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비급
아날로그가 부활을 지나 열풍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두세 개의 브랜드 제품만 인기를 끄는 브랜드 편식 현상이 심하다. 조금만 찾아보면 제대로 잘 만든 아날로그 명품들이 있는데도 가라드나 토렌스, 오토폰이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많은 아날로그 마니아들이 이름이 널리 알려진 제품만 찾다 보니 이 제품들은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에 거래된다. 아날로그의 저변을 확대하고 제한된 예산으로 보다 좋은 소리를 듣고자 하는 아날로그 마니아들을 위해 알려져 있지 않은 제품 중에서 좋은 소리를 내는 아날로그 명품을 소개하고자 한다.
여기에 소개하는 제품은 덜 알려진 탓에 구입하는 데 약간의 수고가 필요하지만 성능에 비해 가격은 저렴하다. 그동안 아날로그 생활을 하면서 무수히 많은 기기를 만져보고 직접 분해하고 조립하면서 알게 된 알토란같은 지식이다. 가까운 지인들끼리만 공유했던 것으로 시쳇말로 몰래 꼬불쳐두었던 내용이다. 주머니는 가볍지만 좀 더 좋은 소리를 듣고자 하는 열망은 누구 못지않은 아날로그 애호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Braun PS500
독일의 명품
브라운 PS500
재야에 숨어있는 고수를 만나 기회가 있었다. 고수의 작업실에는 PE는 물론이고 엘락, 듀얼, AR, NEAT 턴테이블이 즐비하다. 재야 고수 왈 “엘락이나 PE나 별반 다를 게 없는데······” 하면서 슬쩍 나를 떠본다. 내가 쓴 책 〈아날로그 즐거움〉에서 PE 턴테이블을 호평한 것을 지적하는 얘기다. “엘락 좋은 건 알고 있죠!”라고 응수하니 “이 턴테이블 한번 들어보셔” 하며 꺼내 들려준 턴테이블이 브라운 PS500이다. 브라운 제품이 다 그렇듯 지극히 현대적인 디자인과 깔끔한 만듦새를 보여준다. 재야 고수가 얼마 전에 우연히 구한 턴테이블인데, 소리를 들어보고 난 뒤에 엘락과 PE를 뒤로 물리고 메인으로 쓰게 되었다고 했다.
음악이 끝나자 브라운 턴테이블의 플래터를 들어내서 손가락 마디로 가볍게 두드리니 깡~ 하는 짧고 경쾌한 음이 울린다. 그리곤 말없이 플래터를 나에게 건넨다. 크기에 비해 묵직한 느낌의 플래터는 듀얼부터 엘락, PE로 이어지는 계보의 아연합금 재질이다. 플래터를 들어낸 곳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머문다. 모터가 아이들러를 돌리고 그 아이들러가 벨트로 서브 플래터를 돌리는 독특한 구조다. 아이들러와 벨트를 이중으로 사용하는 방식은 토렌스 124와 같은데 사용 순서가 반대다. 중간에 끼워진 풀리를 비스듬한 원통형으로 제작해 미세한 속도 조정이 가능하다. 최종적으로 플래터를 돌리는 것은 벨트이므로 토렌스 124보다 힘은 약해도 보다 균일한 회전을 얻을 수 있는 방식이다.
서브 플래터는 직경이 가는 스핀들 축 위에 얹어져 있고 그 위에 3kg에 달하는 플래터가 올라앉게 된다. 플래터와 톤암이 서브 섀시 위에 결합되어 플린스와 별도의 완충장치를 통해서 연결되어 있다. 쉽게 말해 플로팅 방식의 턴테이블이라는 얘기다.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해서 플래터를 손으로 살짝 누르니 부드럽게 움직인다. 손을 뗀 후에 한동안 출렁거릴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한번 움직이더니 바로 움직임을 멈춘다.
도대체 어떤 스프링을 사용해서 이렇게 동작하는지 궁금했다. 플로팅 턴테이블의 원조인 AR-XA의 플래터를 손으로 움직여 보면 한동안 출렁거림을 멈추지 않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스프링이 진동에너지를 흡수하지 못해서 한참을 계속 출렁거리는 것이다. 그런데 PS500은 한번 움직인 후 곧바로 출렁거림을 멈췄다. 완충장치에 진동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흡수하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얘기다. 내가 궁금해 하는 눈치를 보이자 고수는 빙그레 웃으면서 밑판을 열기 좋게 세로로 세우고는 일자 드라이버를 건네준다.
밑판을 열어 보는 순간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플린스와 서브 섀시가 인장 스프링으로 연결되어 있고 스프링 아래가 점성이 있는 유체 튜브 속에 담겨 있었다. 내가 평소 턴테이블용 완충장치로 가장 이상적이라고 주장해온 형태다. 스프링으로 받치되 스프링이 계속 출렁이고자 하는 진동에너지를 댐핑 오일 등으로 효과적으로 흡수하는 구조를 하고 있어야 한다. 평소 이상적인 완충장치의 모델로 생각했던 것을 눈앞에서, 그것도 70만 원짜리 입문용 턴테이블에서 보게 되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수백만 원짜리 턴테이블에서도 볼 수 없는 것이기에 충격이 더 컸다. 내 마음속에 PS500을 갖고 싶은 욕망이 순간 꿈틀대는 것을 눈치 채고는 “최 선생이 개조한 EMT930이랑 바꿉시다”며 일합을 날린다. 물론 상식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걸 뻔히 알면서 일부러 나의 심기를 건드려 보는 것이다. 나도 고수의 의도를 아는지라 “바꾸고 싶어도 여긴 EMT930 놓을 자리도 없는데요!”라고 눙치며 받아넘긴다. 이 만남은 재야 고수의 한방에 내가 비틀거리며 한 수 배운 꼴이 되었다.
