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황학동을 엘피 사러 돌아 다니는 것은 이제 일상사가 되었습니다. 25년 여를 엘피를 사러 다녀도 SP 음반은 쳐다 보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7인치 싱글도 쳐다보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시험 삼아 7인치 음반을 하나 사기는 했습니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초음파 세척기로 세척이 잘되는지 테스트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안 믿어지신다구요. 안 믿으셔면 어쩔 수 없지만 사실입니다.
어찌되었든 SP와 7인치는 나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나의 영역이 아니어야만 합니다. 오랫동안 그 많은 유혹이 있어도 SP는 사지 않았습니다. 물론 국악은 예외입니다. 그래서 아주 귀중한 SP 국악 음반이 40여장 있습니다.
지난 주말에 돌아다니다 우연히 가요판 파는 노점에서 SP 판을 보게 됩니다. 봐도 건성으로 보아 넘겨야 했는데, 궁금해서 열어 봤습니다. 솔직히 얘기하면 재킷이 있는 필기체의 사인 주인공이 궁금해서 였습니다.
역시 살짝 예상한대로 요셉 시게티가 바이올린 연주를 했더군요.
멘델스존 바협이 무려 4장입니다. 예전 같으면 그냥 덮고 나왔을텐데, 이상하게 사야 할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겁니다. 가요 판 대여섯 장을 고르고 나서 SP 판을 놓고 고민하고 있으니 주인이 선뜻 SP 가격을 반으로 낮춰 부르더군요.
그래도 사지 말았어야 했는데, 참지 못하고 사버렸습니다. 엘피 가방에 넣는데 부피도 크지만 무게가 장난이 아니더군요. 4장 전집인데 무게는 3배는 더 나가서 엘피 12장 무게와 비슷하더군요. 어깨에 부담으로 느껴지는 무게가 시간이 지나면서 통증으로 바뀌더군요. 후회가 살짝 들기 시작합니다. 이 무거운 것을 왜 샀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다음으로 들른 곳에서 건질 판이 많아서 또 적지 않은 양의 엘피를 사게 되었습니다. 이날 따라 산 엘피량이 많아서 양 손에 가득 들고 있어야 할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무겁디 무거운 SP 음반이 더욱 부담스럽더군요. 최근 몇년 안에 한번에 이렇게 많이 산적은 없었던거 같습니다.
간신히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와서 엘피 들고 오느라고 지친 몸을 달래려고 앉아 숨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왜? 25년 동안 안하던 짖을 했을까? 곰곰히 생각을 해봅니다. 저걸 내가 왜 사왔지? 미친 짖이 따로 없습니다. SP 음반까지 사 모으기 시작하면 정말 이건 내가 봐도 답이 안나오는 상황입니다.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 합리적인 이유가 생각나지 않습니다. 인간이 원래 합리적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긴 하지만 이건 이해가 안되도 심하게 안되는 상황입니다. 도대체 왜 안하던 행동을 하게된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머리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감정적인 이유라도 있어야 할텐데 그것도 없습니다. 정말 SP 음방까지 모으게 되는 상황은 상상하기 힘든, 아니 상상하기 싫은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이틀을 이렇게 '왜?' 라는 생각으로 보내도 딱히 생각나는 원인이나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오늘 퍼뜩 하나가 떠오르더군요.
얼마전에 지인의 턴테이블을 손봐주었는데, 이런 과한 선물을 주고 갔습니다. LEAK의 모노 톤암과 모노 카트리지 입니다. 더구나 모노용 말고 SP 용 카트리지까지 같이 선물했습니다.
빨간 딱지가 모노용이고 그 위에 있는 놈이 78회전 SP용 카트리지 입니다. 마침 렌코 88 턴도 얼마 전에 구해서 손보고 있는 중인데,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모노전용 턴테이블과 톤암 카트리지가 갖춰지게 되는 상황입니다.
이런 구성을 머리 속에 그리고 있었고, 이 시스템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이 무의식 속에 꿈틀대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평소 같으면 보기만 하고 내려 놓았을 SP 판을 집어들고 오게 만든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 이제 상황은 대충 그림이 나왔는데, 이걸 어떻게 잘 요리해서 문제없이 끌고가야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정말 국악과 시험용으로만 SP를 사게 되야 할텐데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 마음이 문제 입니다.
언제나 철이 들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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