 파트를 연주해보라고 했는데, 놀랍게도 미론은 완벽하게 연주해냈던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바이올린을 연습했던 그는 일곱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교육을 계속 하기 위해 키에프로 유학을 떠났다. 학교의 선생이었던 N.V. 리젠코는 소년의 재능에 감동을 받아 더 나은 선생인 E.N.본소프스카야에게 보냈다. 11세에 그는 이미 차이코프스키와 베토벤, 멘델스죤과 브람스 협주곡을 완벽하게 연주할 수 있었다고 한다.
 
1908년 폴리아킨은 레오폴드 아우어의 클래스에 입학하기 위해 상트 페테르부르크 콘서바토리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학생들 가운데에는 피아스트로, 간젠, 하이페츠와 같은 신동들이 즐비했다. 1910년 학원 원장이었던 글라주노프는 그의 연주를 듣고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겼다. “믿기 어려울 정도의 연주. 완벽한 테크닉과 우아한 사운드...
 
성숙한 음악가로서 A급, 아니 화려하고 완벽한, 환상적인 A급!” 동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연주는 스승의 스타일과 많이 닮아있다고 한다. 완고하고 고집 센 기질을 가지고 있었던 아우어조차 유독 폴리아킨을 각별하게 대했다. 그는 이미 어릴 때부터 천재성과 예술성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게으름을 용서치 않고 무차별적인 연습을 시켰던 아우어를 충분히 만족시켰기 때문이다. 아우어는 이 소년의 음악에 대한 헌신과 사랑, 완벽을 향한 부단한 노력 등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론에게 있어서 아우어는 엄격한 선생이자 흉금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요, 부드럽게 보호해줄 수 있는 아버지였던 것이다.
 
13세부터 모스코바 콘서바토리에서 가진 솔로 콘서트부터 러시아 순회 연주회를 성공적으로 이끈 폴리아킨은 1918년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을 포함하여 4년 동안에 걸친 유럽 연주회에서 각광을 받았다.
 
이후 20대 초반 미국 연주회를 가지면서 이미 하이페츠, 엘만, 짐발리스트, 자이델 등이 이미 성공을 거둔 것에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색깔과 입지를 굳혔다. 1925년 미국에서 열린 월드 바이올린 콘테스트에서 1등을 한 뒤 소비에트로 돌아간 그는 레닌그라드 콘서바토리 교수로 임명된 이후 일종의 ‘우상’으로 승격하게 된다. 청중들은 그의 매혹적이면서도 남성적인 연주에 매료되었고, 특히 글라주노프 협주곡에 있어서(작곡가 또한 그의 해석에 신뢰를 보냈다) 절대적인 해석가로 자리매김한다.
 
한편 위대한 피아니스트 겐리히 네이가우스는 폴리아킨과 우정과 교분을 나누며 최강의 듀오 파트너로 오랜 동안 활동했는데, 이 시기에 바로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폴리아킨 스타일’이 완성되었다. 감정이 충만해있고 악보에 헌신적이며 매혹적인 감수성과 우아한 뉘앙스를 겸비한 그의 연주 스타일은 지극히 남성적인 저돌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러한 만큼 서정적인 패시지에서도 표현력이 풍부하다기보다는 보다 엄격한 울림이 강하게 드러나곤 했다.
 
그의 영광스러운 러시아의 비르투오시티는 1941년 때 이른 죽음으로 그 맥이 끊겼지만, 그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20세기 중반 이후의 풍요로운 러시아 바이올린계의 자양분이 되었다.
 
신대륙에 뿌리내린 러시아 예술가의 초상, 예프렘 짐발리스트
연주와 교육 양 면에서 폴리아킨에 버금가는 레오폴드 아우어의 또 다른 제자로 예프렘 짐발리스트(Efrem Zimbalist)를 손꼽을 수 있다. 1889년 4월 9일 러시아 로스토브에서 태어난 그는 로스토브 오페라단의 지휘자이자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아버지 알렉산더 짐발리스트로부터 어린 시절부터 음악 교육을 받았다.
 
1903년 가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입학하여 아우어의 클래스에 합류했고 1907년 졸업하면서 골드 메달과 루빈스타인 메달을 수상했다. 이후 이 젊은 바이올리니스트는 러시아 전역과 유럽을 순회공연하며 각광받기 시작했는데, 1907년 11월 7일 베를린 필하모닉과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베를린 데뷔를 가졌고 같은 해 12월 9일에는 런던, 1910년 1월에는 라이프찌히에서 글라주노프 협주곡으로 성공적인 무대를 가졌다.
 
아우어 악파의 단골 무대인 미국 데뷔는 1911년 10월 27일. 역시 글라주노프 협주곡으로 가졌는데, 보스턴 심포니와의 이날 협연은 동작품의 미국 초연무대이기도 했다. 그의 매력적인 스타일과 날카로운 통찰력, 까다로운 음악적 취향은 미국 청중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고, 이내 러시아로 돌아가지 않고 미국에 정착하기에 이른다.
 