쿠즈마(Kuzma) 스타비(Stabi) 턴테이블의 독특한 플로팅 방식을 본 이후로 이런 충격은 처음이다. 참고로 스타비 턴테이블은 플래터와 톤암을 플로팅시킨 후 서브 섀시에서 발을 내려서 그 발을 유체 속에 담그게 했다. 플래터와 톤암이 외부 충격으로 움직이려고 하면 유체 속에 담긴 발도 같이 움직여야 한다. 유체의 저항에 의해 출렁이는 진동에너지가 곧바로 소실될 수밖에 없어서 바로 정지하게 된다. 물론 이런 독특한 구조 탓에 스타비 턴테이블을 옆으로 심하게 기울이면 이 유체가 흘러내릴 수 있다. 스타비는 중고가로 따져도 브라운 PS500의 몇 배가 되는 하이엔드 턴테이블이다. 그런데 PS500은 유체를 튜브로 밀봉해 턴테이블을 거꾸로 뒤집어도 유체가 흘러나올 염려가 없다. 가격을 떠나 플로팅 방식의 턴테이블 중에 이보다 선진적인 방식의 완충기를 사용한 턴테이블을 본 적이 없다.
소리는 진동을 효과적으로 흡수하는 완충장치 탓에 고가의 턴테이블에서나 느낄 수 있는 안정감과 묵직함을 느끼게 해준다. 벨트가 최종적으로 서브 플래터를 돌리는 구조라 회전 불균일이 거의 없어서 고음이 자연스럽게 연기 피어오르듯 올라간다. 플래터 구동방식이나 완충 시스템에 비해 톤암은 약간 아쉬움을 준다. 하지만 스프링으로 침압을 주는 다이내믹 밸런스 방식에 안티스케이팅 기능도 갖추고 있고 VTA 조정도 가능하다. 입문용 턴테이블에 달려 있는 허접한 스태틱 밸런스 방식의 톤암에 비하면 분명 한수 위다.
PS500은 톤암 성능의 한계로 기백만 원 하는 하이엔드 턴테이블에 대적할 만한 소리를 내주지는 못하지만 백만 원 근처까지는 대적할 상대가 없다. 무엇보다 바닥에 깔리는 안정된 사운드 스테이지가 이 턴테이블이 입문용이 맞나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노브와 손잡이, 플래터에서 느껴지는 치밀하고 완벽한 마무리와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만드는 통일된 이미지의 디자인은 보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천재적인 산업디자이너 디터 람스(Dieter Rams)의 작품답게 심플함과 단순함의 미학을 보여준다. 톤암과 노브의 조작 감촉도 하이엔드 오디오 부럽지 않을 정도로 좋다.
독일의 기계 제작 기술과 금속 가공 기술의 진수를 맛보게 하는 브라운 턴테이블이지만 한국에서 사용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모터가 50Hz 전용이라 한국의 60Hz 전원에 연결하면 속도가 빨라져서 속도 조정이 어렵다. 교류 동기모터는 전원 주파수에 따라서 속도가 정해지는데 50Hz용 모터에 60Hz 전원을 공급하면 높아진 주파수만큼 속도가 빨라진다. 속도가 20% 정도 더 빨라져서 가변 속도 조절 노브를 최대로 느리게 해도 플래터가 정상 속도보다 빠르게 회전한다. 60Hz 모터가 장착된 제품이 있나 싶어 이베이를 샅샅이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다.
직류 모터를 사용하는 상급 모델인 PS600은 전원 주파수에 관계가 없어서 풀리 개조 없이 회로의 저항만 바꾸면 바로 한국에서 사용할 수 있다. PS600은 반자동인 PS500과 달리 자동기능이 있어서 음질에서 불리하다. PS600은 PS500과는 구동방식과 서스펜션이 다르다. PS600은 벨트를 사용하지 않고 순수하게 아이들러만으로 플래터를 돌리고 서스펜션도 플로팅이 아닌 절충형을 택하고 있다. 베어링도 PS500은 일점 접촉의 일반 베어링인데 반해 PS600은 PE나 엘락과 같이 작은 볼이 여러 개 들어가는 트러스트 베어링을 사용한다. 이런 탓에 PS600은 소리의 묵직함이나 저음의 양에서는 PS500에 앞선다. 하지만 PS600은 유체를 이용한 댐핑 시스템이 사용되지만 절충형 방식이어서 음의 해상력이나 배경의 깨끗함에서 플로팅방식인 PS500에 밀릴 수밖에 없다.
매직이라고 할 수 있는 댐핑 서스펜션을 갖춘 PS500을 선택한다면 모터 축을 살짝 갈아내 사용하는 수밖에 없다. 모터가 도는 상태에서 줄이나 굵은 사포로 아주 조금씩 갈아내다 보면 가변으로 속도조정이 가능한 범위로 속도가 들어오게 된다. 속도 조정 범위로 들어오면 가는 사포로 표면을 매끄럽게 하면 된다. 이때 주의 할 점은 턴테이블에 내장된 스코프는 50Hz용이기 때문에 이것을 보고 하면 안 된다. 플래터 스핀들에 60Hz용 스코프를 꽂아 확인하면서 갈아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
여기서 잠깐 태클 거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기껏 〈아날로그의 즐거움〉에서는 전원 주파수 문제 때문에 모터의 풀리를 갈아서 속도를 맞추는 것은 난센스라고 해놓고, 여기서는 서슴없이 풀리를 사포로 갈아내서 사용하라니 앞뒤가 안 맞는다고 할 수 있다. 맞는 말이다! 아이들러 턴테이블에서 모터의 풀리를 갈아내다 보면 균일하게 갈아지지 않게 되고 그 오차가 아이들러를 통해 플래터에 그대로 전해지게 된다. 그런데 브라운 PS500은 최종적으로 플래터를 돌리는 것은 벨트다. 풀리를 갈아낼 때 생길 수 있는 오차가 벨트에서 충분히 흡수되어 플래터에 전해지지 않는 구조다.
PS500과 같은 구조를 가진 모델로는 PS4301), PS420, PS1000이 있다. 이중 PS1000은 직류모터를 사용해 전원 주파수 문제도 없고 음질도 가장 좋다는 평을 듣는다. 이쯤 되면 PS1000의 음질이 궁금해서 좀이 쑤시게 된다. 그런데 이 시리즈의 마지막으로 출시된 PS1000, 그 중에서도 안티스케이팅 기능이 추가된 모델 PS1000AS는 발매 대수가 많지 않다. 그런 이유로 PS500의 두세 배가 넘는 가격에 낙찰이 된다. 가격과 성능을 감안하면 반자동인 PS500과2) 완전 수동 모델인 PCS-5가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하겠다.
