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느즈막히 일어나서 음악을 듣기 시작합니다. 우선 장시간이라 듣기를 미루어 두었던 성창순 명창의 심청가를 올립니다.
얼마전에 산 음반인데 박스반이다 보니 판상태가 좋습니다. 첫장 1면부터 듣기 시작합니다. 심봉사 집안이 원래 명문가 였다는 얘기로 시작을 합니다.
들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성창순 명창은 정말 보통 사람의 목소리입니다. 판소리의 소리가 클래식의 성악과 달리 자연스러운 탁한 발성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김소희나 박귀희, 안향연, 안숙선의 목소리는 각자 개성과 매력이 있는 소리로 천상 소리꾼의 목을 타고 났다는 것을 첫소리를 듣는 순간 알게 됩니다.
성창순 명창은 목소리에 색기(?)도 없고 우렁차지도 않고, 그냥 평범 그 자체입니다.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가수의 목청이 전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성창순 명창의 소리는 보통의 목을 타고난 사람이 지극정성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보여줍니다.
성창순 명창의 아버지는 성원목 선생으로 북반주로 유명한 고수였습니다. 더구나 앞집과 옆집이 권번의 기생집인 탓에 갓난아기 때부터 소리를 듣고 자랐습니다. 댓살이 되면서부터 소리를 곧잘 따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를 따라 '나무꾼과 선녀'라는 창극을 보고는 명창의 꿈을 키우게 됩니다. 소리를 하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완강하게 반대를 합니다.
지금이야 여류명창 어쩌고 하지만, 당시만 해도 여자가 소리를 한다는 것은 기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런 취급을 받던 시절입니다. 성공해서 대명창이 되면 그래도 좀 낫지만, 그렇지 못하면 평생 기생 취급 받는 것이 여자 소리꾼의 운명입니다. 딸이 기생되기 십상인 여자 소리꾼으로 인생을 살아가길 원치 않았던 아버지의 심정도 이해가 됩니다.
아버지가 완강하게 반대를 하지만 꼬맹이 성창순의 고집과 집념도 만만치 않습니다. 어머니를 조르고 졸라서 소리를 배우고 싶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딸의 간절함에 원풀이 해준다는 생각에 아버지 몰래 소리를 가르치는 공기남 명창에게 딸을 데려갑니다.
어린 성창순이 셀레는 마음으로 욕심껏 소리 한자락을 합니다. 소리를 듣고는 공기남 명창이 충격적인 얘기를 합니다. '소리할 목청이 아니니 이쁘게 잘 키워서 시집이나 보내라!'고 말입니다.
아마도 고수였던 아버지도 공기남 명창도 무수히 많은 소리꾼의 소리를 들었던터라 딸이 소리꾼의 목청을 타고나지 않았다는 것을 아주 잘 알았을 것입니다. 타고난 재능이 없는 사람이 열정만으로 해낼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그토록 반대를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소리를 배우겠다는 열망으로 아버지의 반대를 무릎쓰고 소리를 배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아픈 명창이 있으면 병수발을 자처해서 소리를 배웠고, 하녀나 식모가 하는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소리에 대한 열망을 채워갔습니다.
김소희 명창에게서 춘향가를, 김연수 명창에게서 심청가와 단가를, 박록주 명창에게서 흥보가를, 정응민 명창에게서는 수궁가를 배웠습니다.
성창순은 스스로의 목을 슬픈 계면조의 청이라 심청가가 잘 맞는다고 생각해서 심청가를 오래 수련한 끝에 제5대 심청가 무형문화재로 지정이 되게 됩니다. 이 때 나이가 58세에 이르러서 입니다.
성창순 명창은 특이하게도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습니다. 판소리에 나오는 많은 사자성어와 한문 어휘의 의미를 알고자 한문 공부를 하다가 서예까지 배우게 됩니다. 신호열 선생을 사사까지 하고 서예국선에서 신인상까지 받습니다.
윗 사진의 LP에 있는 심청가 라는 글씨와 성창순 증정 글씨는 성창순 명창의 손수 쓴 글씨입니다.
성창순 명창의 소리는 귀를 집중시키는 현란한 매력이나 타고난 목청에서 나오는 카리스마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LP 4장을 연달아 들었습니다. 특색없는 목소리지만 은은한 맛에 계속 듣게 됩니다. 들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머물고 맴돌다 흘러갑니다. 평생을 우직하게 살아온 명창의 소리를 들으면서 말입니다. 무엇인가에 꽂혀서 평생을 끌고 나가는 끈기와 저력을 보여준 명창의 담담하면서도 심지 깊은 소리를 듣고 있자니 왠지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너는 어떻게 살건데?' 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게도 됩니다.
새해 첫날 이렇게 마음을 다스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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