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음반을 사전 지식이나 정보없이 일단 사보는 스타일입니다. 사서 들어보고 판단하는 편입니다. 남들의 평가가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선입견으로 작용하기도 하기 때문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편입니다.
어떻게 보면 선입견 없이 순수하게 자기만의 취향을 찾을수도 있지만, 다르게 보면 하지 않아도 될 개고생을 사서 하는 미련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똥인지 된장인지는 냄새만 맡아도 충분히 알수 있는데, 그걸 굳이 가까이 가서 맛을 볼 기세로 호기심을 보이는 이상한 인간인 셈입니다.
이런 성격 탓에 안사도 될 음반도 사고 안해도 될 것들을 직접 해본다고 시간과 에너지를 쓸데없이 소모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닙니다. 그래도 원래 그렇게 생겨 먹어서 그런지 남의 의견에 그다지 신경쓰는 편이 아닙니다. 가끔은 이성적으로 고쳐야지 생각하기도 하지만 잘 고쳐지지가 않습니다. 물론 오랜시간을 두고 의견을 나누고 갑론을박을 한 지인들의 의견은 어느정도 참고를 하긴 합니다.
그동안 음반을 사 모으면서 음질에 질려버렸던 레이블이 몇이 있습니다. VOX가 듣기도 거북한 음질로 대 여섯 번을 실망 시켰고, Nonsuch가 참을수 없을 만큼의 얕고 빈약한 음질로 정을 떨어지게 한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VOX도 일단 대역이 아주 좁고 해상력이라고 하는 단어를 붙이기도 민망한 음질을 보여줍니다. Nonsuch는 대역이 VOX 만큼은 아니지만, 한마디로 싼마이 음원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소리를 들려줍니다. 가볍고 얕아서 이게 과연 LP 소리가 맞나 싶을 정도입니다. 쓰다보니 속쓰린 기억을 만들어준 ROCOCO 라는 복각 전문 레이블도 기억 납니다. 하여간 다시 보기 싫은 레이블입니다. 엘피 랙 구석에 아직도 자리를 굳건히 차지하고 버티고 있을 것입니다.
일요일 개천에서 낚시 포인트를 차례로 돌아다녔습니다. 포인트 중에서는 맨 끝자락에 있지만 가요와 팝을 이따금씩 가지고 나오는 노점이 있습니다. 2번 가면 1번 꼴로 엘피를 가지고 나옵니다. 시간이 넉넉치 않지만 하던대로 들렀습니다.
엘피가 들어있는 박스를 보고는 제가 '오늘은 판을 가지고 나오셨네요!'라고 한마디 하나 주인장이 '클래식이라서 건질게 없을 거예요?' 라고 합니다. 일단 자세를 잡고 판을 뒤지기 시작합니다. 판의 레파토리가 심상치 않습니다. 바이올린을 위주로 첼로가 약간 섞여있습니다. 현악 판들만 모여있기기 쉽지 않은데 아주 드문 경우 입니다. 아마도 현악 연주자이자 엘피 애호가의 컬렉션이 한번에 나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라이센스지만 이 판이 보입니다. 안 잡을 수가 없는 판이죠. 뒤지다 보니 이판도 보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어디서 본듯한 느낌이 듭니다. 일단 챙겨봅니다. 계속 현악 판만 나오는데 이미 있는 판이거나 흥미를 끌지 못하는 판들이 보입니다. 그러다가 이 판을 보게 됩니다.
재킷만 봐도 느낌이 확실히 옵니다. 특히 앞서의 라이센스 판과 같은 레파토리가 있으니 비교해서 들어보기에 안성맞춤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레이블이 싸구려 소리의 대명사 레이블인 Nonsuch 입니다. 고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판을 들고 잠시 고민과 회의에 빠집니다. Nonsuch에 당한게 한두번이 아니기에 생각이 복잡해집니다. 그러다가 재킷 겉에 붙은 First Recording이라는 스티커를 보고는 그래 한번 더 속아 보자는 심산으로 잡았습니다. 어쨌든 초반 일테니 말입니다. 다행히 판상태는 민트급이더군요.
집에 와서 다른 궁금한 음반은 들어 봤지만, 이 음반은 손이 가질 않더군요. 그러다 하루 지난 어제 늦은 밤에 그래 또 속았겠지 하는 심정으로 턴테이블에 이 판을 올렸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맨 처음 사진에 올라온 음반에 같이 있는 악마의 트릴 연주를 비교나 해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첫 소리가 나오자마자 ' 이건 뭐지!' 라는 짧은 탄성이 나오더군요. 잘 벼려진 예리한 칼날로 거침없이 나무를 쳐내면서 예술 작품을 깍아내는 예술의 경지에 이른 장인의 솜씨를 칼 솜씨를 보는 듯하게 바이올린을 다루더군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활을 켜서 분명히 귀에 다소 거슬리게 느껴질만도 한데 부담스럽기는 커녕 귀가 쫑긋해지면서 집중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내가 알던 넌서치(Nonsuch)의 음질이 아닙니다. 예리하게 날카로우면서도 귀를 피곤하게 하지 않는 극강의 해상력을 보여줍니다. 연주도 나무랄데 없습니다. 다음 연주는 어떨까 하는 기대 속에 판 한장을 순식간에 다 들어 버렸습니다.
놀라움과 기쁨 속에 다시 한번 더 들으면서 아! 이거야 말로 오디오 파일 음반이자 명연주 음반이 아닌가 싶더군요.
쓰레기 레이블이라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구입했는데, 극적인 반전을 보여주었습니다. 아! 내가 아는게 정말 편협한 경험에 으한 것이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발매 년도를 보나 1979년입니다. 이 시기 이후의 넌서치 음반 유념해서 봐야 할것 같습니다.
똥반 레이블이라고 속단해서 사지 않았다면, 이 훌륭한 음질과 연주를 영원히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일요일 최고의 득템, 아니 올해 들어 최고의 득템이 아닌가 싶습니다. 세상은 넓고 음반은 정말 많고 다양한 것 같습니다.
혹시 보이신다면 잡으십시요. 혹여라도 마음에 안드신다면 제가 비난을 받아줄 용의가 충분히 있습니다. 오랜만에 귀를 확 트이게 한 명연이자 명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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