모터의 풀리를 정밀하게 갈아내고 모터와 아이들러, 스핀들을 청소하는 오버홀을 끝내고 듣는 PS500은 차분하고 안정감 있는 소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특히 하부 베이스가 철 재질이라 외부 노이즈에도 아주 강하다. 그래서 입문용 턴테이블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아주 깨끗한 배경을 느낄 수 있다. 톤암이 상대적인 약점으로 지적받는데, 턴테이블 전체가 하나의 완결된 디자인으로 설계된 만큼 톤암을 바꾸지 말고 사용하는 것이 좋다. 아쉬운 점은 국내에 이 제품이 몇 대 없어서 독일에서 구입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한국으로의 배송을 기피하는 편이다. 열 개의 매물 중에 한국 배송이 가능한 경우는 하나 정도다. 더구나 무게가 많이 나가서 운반비가 100유로 정도로 만만치 않게 나온다.
톤암을 바꿔달고 베이스를 개조하는 개조파에게 어울리는 턴테이블은 아니다. 욕심 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최소한의 오버홀만 한 상태로 음악을 즐기기에 적당한 턴테이블이다. 일체형으로 오리지널인 상태에서 100만 원 아래에서는 적수가 없다. 구입이 쉽진 않지만 PS500은 보는 즐거움과 듣는 즐거움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몇 안 되는 턴테이블이다.
Luxman PD-300
무색무취의 세계
럭스만 PD-300
순전히 진공흡착이 궁금해서 구입한 턴테이블이다. 레코드를 플래터에 착 달라붙도록 하는 진공흡착 기능이 있는 턴테이블을 찾다가 우연히 럭스만 턴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만듦새와 디자인이 범상치 않았다. 톤암은 입문용으로는 과한 수준인 Signet XK-351)로 실리콘 댐핑이 가능한 구조를 하고 있다. 디자인이 인상적이지만 그래도 수동으로 작동한다는 진공 펌프(DVS)2)가 더 궁금했다. 미국에 사는 지인을 통해 이베이에서 구입한 뒤 안전하게 한국으로 배송 받았다.
실물을 받아보니 사진에서 볼 때보다 마무리와 디자인이 더 훌륭했다. 궁금해 했던 수동식 진공펌프는 전면 우측에 나있는 레버를 우측으로 돌려 작동시키는 것이었다. 레버를 돌린 상태에서 플래터에 레코드를 얹고 옵션으로 구입한 원형 덮개로 레코드를 살짝 누른 상태에서 레버를 왼쪽으로 살짝 풀면 진공흡착이 된다. 원리는 턴테이블 안에 커다란 풀무가 있는데, 이것이 손으로 조여진 스프링의 힘으로 공기를 빨아내서 레코드를 흡착하게 되는 것이다. 재래식 대장간에 있는 풀무와 아주 유사한 형태의 수동식 공기흡착기가 턴테이블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수동식이라 힘이 다소 약하기는 하지만 모터를 사용하는 에어펌프에 비해 소음이 거의 없다는 장점이 있다. 어떤 판은 한 면을 다 듣는 동안 압축을 그대로 유지했고, 약간 휜 판은 레코드 재생 중간에 압축이 풀리기도 했다. 상급기인 PD-310과 350은 VS-300이라는 모터로 작동되는 외장형 에어펌프가 기본으로 제공된다. 수동식으로 작동하는 PD-300도 별도의 에어 컴프레서를 구입해서 사용하는 게 가능하다. 진공흡착을 한 상태로 듣는 레코드의 소리는 바닥에 착 가라앉는 듯한 안정감을 준다. 진공흡착의 또 다른 장점은 정전기 노이즈가 줄어들어 소리가 깨끗해진다는 점이다.
이 턴테이블을 살펴보면서 놀란 부분은 수동식 진공흡착이 아니라 모터였다. 손으로 돌려보면 아무런 저항 없이 아주 부드럽게 돌아간다. 크기가 크진 않지만 통돌이 모터로 토크가 크기에 비해 큰 편이다. 지금껏 많은 턴테이블 모터를 보아 왔지만 이렇게 부드럽게 돌아가는 모터는 무척 드물다. 기천만원에서 1억 원이 넘는 턴테이블에서나 볼 수 있는 부드러운 회전을 보여주었다. 쿼츠 락이 작동되는 BLDC3) 모터로, 플래터를 모터가 직접 돌리는 다이렉트 턴테이블에 쓰는 수준의 정밀한 모터를 벨트 드라이브형에 사용한 것이다. 아날로그 전성기를 이루던 1980년대 일본에서 생산된 최고급 모터를 사용한 셈이다.
삼점지지의 플로팅 방식으로, 스프링에는 스펀지 등을 사용해 충분히 댐핑을 했다. 쉽게 말해 눌러도 계속 출렁거리지 않고 진동이 바로 멈춘다는 얘기다. 플로팅으로 떠 있는 서브 섀시도 철저히 무게중심이 맞도록 설계되었고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공진을 억제하기 위해 콜타르 같은 물질을 덧붙였다. 삼점지지 스프링은 아래에서 밑판을 열지 않고도 조정이 가능하도록 했다. 톤암 보드도 독특하다. 9인치에서 10인치 톤암은 간단한 조작으로 쉽게 설치가 가능한 구조다.
플래터는 알루미늄 재질로 무게가 3.5kg에 이른다. 거기에 레코드를 진공흡착하는 DVS 기능을 갖추고 있다. 심지어 전원 극성을 확인하기 위한 장치까지 갖추고 있다. 이런 PD-300의 면면을 살펴보면 턴테이블 설계에서 이상적으로 갖추어야 할 사항을 거의 다 갖추고 있는 셈이다. 이런 구조 덕분에 턴테이블로서는 80dB이라는 놀라운 S/N비를 보여준다. 1981년 출시 당시 가격이 2500달러로 당시 물가를 생각하면 엄청나게 비싼 하이엔드 턴테이블이었다. 지금 이렇게 만든다면 소비자가가 2천만 원짜리 턴테이블이 될 것이다.
