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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음악가 이야기

바이올린의 황금기를 장식했던 숨겨진 보석들 - (5)프란츠 폰 벡세이(Franz Von Vecsey), 바샤 프리지호다(Vasa Prihoda)

by onekey 2024. 3. 1.
박제성2013-11-12 14:11
추천 42 댓글 0
 
냉정한 왕, 벡세이
 
프란츠 폰 벡세이(Franz Von Vecsey)는 1893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유서 깊은 군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8세에 예뇌 후바이를 사사하며 본격적인 바이올린 수업을 받았는데 이미 열 살 때 풀 사이즈의 아마티 바이올린을 키며 자신의 천재성을 발휘했다. ‘후바이 비브라토’로 일컬어질 정도로 엄격한 테크닉과 예술적 감수성을 요구했던 후바이조차 자신이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판단하여 어린 벡세이를 요제프 요하임이 교장으로 있던 베를린 음대로 추천했다. 당시 요하임은 벡세이의 연주를 듣고 " 72년 동안 이 같은 음악은 처음 들어보았고, 이런 음악이 가능하다고도 결코 믿지 않았다"며 감탄의 감탄을 거듭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벡세이의 앨범에 “이 놀라운 재능을 타고난 아이에게 신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라는 문구를 적어주며 베를린 데뷔 무대를 직접 챙겼다.
 
아마도 벡세이만큼 20세기 초반 베를린을 뜨겁게 달군 바이올리니스트는 없었을 것이다. 열 살짜리 소년이 비네야프스키 협주곡 D장조를 연주하자 좌석에 앉아있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펠릭스 바인가르트너, 레오폴드 고도프스키, 프리츠 크라이슬러 등이 벌떡 일어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이날 보여준 청중들의 기립 박수 소리는 파가니니와 리스트 이래로 베를린에서는 결코 들어보지 못했을 정도로 열광적 수준이었다고 한다.
 
벡세이는 이후 요하임의 추천으로 아우어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페테르부르크로 떠났고 이곳에서 미샤 엘만과 절친한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아우어는 벡세이에게 최선을 다했고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었던지 영국 무대를 주선하기에 이른다. 
 
어린 백세이와 그의 스승인 요제프 요하임.
아마도 20세기 바이올리니스트 가운데 위대한 바이올린 스승 3인 모두에게 가르침을 받고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는 찬사를 받은 바이올리니스트는 벡세이가 유일무이할 것이다. 그는 런던에서 일약 슈퍼급 스타 대접을 받으며 ‘경이로운 천재’로 부상했다. 그의 정신적 지주였던 요하임이 1907년 세상을 떠난 뒤 리스트의 제자인 지오반니 스감바티, 크라라 슈만의 제자 칼 프리드베르크, 부조니 제자인 귀도 아고스티와 함께 파트너로 활동했는데, 특히 이탈리아에서 경이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1910년 시벨리우스로부터 바이올린 협주곡을 헌정받은 그는 아르투르 니키쉬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과 이 곡을 연주하여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매 연주회마다 격찬의 격찬을 받았다. 1923년에는 이탈리아의 귀족 가문인 움브리안 가문의 영양 콘테사 줄리아 발데시를 만나 결혼, 그 때부터 이탈리아에 생활을 하게 된다. 
 
처음으로 행복함을 느끼게 된 벡세이는 귀족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사치와 호사를 누리며 이탈리아와 아내의 아름다움에 빠져들었다. 연주회 수는 급격히 줄었지만 20년대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여전히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다 1935년 베를린에서 연주회를 마친 뒤 이탈리아로 돌아와 탈장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한 후 색전증으로 고통 받다가 이내 사망했다. 그의 나이 겨우 마흔 둘이었다.
 
요하임으로부터 물려받은 오스트리아-독일 레파토리는 물론이려니와 아우어로부터의 러시아 레파토리, 후바이로부터의 동유럽 음악, 그리고 시벨리우스에 이르는 폭넓은 레파토리를 완벽하게 소화했던 그는 레코딩도 많이 남기지 않아 그 전설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벡세이가 하이페츠보다 뛰어나다고 단언했던 아우어의 말을 굳이 빌지 않더라도, 동시대의 니키쉬, 쿠벨릭, 티보, 자우어, 달베르, 파데레프스키 등 많은 연주자들은 벡세이에게 영광스러운 찬사를 보냈다는 사실로부터 그의 명성을 가늠할 수 있다.
 