1914년 6월 15일 스타급 소프라노인 알마 글룩(Alma Gluck, 1884-1938)과 결혼한 짐발리스트는 부인의 피아노 반주도 하고 때로는 하이페츠를 비롯한 많은 음악가들의 피아노 반주를 도맡았기도 했다. 한편 작곡가로서도 많은 작품을 작곡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C샵 단조 바이올린 협주곡(1947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초연), 바이올린 소나타(1926년 엠마뉴엘 베이의 반주로 카네기 홀에서 초연), 현악 4중주, 교항시 ‘다프니스와 클로에’, 오페레타 ‘허니듀’(1920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 오페라 ‘란다라(1956년 필라델피아 초연), 첼로 협주곡(1969년 초연), 가곡들, 그 외에 바이올린을 위한 수많은 편곡 소품들과 쇼피스들이 존재한다. 
 
거의 한 세기에 걸친 긴 캐리어를 자랑하는 짐발리스트는 미국은 물론 유럽과 호주, 동양을 여러번에 걸쳐 방문하며 전세계를 상대로 연주회를 가졌다. 특히 한국에는 1924년과 1935년 두 차례에 걸쳐 내한공연을 가졌다. 1928년 필라델피아의 커티스 음악원 바이올린 파트의 교수로, 1941년에는 학원장으로 임명되어 피아니스트 요제프 호프만의 뒤를 이어 이 음악원을 세계적인 수준의 학원으로 육성했고 1968년 은퇴할 때까지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오스카 슘스키와 펠릭스 슬래트킨을 비롯하여 일본 바이올린계의 수장인 히데타로 스즈키가 바로 그의 제자다.
 
1949년은 그가 연주자로서 은퇴를 한 해이지만, 그 이후로도 간간히 초대 손님으로서 이곳 저곳에 연주자로 얼굴을 비추곤 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1952년 메노티의 바이올린 협주곡 초연을 이끈 것을 꼽을 수 있다. 1943년 커티스 음악원의 설립자인 메리 루시즈 커티스 북과 두 번째로 결혼하고, 1970년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 네바다의 레노에 머물며 1985년 2월22일 세상을 뜰 때까지 거기서 지냈다.
 
짐발리스트는 아우어 악파의 명예로운 계승자보다는 완벽한 예술인의 초상으로 기억된다. 그의 연주는 잘 조절된 대담함과 장대한 보잉에 대한 훌륭한 감각으로 무장되어 있어 그의 독창적인 예술적 감수성 덕분에 ‘짐발리스티안(Zimbalistian)'이라는 새로운 그룹을 탄생시킬 정도였다. 아우어가 일구어낸 러시아 바이올린 악파라는 거대한 나무는 전 세계 바이올린 연주계의 이상이자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척박한 결방의 땅,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그 첫 씨앗이 뿌려졌고, 수 십 년이 지나 미국 커티스 음악원에서 예프렘 짐발리스트가 그 아름다운 열매를 수확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
 
폴리아킨의 음반
폴리아킨은 그 명성에 비해 거의 녹음을 남기지 못했다. 남아 있는 레코딩의 음질 또한 조약하기 이를 데 없어 더욱 안타까울 뿐이다.
 
20세기 초, 2차 대전 발발 이전 소련의 레코딩 기술은 빈약하기 이를 데 없었을 뿐더러 상업적 예술 형태의 첨단이었던 레코딩 산업이 공산주의 국가에서 활발하게 성장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CD 두 장 분량의 녹음만을 간신히 남길 수 있었던 폴리아킨은, 설상가상으로 멜로디아 한 장짜리 LP로 잠깐 선보인 이후 심포지움 레이블에서 약간의 트랙만이 선보였을 뿐, 폴리아킨의 이름은 거의 잊히다시피 했다. 그나마 러시아의 Classound라는 독립 레이블에서 CD 두 장 박스 Art of Miron Polyakin이라는 타이틀로 발매된 적이 있다. 외국 경매 사이트에서 장당 5만원이 넘는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을 만큼 그 수량도 적고 희귀하지만, 그래도 이렇게나마 폴리아킨이 우리시대에 다시 등장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격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녹음은 네이가우스와 함께 한 베토벤 ‘크로이처’ 1악장과 글라주노프 바이올린 협주곡 전곡이다. 지금까지 들어왔던 동곡의 다른 연주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를 보여주는 듯한 폴리아킨의 염력은 가히 전설 속의 연주자로 인정하기에 충분하다.
 