울컥거림이 거의 없는 BLDC 모터로 벨트를 통해 플래터를 돌리고 출렁거리지 않는 플로팅 서스펜션 스프링에 진공흡착 기능까지 갖춘 PD300의 소리는 한마디로 당혹 그 자체였다. 심심한 음색에 아무런 맛이 없는 지극히 싱거운 소리였다. 탄산수, 소다수, 오렌지주스처럼 맛이 들어간 음료만 마시다가 생수를 먹는 기분이랄까? 지금까지 모터는 플래터를 회전시켜줄 뿐이지 소리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모터에서 발생하는 진동이 잡음으로 유입되는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아주 부드럽게 돌아가는 럭스만의 모터를 경험하고 나서 모터가 어떻게 회전하느냐가 음색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계 초침처럼 정지했다 가다를 반복하면서 도는 모터는 음이 전체적으로 딱딱해지면서 고음이 날카롭게 변하고 부드럽게 회전하는 모터는 소리가 자연스러우면서 고음이 열려서 개방된 느낌을 준다.
럭스만이 만들어내는 소리를 입문자가 듣는다면 당혹스러움을 지나 황당하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고통과 번뇌가 없는 이상적인 세계인 천국에서의 생활이 어떨까 상상해보자. 조금만 생각해보면 심심하기 그지없을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반대로 고통으로 가득 찬 지옥은 최소한 심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턴테이블을 이상적인 형태로 설계하고 제작하면 화려한 음색이나 짜릿한 긴장감을 주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자극이 전혀 없는 편안한 소리가 나온다. 턴테이블로는 놀라운 80dB이라는 수치의 S/N비 탓에 배경도 아주 깨끗하다.
솔직히 말하면 깨끗하다 못해 심심하고 허전한 느낌까지 준다. 이런 특징은 플래터를 압축공기나 자석을 이용해 공중부양시켜서 베어링 마찰 소음을 없앤 고가의 턴테이블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이런 고가의 턴테이블은 지극히 자연스러워서 자극이나 긴장이 느껴지지 않는 맑고 깨끗하다 못해 심심한 느낌의 소리가 난다. 이런 소리는 궁극의 아날로그라고 말하는 오픈릴 리코더에서도 느낄 수 있다. 나 자신도 이런 심심한 소리가 좋은 소리라는 것을 초고가 턴테이블과 오픈 릴 리코더를 사용하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럭스만의 PD-300의 실제 제작은 마이크로 세이키에서 담당했다. 아날로그 고수라면 진공흡착 방식이나 질 좋은 모터를 채용한 것에서 마이크로 세이키의 냄새를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마이크로 세이키 이름으로 출시한 턴테이블은 이상적인 구조를 하고 있는 탓에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소리를 내주기는 하지만 음색에 약간의 서늘함이 있다. 이에 비해 럭스만 턴테이블의 소리는 차가운 느낌이 거의 없다. 온도로 치면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아서 온도를 느낄 수 없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중립적인 온도감은 카트리지나 포노앰프에 의해 다양하게 색을 입힐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고음이 화려하기로 소문난 수미코나 라이라(LYRA)의 카트리지를 물려도 귀를 자극하는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 PD-300의 장점이다. 톤암을 장착하는 것 외에 특별하게 손대거나 개조할 곳이 없다. 그대로 사용하면 된다. 자극적인 소리보다는 자연스러운 소리를 좋아하는 하이엔드 취향의 마니아라면 도전해 볼만한 턴테이블이다.
추천할 만한 모델은 벨트 드라이브에 DVS 시스템을 장착하고 수동식인 PD-310, 350 그리고 두 개의 톤암을 장착할 수 있는 수동식 중 최고급 모델인 PD-550이다. 다만 자양강장제 파는 길거리 약장수가 “애들은 가라! 애들은 가”라고 외치듯이 럭스만 턴테이블은 초보자에게 어울리는 턴테이블이 아니다. 아날로그 이력이 충분하고 초고가의 공중부양 방식 턴테이블 소리가 궁금하다면 럭스만 PD-300 시리즈를 구입해 호기심을 채울 수 있다. 마이크로 세이키의 턴테이블도 호기심을 충족시켜 줄 수 있지만 가격이 장난이 아니다. 럭스만의 턴테이블은 비싸지 않은 값에 자극이나 구김이 없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아날로그 소리를 경험하게 해준다.
Lenco L-75
독특한 발상
렌코 L-75[제원]
속도: 15, 33⅓, 45, 78 RPM
S/N비: 60dB
크기: 38.5×33cm
스위스 하면 토렌스 턴테이블이 떠오른다. 스위스에는 토렌스 말고도 유명한 턴테이블 메이커가 있는데 바로 렌코(Lenco)다. 내가 렌코를 처음 만난 것은 L-85라는 벨트 드라이브 턴테이블이었다. 소리전자에 매물로 나왔는데 순전히 스위스에서 만든 턴테이블이라는 설명 때문에 호기심이 발동해 구입했다. 구입하고 나서 살펴보니 속도가 안 맞아서 내부를 분해해서 조정하기로 마음먹었다. 중고가 40만 원짜리 턴테이블이 교류 전원을 정류해서 직류로 만든 다음 다시 교류를 발생시켜 교류 모터를 돌리는 방식을 하고 있었다. 만듦새와 구조에 감탄해서 렌코 라는 턴테이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알고 보니 렌코 턴테이블은 벨트 드라이브로 유명한 것이 아니고 수직으로 세워진 아이들러가 플래터의 아랫면을 돌리는 독창적인 구조의 턴테이블로 유명한 회사였다. 가장 많이 팔린 제품은 L70, L75라는 모델로, 전 세계로 수출해서 미국은 물론이고 호주나 남미에서도 매물이 나온다. 유럽에서는 렌코로 판매했지만 영국에서는 골드링(Goldring) 브랜드를 달았고 미국에서는 보겐(Bogen)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를 했다. 브랜드는 달라도 모두 렌코에서 제작한 턴테이블이다.