벡세이의 음반
 
현재 구할 수 있는 벡세이의 음반은 Pearl에서 발매된 벡세이의 전기녹음집(GEMM CD 9498) 하나뿐일 것이다. 그는 명성에 비해 생전에 녹음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1930년대부터 독일 폴리도르와 체계적인 레코딩 플랜을 세웠지만 그의 사망으로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그나마 30년대 초에 남긴 몇몇 녹음들이 CD로 발매되어 벡세이의 전설적인 예술성을 조금이라도 확인할 수 있다.
 
냉정한 음색과 연약한 보잉이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깔끔한 음색과 끈질긴 비브라토가 묘한 향수감 혹은 생경스러운 스타일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벡세이가 직접 작곡, 연주한 차르다슈나 샹송 노스탈지아에서의 강렬한 개성은 특히 주목할 만하고 파가니니의 카프리스 13번에서 보여주는 완벽을 넘어선 경이로운 테크닉은 대단하다. 시벨리우스의 녹턴과 드뷔시의 조각배에서는 벡세이 특유의 냉정하면서도 흡인력 높은 음색은 감동적일 뿐만 아니라 아고스티와 함께 한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3번 전곡 연주는 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린 독창적인 연주라고 말할 수 있다.
 
바흐-빌헬미의 G선상의 아리아에서 묻어나오는 고급스러운 페이소스와 낭창낭창한 감미로움 또한 벡세이만이 표현할 수 있는 명대목이다. 폴리도르의 녹음들에서 벡세이는 감정을 조금 억누르며 작품의 구조와 테크닉에 집중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반면 1925년 독일 Vox에서의 녹음들은 보다 자유분방하고 개방적인 벡세이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 이채롭다. 특히 이 펄 음반에는 네 개의 트랙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슈베르트-빌헬미의 아베 마리아는 굵고 진한, 그리고 가늘고 여린, 창백하되 비상하는 듯한 고역 등 냉정하지만 다채로운 톤 칼라가 소름을 돋게끔 하고, 슈만의 트로이메라이 또한 우수 젖은 음색과 농염한 프레이징으로 호로비츠가 연주하는 트로이메라이에 필적할 만한 명연을 들려준다.
 
20년대와 30년대 녹음이 이토록 현격하게 변화했음으로 미루어 볼 때, 그가 십여 년만 더 생존했다면 어떤 경지의 음악을 들려주었을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빈을 점령한 체코인, 프리지호다
 
1900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보도나니에서 태어난 바샤 프리지호다(Vasa Prihoda)는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아버지를 따라 자연스럽게 악기를 접할 수 있었고, 여섯 살 때 공개 연주회를 가졌으며 8세에는 이미 베토벤과 브람스 협주곡을 비롯한 대표 고전 레파토리 대부분을 연주할 수 있었다.
 
10세에 프라하 콘서바토리에 입학하여 전설적인 체코 바이올리니스트인 얀 마르자크(Jan Marak, 1870~1932)를 사사했는데 그는 체코 현악 전통을 세운 안토닌 베네비츠(Antonon Bennewitz, 1883~1926)의 제자였다. 그는 프리지호다에게 엄청난 테크닉 기법과 더불어 음악적인 이해, 그리고 음색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전수했다. 이리하여 체코의 위대한 현악 전통은 오타카르 세프치크가 길러낸 얀 쿠벨릭과 마르자크가 아낀 프리지호다에게 이어지게 된다. 쿠벨릭은 유럽과 미국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20세기 초반 이후 급격히 쇠락하게 되었고, 이제 프리지호다만이 꿋꿋하게 살아남아 그 전통의 명맥을 이어나가게 되었다. 
그의 첫 이탈리아 순회 연주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해서 생계를 위해 억지로 밀라노의 카페에서 연주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것이 그에게 성공을 가져다 준 발판이 되었고, 더군다나 그의 연주를 들은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그의 팬이 되어버렸다. 프리지호다를 또 다른 파가니니라고 여겼던 토스카니니는 “파가니니가 연주를 잘했다고 하지만 프리지호다만큼은 아닐 것”이라고 그를 칭송했다. 그의 성원에 힘입어 1920년 1월부터 6월까지 무려 84회의 연주회를 가질 수 있었고, 이 업적은 급속도로 퍼져나가 이탈리아에서의 인기는 당시 1급 연주자였던 벡세이의 그것에 필적했다. 그 덕분에 제노바 박물관에 소장된 파가니니의 악기 ‘과르넬리 델 제수’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1930년대부터 그는 교사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36~38, 1941~43년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1944년까지 독일과 모나코 음악 아카데미에서도 활동했다. 현재 상대적으로 그의 이름이 덜 알려지게 된 이유로, 2차 대전시 나치 독일 영역인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했음을 꼽기도 한다. 어찌되었던 전후 프리지호다는 다시금 교육과 연주회를 병행하며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했다. 이후 1950년 빈 음악 아카데미 정식 교수로 임명되어 바이올린과 파트장이 되며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다. 1960년 7월 급작스러운 서거로 인해 그의 명성이 더 높아지는 것을 막았지만, 50년대 내내 그는 많은 연주회를 가지며 자신의 파가니니적 능력과 보헤미안적 기질을 마음껏 펼쳐냈다.
 