한편 아브람 디아코프의 반주로 베토벤 ‘크로이처’ 전곡, 멘델스죤 바이올린 협주곡 전곡이 주목할 만하고, 두나예프스키가 작곡한 베토벤 협주곡 카덴짜 부분,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1번과 20번, 차이코프스키의 명상과 멜로디, 우울한 왈츠, 크라이슬러와 사라사테의 소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1936년부터 1941년까지의 녹음으로서 조약한 음질 사이에서 찬연히 빛나는 폴리아킨의 바이올린 소리가 심어주는 깊은 감동의 무게감은 감히 형언하기 어렵다. 가장 쉽게 그의 음원을 감상할 수 있는 음반으로 APR에서 발매한 Auer Legacy Vol.III에는 그의 베토벤 ‘크로이처’와 슈베르트의 ‘감상적인 왈츠’가 수록되어 있다.
 
짐발리스트의 음반

그는 당대의 명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얀 쿠벨릭, 크라이슬러, 엘만, 하이페츠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최고의 연주가였던 만큼 미국 빅터사의 Red Seal을 통해 몇몇 음반을 녹음했다.
 
1912년부터 24년 사이 전기 녹음 이전인 어쿼스틱 녹음으로서, 현재 APR에서 발매된 Auer Legacy Vol.II에서 일부를, 일본 오퍼스 쿠라 레이블을 통해 발매된 Zimbalist Short Pieces를 통해 만날 수 있다. 당시 레파토리를 살펴보면 생생스의 ‘백조’, 고세크의 ‘가보트’, 쇼팽의 ‘강아지 왈츠’ ,포스터의 ‘올드 블랙 조’, 엘가의 ‘사랑의 인사’를 비롯하여 비네야프스키의 ‘전설’이나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20번과 21번을 감상할 수 있다.
 
흔치 않은 레파토리로서 막스 레거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Op. 42-2 안단티노 악장도 있다. 한편 짐발리스트의 이지적인 세련미를 느낄 수 있는 곡으로서 러시아 민요 ‘페테르부르크여 안녕’을 편곡한 글린카의 ‘종달새’와 미국 바이올리니스트인 알버트 스폴링이 ‘알라바마’, 짐발리스트가 직접 작곡한 ‘폴란드 무곡’과 ‘헤브루 멜로디’를 꼽을 수 있다.
 
짐발리스트의 연주는 동료였던 하이페츠가 열정적이고 초인적인 기교를 통해 음악을 지배하던 것과는 달리 거장풍의 장대한 스케일과 섬세한 디테일을 자랑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커티스 음악원에 재직하면서 레코딩을 거의 남기지 않아 보다 농익고 성숙한 음악세계를 확인하기가 무척 힘들다. 그러한 가운데 몇 가지 음반이 간신히 살아남아 짐발리스트의 냉철한 판단력과 풍윤한 멜로디 라인의 감촉을 만날 수 있어 아쉬움을 달랜다.
 
가장 먼저 프리츠 크라이슬러와 함께 한 바흐의 2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이 RCA에서 발매된 프리츠 크라이슬러 RCA 컴플리트 레코딩 박스에 수록되어 있고, 다른 하나로는 1946년 세르게이 쿠세비츠키가 이끄는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브람스 협주곡, 해리 카우프만 반주로 1930년에 녹음한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3번이 수록된 Doremi 음반이다. 이 두 CD는 짐발리스트의 독보적인 해석력과 개성적인 보잉, 날카로운 듯 찬연한 빛을 발산하는 음색이 어우러져 실로 고전적인 아름다움의 이상을 노래하는 명연 가운데 명연으로 손색이 없다.
 
한편 복각계의 명엔지니어 워트 마스톤에 의해 사라질 뻔 했던 짐발리스트의 조연자로서의 레코딩이 Maston 레이블을 통해 다시금 부활했다.
 
먼저 요제프 호프만 전집 Vol.5에 수록된 트랙. 호프만이 작곡한 '자장가'를 1935년경 호프만의 피아노 반주에 짐발리스트가 바이올린 연주한 듀오 버전이 그것이다. 아름답고 정겨운 음색이 매혹적으로서, 호프만이 연주한 솔로 버전 또한 수록되어 있어 두 개의 녹음을 비교감상할 수 있어 이채롭다.
 
그리고 짐발리스트의 첫 번째 부인인 알마 글룩 아리아 앨범에서 아내의 목소리에 맞추어 대화하는 바이올린 반주 및 피아노 반주를 맡은 음원이 존재한다. 이는 카루소 음반에서 미샤 엘만이 바이올린 서포트를 한 것에 비견할 만한 것으로서, 달콤하면서도 서정적인 바이올린 선율미가 듣는 이를 홀려버린다. 마지막으로 신기하게도 영상물 한 편이 남아있다. 해롤드 바우어의 피아노 반주로 베토벤의 크로이처를 연주한 것인데, 고전적이면서도 낭만적인 체취를 가득 머금고 있는 이 영상은 유튜브에서 검색하여 감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