구조를 살펴보면 교류 싱크로너스 모터가 가로로 놓여 있고 여기에 끝이 뾰족한 원반형 아이들러가 붙고 이 아이들러가 플래터의 아랫면에 밀착해서 플래터를 회전시키는 구조다. 지구상의 모든 턴테이블이 수평 방향으로 작동하는 아이들러나 벨트를 생각할 때 렌코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수직방향으로 구동시키는 기발한 발상을 한 것이다. 이는 모두가 하늘이 돈다고 생각할 때 지구가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에 비견되는 사건이다. 기존 방식과 다른 새로운 방식이라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새로운 방식이 기존의 방식보다 탁월해야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턴테이블이 돌면서 스피커에서 음악이 나올 때 턴테이블 베이스의 옆면을 손가락으로 톡 쳐보자. 그러면 그 충격이 스피커에 상당히 큰 소리로 증폭되어 나올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바늘이 튀면서 엉뚱한 부분에 가서 플레이를 할 수도 있다. 이번엔 베이스의 윗면을 손가락으로 톡 쳐보자. 스피커에서 소리가 나긴 하겠지만 베이스 옆을 쳤을 때보다 현저히 작은 소리가 난다. 물론 바늘이 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턴테이블로 실험해도 결과는 같을 것이다. 이처럼 턴테이블은 수평 방향 진동에는 아주 취약하지만 수직 방향 진동에는 아주 강하다. 아이들러가 수평 방향으로 플래터를 돌리면 모터의 진동이 수평 방향으로 플래터에 전달될 수밖에 없다. 만약 아이들러가 수직으로 방향으로 플래터를 돌린다면 모터의 진동은 수직방향으로 플래터에 전달된다. 이제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를 챘을 것이다.
렌코의 아이들러는 수직으로 세워져 있어서 모터의 진동이 플래터에 수직방향으로 가해진다. 특히 아이들러의 끝이 뾰족한 형태로 플래터 아랫면에 파진 미세한 홈에 끼워져 회전하는 구조로 접촉면이 극도로 적다. 이런 탓에 렌코는 아이들러형인데도 벨트 드라이브에 버금가는 놀라운 정숙성을 보여준다. 재미있는 것은 아이들러의 접촉면이 적은데도 5초 이내에 3.7kg에 달하는 아연합금 재질의 무거운 플래터를 정상속도에 이르게 한다.
물론 시간이 지나도 속도 변화는 거의 없다. 토렌스 124가 정상속도에 이르는 데에 걸리는 시간이 훨씬 길고 정상속도에 이른 후에도 미세하게 속도가 변하는 것에 비해 렌코의 속도 안정성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다. 렌코의 모터는 2극의 셰이디드 폴 타입의 유도 모터로 높은 수준의 모터는 아니다. 그런데도 놀라운 회전 안전성을 보여주는 것은 모터를 포함한 구동부 전체가 완벽하게 설계되고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속도 선택 방식도 특이하다. 사진에서 보듯 유선형으로 만들어진 풀리 위를 아이들러가 위치를 바꿔 접촉하면 풀리의 직경과 플래터 아랫면에 닿는 위치가 동시에 변하면서 속도가 바뀌게 된다. 풀리의 직경과 플래터 아랫면의 위치가 동시에 변하기 때문에 설계가 까다롭고 부품의 정밀도도 우수해야 안정적으로 플래터를 회전시킬 수 있다. 유선형 풀리라 16, 33, 45, 78회전은 물론 최대 88RPM까지 가능해서 SP 레코드도 문제없이 즐길 수 있다. 눈여겨 볼 것은 모터의 축과 아이들러가 부착되는 유선형의 풀리가 일체형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런 경우는 EMT의 927/930을 제외하면 어느 턴테이블에서도 볼 수 없는 것이다. 모터 축과 풀리의 편차를 원천적으로 없앤 탁월한 방식이다.
브라운 PS-500도 그렇지만 L-75도 미세한 속도조정은 아이들러가 붙는 위치를 움직여서 하는 방식이다. 많은 턴테이블이 가라드 301이나 토렌스 124처럼 자석과 알루미늄 원판을 이용해 전자 브레이크로 속도를 조절한다. 이런 방식은 간편하긴 하지만 일정하게 부하가 걸리는 구조라 바람직하지 않다. 자동차를 예로 들어 설명하면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지 않은 채 액셀을 세게 밟아 달리는 꼴이다. 이상적인 속도조정은 인위적으로 힘을 가하지 않고 모터의 성능을 에너지 손실 없이 플래터에 그대로 전달하면서 속도를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마치 자동차의 무단 변속기가1) 에너지 전달효율이 좋아서 연비가 좋은 것처럼 말이다. 이 장에서 추천하는 브라운 PS-500, 렌코 L-75, 마란츠 SLT-12는 모두 자석을 이용한 전자 브레이크를 채용하지 않는 방식의 턴테이블이다.
전 세계로 수출한 탓에 60Hz용 모터가 채용된 제품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미국과 남미에 수출된 제품이 그렇고, 캐나다도 대부분이 60Hz라 확인하고 구입하면 된다. 물론 50Hz용 모터를 채용한 제품도 간단한 조작으로 속도를 늦출 수 있다. 풀리가 유선형이라는 점을 이용해 수직 아이들러가 붙는 위치를 좀 더 먼 곳이 되게 하면 된다. 아래 사진의 속도 선택 노브 받침을 고정하는 나사를 풀어서 이동시키면 간단히 속도가 늦춰진다. 이미 50Hz용 제품을 구했다면 이런 방법으로 속도를 늦춰 사용하면 된다.
처음 구입하는 입장이라면 매물이 적어 구입이 조금 어렵지만 60Hz용 제품을 구하는 것이 좋다. 모터의 전압은 110V용이라고 해도 간단하게 결선만 바꾸면 220V로 바꿀 수 있다. 기본적으로 50Hz용이나 60Hz용 모두 모터는 동일하다. 다만 60Hz용 모터가 더 빠르게 회전할 것을 고려해서 사진에서 보듯이 유선형으로 이루어진 풀리의 직경이 더 가늘다. 다소 번거롭더라도 60Hz용 모터가 장착된 제품을 구입하는 것이 좋다.