지금 그의 이름은 벡세이만큼이나 거의 잊히다시피 했지만, 그의 남성적인 에너지감과 뜨거운 비르투오시티는 이제는 화석화된 체코 전통의 생생한 기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가 남긴 소수의 레코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맹렬한 템포와 숨 가쁜 디테일, 환상적인 예술성은 파가니니의 재래라고 믿었던 토스카니니의 판단이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님을 반증한다.
 
 
프리지호다의 음반

프리지호다의 음반은 크게 세 가지 루트로 구할 수 있다. 영국 Pearl에서 발매된 음반(GEMM CD 9460)과 일본 Green Door에서 발매된 넉 장의 앨범(GDCS 0003~4, GDCL0019, GD2021), 마지막으로 워너-포니트에서 발매된 석 장짜리 앨범이 그것이다. 
 
Green Door 앨범을 살펴보면 두 장짜리 소품집이 가장 먼저 눈에 띄는데, 1923년부터 43년에 이르는 폭넓은 시기의 녹음들을 선별하여 수록한 만큼, 이것이 프리지호다의 다양한 측면을 담고 있는 그의 가장 훌륭한 앨범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에디슨과 폴리도르 오데온, 그라모폰 등의 음원을 수록하고 있는 이 앨범 가운데 27년에 피아노 반주로 녹음된 멘델스죤 협주곡 2악장과 3악장은 그의 예술성과 명인기적 테크닉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특히 3악장은 이토록 빠른 템포의 연주는 들어보지 못했을 정도로 광폭한데, 그 안에서도 섬세한 디테일과 낙차 큰 다이내믹을 컴퓨터처럼 짚어내는 모습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대표적인 레코딩이라고 말할 수 있는 R.슈트라우스 장미의 기사 왈츠 편곡과 사라사테의 찌고이네르바이젠은 우아함과 격정 모두를 자유자재로 뿜어내며 체코 특유의 흐느낌까지를 더하여 듣는 이의 오감을 곤두서게끔 한다.
 
바찌니의 요정의 론도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테크닉과 사라사테의 서주와 타란텔라의 태풍과도 같이 밀어붙이는 템포와 섬광처럼 지나가는 테크닉의 향연은 프리지호다의 이름 머리에 각인시키기에 충분하며, 심지어 귀여운 고섹의 가보트에서도 강렬한 개성과 단호한 어조가 빛을 발한다. 
 
엔니오 제레리 지휘와 토리노 방송교향악단의 연주로 녹음한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3,4번은 그가 단순한 테크니션이 아니라 엄격한 고전주의자이자 순수한 톤을 가진 멋진 연주자임을 역설하고, 파울 반 켐펜의 지휘와 베를린 국립 관현악단의 연주로 1943년에 녹음한 드보르작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체코의 정취와 예술적 분위기로 가득찬 레퍼런스급 연주다.
 
이탈리아 포니트-체트라에서 1956~57년 녹음한 음원들 역시 소중하다. 특히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 프랑코 노벨로와 함께 한 바흐의 2중 협주곡과 비탈리 샤콘느를 비롯한 비오티, 파가니니, 타르티니 등의 연주가 인상적이다.
 
펄에서 발매된 음반은 프리지호다의 베스트 앨범으로서 23년에 녹음된 비탈리 샤콘느와 파가니니 협주곡 1번 1악장을 비롯하여, 타르티니의 악마의 트릴과 사라사테의 찌고이네르바이젠, 장미의 기사 왈츠 등이 수록되어 있다. 몇몇 곡은 Green Door와 겹치기도 하지만, 프리지호다의 근육질적인 매력과 집요할 정도로 정제된 톤컬러가 초절명연으로 승화한 악마의 트릴이나 샤콘느는 이 음반에서만 만날 수 있는 희귀 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