L-75 모터
“렌코 턴테이블 가지고 있다면서요?” 재야 고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두어 개 가지고 있다고 답하니 언제 한번 보여 달라고 한다. 얼마 후 궁금증을 참지 못한 고수가 손수 집으로 찾아왔다. 내가 L-75를 내밀고는 친절하게 플래터를 들어내서 내부를 보여주었다. “아~ 아주 독특한데······” 하면서 말끝을 잇지 못한다. 소리를 들려드리겠다고 하니 “꼭 들어야 압니까? 보기만 해도 대충 답이 나옵니다!”라면서 손사래를 친다. 스타트 레버를 돌리면서 모터가 도는 것과 아이들러가 움직이는 것을 유심히 살펴본다. 그러고는 플래터를 얹고 레버를 돌려 작동시키고는 스핀들에 꼽혀 있는 렌코 전용 스코프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러고는 “이거 물건이네!”라고 한마디 한다.
다 살펴보셨냐고 물으니 “플래터 높이가 너무 낮아 아무 톤암이나 못 달겠네?” 한다. 역시 고수의 눈은 독수리처럼 예리하다. 톤암의 성능이 시원치 않고 플래터 높이가 낮은 것까지 한 눈에 간파한 것이다. 고수는 벌써 머릿속으로 오리지널 톤암을 들어내고 어떤 톤암을 붙여야 잘 어울릴까를 따지고 있는 중이다. 내가 “오토폰 AS212나 FR 54나 린의 Basik 정도라면 문제 없이 달 수 있다”고 응수하니 마뜩찮은 표정으로 “좀 더 나은 걸 붙여야 할긴데······”라며 말끝을 흐린다.
매트를 두껍게 깔면 되지 않느냐고 하니 고개는 끄덕이면서도 얼굴은 흡족해하는 표정이 아니다. 재차 렌코 중에 B55나 B52라는 모델은 플래터가 높아서 문제가 없다고 하니 “L-75도 흔하지 않을 텐데 그걸 언제 구합니까?”라고 대꾸한다.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며 “렌코 걔들도 이런 문제를 알고 있을 텐데······”라고 중얼거린다. 아무래도 흔쾌히 납득이 안 되는 모양이다.
내가 마지못해 렌코 G-99를 꺼내 고수에게 내민다. “아이! 최 선생도 참~ 진작 이걸 보여줬어야지”라고 말하는 고수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진다. 내가 능청스런 미소를 날리자 고수가 “그럼! 그렇고 말고. 톤암을 마음대로 달 수 있게 해야지”라면서 눈초리를 치켜 올려 맞받아친다. 고수의 눈초리 응수에 화답해서 L-70이라는 놈도 슬며시 꺼내놓는다. 여기저기 보더니 고수 왈 “톤암이 무겁고 실한 게 마음에 드네!” 내가 톤암이 묵직한 게 L-75 톤암과 많이 다르다고 하자, 고수가 “무거운 톤암에는 침압 높고 무거운 모노 카트리지가 제격이지”라고 받아넘긴다.
그러고는 “최 선생, 모노 카트리지 하나 매서 쓰게 L-70이나 나한테 넘기소!” 그러는 것이다. 고수도 G-99가 욕심이 날 테지만 그걸 달라 하기는 겸연쩍고, 75는 마땅히 붙일 톤암이 떠오르지 않아서 L-70을 달라는 것일 것이다. 결국 톤암을 그대로 살려서 모노 카트리지 붙여 쓰기에 70이 딱이다 싶은 것이다. “모노 카트리지 붙여 쓰시게요?”라고 물으니 고수가 “최 선생, 긴말 말고 줄기요? 말기요?”라며 다그친다.
이미 고수는 렌코의 수직 아이들러가 플래터에 수직 방향으로 진동을 주로 전달하는 구조라는 것에서 좌우의 수평 신호만 뽑아내는 모노 카트리지가 금상첨화의 조합이 될 것이라는 것까지 꿰고 있었다. 나 역시 그걸 알고 있었기에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지으며 L-70이라고 써진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곳엔 ‘STEREO/MONO TURNTABLE’이라고 써 있다. 고수는 지독한 컴맹이다. 나는 고수가 이베이를 통해 턴테이블을 구입할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그래서 양보하기로 마음먹고는 “꼭 하시게요?”라며 딴청을 피워본다. 들고 가기로 마음을 굳히고서도 고수는 짐짓 아닌 척 “최 선생이 안 준다면 어쩔 수 없는 거지”라며 연막을 피운다. “요즘 모노에 맛을 들이신 것 같은데 가져가세요!”라고 하니 “준다는데 가져가야지”라고 답한다. 이번 겨루기는 무승부로 끝났다.
초기 모델인 L-70은 스프링을 이용해서 침압을 주는 다이내믹 밸런스 타입으로 L-75에 달린 톤암과는 구조가 완전히 다르다. 무거운 톤암 파이프와 헤드셸로 무장하고 있어서 유효질량이 충분히 무겁다. 따라서 침압이 무거운 구형 모노 카트리지나 오토폰의 SPU, 슈어의 M3D 같은 카트리지와 잘 어울린다. L-75는 가장 많이 팔린 모델로 톤암의 보조 추로 침압을 주는 스태틱 밸런스 방식을 취하고 있다.2) 안티스케이팅 장치도 합리적으로 설계되어 있고 전체적으로 정밀하게 만들어졌다. 다만 톤암의 상하운동을 담당하는 부분이 나이프 에지 방식인데 나이프 에지를 받치는 부품이 약해서 손상된 경우가 많다. 본격적으로 즐기려면 이 부분을 손보거나 톤암을 들어내고 다른 톤암을 장착하는 것이 좋다.
렌코는 베이스 만들고 톤암을 선택해 장착하는 걸 즐겨 하는 마니아에게 어울리는 턴테이블이다. 일반적인 톤암을 장착하면 플래터 높이가 너무 낮은 탓에 톤암을 아무리 낮춰도 톤암 파이프가 수평이 되지 않는다. 오토폰의 AS212(구형)나 Fidelity Research 54, 린의 Basik처럼 톤암 축 부분 높이가 낮은 톤암은 별 문제없이 VTA를 맞출 수 있다.3) 좀 더 다양한 암을 달고 싶으면 플래터 높이가 일반 턴테이블과 비슷하게 높은 B55, B52 같은 모델을 구하면 된다. 조금 비싸지만 G-88이나 G-99 같은 독립된 턴테이블 본체만 구한다면 롱암까지 문제없이 장착할 수 있다.
렌코 G-99
렌코는 다양한 모델이 존재한다. L-60, 62, 70, 75, 78이 모두 수직 아이들러를 채용한 모델들이다. 보겐 브랜드를 달고 미국에 수출한 제품으로 B-60, 61, 62가 있는데 사실상 렌코 L-70과 같은 모델이라고 보면 된다. 모든 아이들러 턴테이블이 그렇듯 렌코 정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러의 상태다. 아이들러만 괜찮다면 다른 부분은 별로 문제될 것이 없는 아주 심플한 구조다. 아이들러의 몸통은 플라스틱 바디로 된 것도 있고 구멍이 두개 뚫린 알루미늄제부터 구멍이 네 개인 티타늄제까지 다양하다. 티타늄제가 가장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아이들러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무로 된 테두리의 에지가 잘 살아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빨이 빠져 있거나 삭아서 탄력이 없으면 교체해줘야 한다.
국내에 많진 않지만 L-75 사용자가 있는데 대부분 아날로그 초보자가 아니다. 재미있는 건 L-75 사용자 상당수가 토렌스 TD-124를 쓰다 L-75로 갈아탔다는 사실이다. 나 역시 그 경우에 해당한다. 124를 오래 다뤄보았지만 원천적으로 정속성을 가질 수 없는 턴테이블이라고 생각한다. 소나타 차체에 1500cc 아반떼 엔진을 장착한 것처럼 플래터에 비해 모터의 출력이 약하다. 이런 탓에 속도가 속을 썩이는 경우가 많고 복잡한 구조 때문에 트러블도 잦은 편이다. TD-124에 비해 L-75는 심플한 구조에 속도 변화가 거의 없다는 장점을 지녔다.
소리도 124가 중역의 독특한 음색을 중심으로 여성스러운 소리를 내준다면 L-75는 고음이 쭉 뻗고 저음도 깊이 내려가는 광대역의 호방한 사운드를 내준다. 124가 현악기의 음색을 중심으로 실내악에 장기를 보인다면 L-75는 넓은 무대와 해상력을 바탕으로 대편성 곡에서 장점을 보인다. 아이들러형인데도 잡음이 거의 없어서 배경이 깨끗하고 잘 정돈된 사운드를 들려준다. 잘 정비된 렌코 L-75를 듣고 있으면 아이들러 방식의 구형 턴테이블인데도 현대의 턴테이블을 듣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토렌스, 가라드, EMT만 찾을 것이 아니라 시선을 조금만 돌리면 싼 값에 좋은 소리를 내주는 턴테이블이 많다. 수평 구동이 전부인 줄 알았던 턴테이블 세계에 수직 구동이라는 획기적인 방식을 도입한 렌코 턴테이블에 관심을 가져볼만 하다. 렌코를 들여놓는다면 124의 속도 불안정이나 가라드 301의 출렁거리는 럼블4)에서 해방된 사운드를 즐기게 될 것이다. 렌코 L-75는 아이들러의 장점인 강력한 힘을 갖추고 있고 벨트에 버금가는 정숙함을 겸비한 보기 드문 턴테이블이다.
Marantz SLT-12
마란츠 전설의 마지막 불꽃
마란츠 SLT-12[제원]
속도: 33⅓, 45 RPM
와우 앤 플러터: 0.04% 이하
럼블: 무
가끔 만나는 현역 고수가 “내가 갖고 있는 마란츠 턴테이블 한번 봐야 하는데······”라고 한마디 한다. “마란츠 턴테이블이라고요?”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한다. 현역 고수는 일단 한번 보고나서 이야기하라고 답한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린 이유는 지금껏 보아온 마란츠 턴테이블은 조잡함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플라스틱으로 찍어낸 베이스에 양철 판을 연상시킬 만큼 얇고 가벼운 플래터를 얹고 장난감용 직류모터를 단 수준 이하의 제품이 마란츠 턴테이블이었다. 설마 그런 턴테이블을 보여주려고 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언제 기회가 되면 한번 보기로 했다.
현역 고수는 턴테이블의 오버홀과 수리에 일가를 이룬 사람으로 우연히 내가 그의 수리 사무실을 들렀다. “오랜만에 오셨으니 마란츠 턴테이블 한번 보시죠.” 그러면서 창고에서 뭔가를 꺼내온다. 높이가 높고 상당히 무거워 보이는 턴테이블 하나를 들고 나온다. 황금색이 도는 플래터와 우측에 Marantz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보인다. 마란츠 턴테이블은 맞는데 내가 보아오던 마란츠 턴테이블과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현역 고수는 턴테이블을 내놓고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이 하던 일을 계속한다. 아는 만큼 보일 테니 알아서 살펴보라는 침묵의 탐색전인 셈이다.
생긴 것이 범상치 않아 보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톤암이 보이질 않았다. 우측의 돌출된 부분을 여니 그 안에 헤드셸이 보이고 기어 톱니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물이 보였다. 이 구조물이 톤암인 것 같아 손가락으로 살짝 헤드셸을 건드려 보니 아주 부드럽게 미끄러진다. 기계식으로 정교하게 만든 리니어 트래킹 톤암이었다. 톱니가 나 있는 부채꼴 모양의 부속이 쌍으로 마주보고 있는데 이것이 위아래 이층 구조로 되어 있다. 헤드셸은 슈어 전용으로 제작되었고 침압 조정도 가능하다.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니 세계 최초의 리니어 트래킹 톤암이었다. 벨트를 풀고 플래터를 뽑아보았다.
플래터가 묵직하기도 하지만 아주 정밀하게 가공되어 있었다. 마란츠 SLT-12라고 표기된 모터는 교류 모터로는 가장 회전 품질이 좋다는 히스테리시스 싱크로너스 모터를 사용했다. 이 모터는 회전이 아주 부드럽고 자연스러워 최고급 릴 리코더의 캡스턴 모터로1) 주로 사용된다. 플래터와 톤암은 서브 섀시에 얹어져 스프링에 의해 플린스에 연결되는 플로팅 방식이었다. 내부 부품이나 구성은 엠파이어 턴테이블과 비슷한데 더 고급스럽고 튼튼했다. 엠파이어 턴테이블보다 더 고급스러우니 물량 투입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될 것이다.
“아니, 이런 구조의 톤암이 있다니!” 내가 놀라움을 표시하자, 현역 고수 왈 “한번 볼만 하지요?”라고 응수한다. “구조의 독창성도 돋보이지만 물량 투입이 대단한 대요”라고 말하자 “오리지널 마란츠의 전성기 작품답죠!”라고 답한다. 마란츠 하면 프리앰프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Model 7과 꿈의 진공관 파워앰프라는 Model 9이 널리 알려진 탓에 진공관 앰프를 생산하는 회사로만 알고 있었다. 이런 독특하고 대단한 턴테이블을 마란츠에서 출시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현역 고수가 한번 보라고 할 만큼 독특하고 훌륭한 만듦새를 보여준 턴테이블이었다. 이번 만남에서는 현역고수가 날린 무언의 암기에 방심하다 허를 찔렸다.
마란츠는 1964년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일본계 자본에 매각된다. 1963년에 발매한 Model-10B2)라는 스테레오 튜너의 개발과 제작에 엄청난 물량 투입을 한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SLT-12 턴테이블의 발매 시기도 1963년이다. SLT-12를 보면 10B 못지않은 개발비와 물량 투입이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10B와 함께 SLT-12도 마란츠 황금기의 엄청난 자본으로 탄생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이런 과감한 투자가 마란츠라는 모선을 몰락으로 이끈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몇 달을 찾아 헤매다 드디어 이베이에서 SLT-12를 발견했다. 경쟁자가 없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만만치 않은 경쟁자 사이에서 낙찰을 받았다. 도착한 SLT-12는 상태가 좋은 편이었지만 출시된 지 40년이 넘는 턴테이블이라 구조도 살필 겸 분해해서 정비하기로 마음먹었다. 모터를 분해해 위와 아래 축 부분을 깨끗이 청소하고 기름을 쳤다. 각 부품의 상태는 전반적으로 양호했다. 톤암은 분해할 필요가 없어 움직이면서 마찰이 되는 부분에 기름을 치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조립은 벨트 거는 것이 조금 불편할 뿐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정비를 마치고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스위치를 올렸다. 그런데 플래터의 속도가 너무 느리다. 도착하자마자 확인한 플래터의 속도는 정상이었는데 분해 조립이 끝나고 나니 속도가 턱없이 느려진 것이다.
두말 할 것 없이 분해 조립 과정에서 뭔가가 잘못된 것이다.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생각해봐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 속도가 턱없이 느려졌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모터도 정상으로 돌고 플래터도 문제가 없는데 속도만 느리다. 당장 답을 찾으려고 고민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라서 그대로 두고 이틀을 보냈다. 그리곤 다시 작동을 해보니 역시 속도가 턱없이 느리다. 스핀들 베어링을 확인해 보려고 벨트를 풀고 플래터를 들어냈다. 역시 베어링에는 아무 문제도 없다. 어렵게 벨트를 걸고 돌려보니 이번엔 감쪽같이 정상 속도가 나온다. 아니, 뭐 이런 경우가 있나 싶었다. 만진 것이라고는 벨트 밖에 없어서 벨트를 자세히 살펴 보았다. 보통 고무벨트와 달리 앞면과 뒷면의 질감이 달랐다. 벨트를 뒤집어 연결하면 마찰력이 달라져서 플래터 속도가 아주 느려지는 것이었다.
벨트는 50년이 다 되는 세월이 무색할 만큼 완벽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일반 고무재질이 아니었다. 벨트는 굵기나 두께가 무척 균일하게 제작되었다. 보통 벨트 드라이브 방식은 모터의 진동이 플래터에 전달되지 않는 장점이 있지만 벨트가 균일한 두께와 폭으로 제작되지 않으면 플래터가 일정한 속도로 돌지 못하고 느린 주기로 너울거리면서 돌게 된다. 이런 이유로 수천 만원하는 하이엔드 턴테이블에서는 보다 정밀하고 균일하게 제작한 고가의 벨트를 사용한다. 지금껏 보아온 무수히 많은 벨트 가운데 균일성과 내구성에서 SLT-12를 능가하는 벨트는 보지 못했다. 우스코탄(Uscothane)이라는 당시 신개발 물질로 특별 주문한 SLT-12의 벨트는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지만 마란츠의 음에 대한 열정과 집념의 결과물이다.
마란츠 SLT-12는 플래터와 모터, 플로팅 서스펜션이 비슷한 엠파이어 턴테이블과 격이 달랐다. SLT-12는 비슷한 시기에 발매된 토렌스 124나 가라드 301에 비해 휠씬 비싼 가격으로 299달러나 했다. 문제라면 슈어의 V15 TYPEⅡ 카트리지 밖에 장착할 수 없는 기계식 리니어 트래킹 톤암이라는 점이다.3) 헤드셸을 개조하고 무게 추를 추가해 일반 카트리지를 달게 하거나 과감히 포기하고 일반 톤암을 추가로 장착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도 생각해 볼만 하다.4) 간이로 톤암 베이스를 만들어 들어본 SLT-12의 소리는 엠파이어 298과는 비교할 수 없이 고급스러웠다.
이 정도 턴테이블까지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라면 톤암을 정해서 장착하는 일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SLT-12의 소리는 톤이 굵지도 가늘지도 않은 적당한 수준으로 배경이 깨끗하고 잡음이 거의 없는 자연스러운 소리를 내준다. 하이엔드와 빈티지 음의 중간쯤에 위치하는 소리로 마니아의 도전 의욕을 불태워볼만 하다. SLT-12는 앰프로 쌓은 마란츠의 명성에 손색이 없는 훌륭한 사운드를 내주는 턴테이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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