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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얼마나 예민한가?

by onekey 2024.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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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머리[오디오일반]

당신은 얼마나 예민한가?

 
출처
 

당신은 얼마나 예민한가? 1

대한민국 모임의 시작, 네이버 카페

cafe.naver.com

 

취미가 오래되다 보니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초보 때는 재미삼아 음악 듣고 오디오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심각하게 음악을 듣고 소리를 쫒아 오디오에 몰입하는 사람을 만나는 빈도가 많아졌다.

누군가는 소리가 차이를 귀신같이 찾아내는 오디오 친구를 '박쥐의 귀를 가진 친구'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귀가 예민한 사람들을 보면 타고난 경우도 간혹 있지만, 후천적인 경험과 노력으로 그렇게 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귀가 예민하다고 했지만 사실은 귀는 소리를 받아 들이는 마이크에 불과하다. 귀에 들어온 소리의 차이를 인식하고 해석하는 것은 전적으로 두뇌의 작용이다. 그래서 선천적인 면보다는 후천적인 경험과 훈련에 의해서 터득하게 되는 것이다.

나의 경우도 후천적인 경험으로 소리의 차이를 인식하게 되었다. 오디오 시작할 때 같은 음악을 반복해서 들으면서 소리의 차이를 찾아내려고 끊임없이 집중했었다. 처음에는 케이블을 바꾸고 나서 다시 같은 음악을 듣고도 차이를 잘 몰랐다.

케이블을 사면 원래 것으로 듣고 바꾼 다음에 다시 듣고를 반복했다. 차이를 찾아 낼 때까지 반복해서 들어야만 했다. 이런 시간이 계속되면서 반복해서 듣는 회수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언제부턴가 음악을 듣고 케이블이나 바꾸거나 액세서리를 끼우고 듣기만 해도 그 차이를 충분히 느끼게 되었다. 다시 원래의 소리를 들을 필요가 없었다. 한번의 시청 만으로도 그 차이의 대부분을 바로 알게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디오 시작하고 10년쯤 지나고 나서부터인 것 같다. 이 때 부터는 남의 시스템을 듣거나 시청회를 가면 자연스럽게 소리의 특징을 파악하게 되었다. 소리를 듣는 예민함은 갖추었다고 해도 모든 면을 다 예민하게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저음의 리듬과 음정 표현은 상당히 예민하게 듣는다. 하지만 고음은 상대적으로 귀를 피곤하게만 하지 않으면 된다. 물론 고음이 귀를 피곤하게 하지 않는 것도 정도의 문제다. 내가 고음에 너그러운 편이지만 이것 조차도 다른 사람에게는 아주 까다로운 것으로 보일수 있다.

보통은 사람의 목소리 즉 보컬에 민감한 편이지만 나는 보컬보다는 바이올린 소리에 가장 민감해서 잠깐만 비교해서 들어도 미세한 차이를 곧잘 알아챈다. 성악보다는 기악을 좋아하다보니 연주회장에서 바이올린과 첼로 소리를 많이 들었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아는 재즈 피아니스트이자 프로듀서는 음악의 템포와 좌우 밸런스에 대해서 유독 예민하다. 옆에서 보고 있으면 인간의 한계가 과연 어디까지 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이 뮤지션은 아직도 20년도 더 지난 카세트 덱을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있다. 언젠가 속도가 조금 느려졌다면서 수리할 곳을 찾고 있었다.

수리점에 가서 스피드 체크 테이프를 넣고 체크를 했는데, 결과는 정상 수치 이내라 수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 뮤지션은 분명히 느려져서 듣기가 거북하다는 것이다. 내가 신품을 살것을 권했더니 고개를 가로 젖는다.

이미 새로 사볼 요량으로 용산을 한바퀴 돌았는데 스피드가 맞는 카세트 데크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다. 아니 신품이 스피드가 안맞을 수가 있냐고 물으니 분명히 그렇다는 것이다. 나중에 알아보니 공장에서 출고시 스피드를 체크해서 내보내는데, 일정 범위 안에 들어가면 합격으로 보고 출고를 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10대 이상을 까서 일일이 레퍼런스로 사용하는 테이프를 넣고 들어서 골라야 간신히 스피드가 맞는 걸 찾을수 있다고 했다. 신주단지 카세트 덱도 20년 전 미국 유학시절 많은 신품 카세트 덱 속에서 우연히 찾아서 구입한 것이라고 했다. 작곡과 연주를 오래 했고 음반 제작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터득된 것인데, 가끔은 불편할 때도 있다고 했다.


이 그림처럼 흐릿하고 애매하게 보는 것을 훈련을 통해서 돋보기로 보듯이 좀더 선명하고 명확하게 보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걸 보면 인지 능력의 한계를 나타내는 수치는 보통 사람들의 평균치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싶다. 사람마다 시력이 다르듯이 예민함도 차이가 심하다.

간혹 오디오 매니아 중에서 소리에 대한 예민함이 평균치 이하인 경우도 있다. 소리에 대한 민감도가 떨어진다고 오디오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소리차이에 대하여 민감하지 않아도 음악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맥락이 연결되지 않으면서 이해하기 힘든 바꿈질을 충동적으로 아주 빠른 주기로 하는 경우는 평균치 이하의 예민함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경우는 살짝 안타까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경우도 집중해서 듣기만 한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예민함을 갖게 될 것이다.

만남의 대부분이 오디오와 음악을 매개로 이루어지다보니 다양한 오디오 매니아를 만나게 된다. 자연스럽게 음악과 소리에 대해서 얘기하다보면 상대의 예민함이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아! 이 사람은 음악 연주에 아주 예민하다든지, 이 사람 목소리에 민감하다든지, 저 사람은 배음이나 뉘앙스에 집착한다든지 이런 식으로 말이다. 지금까지 만나보면서 이 사람은 나보다 소리에 더 예민하다고 느껴지는 사람은 한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다.

이번에 얘기하고자 하는 사람이 확실하게 나보다 더 예민하다고 느끼게 된 시점은 이 사람이 주도했던 시청회에 참석했을 때다. 쌀쌀한 가을 저녁 이었는데, 스웨터를 입고 시청실에 들어섰다. 나를 보자마자 놀라면서 스웨터가 흡음이 많이 되서 세팅한 소리와 달라진다고 한다. 그러면서 엘피 판 재킷을 주고는 나오지도 않은 배를 가리는 자세로 붙잡고 앉아서 시청을 해야 한다고 했다. '이건 뭐지?' 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당연히 내가 가져온 가방은 천재질이라 시청실에 있는 물품 보관함 속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이 사람의 행동이 과장된 설레발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관되게 행동하는 것을 보면서 오버하는게 아니라 정말 예민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청을 시작하기 전에 조정할 것이 있다면서 바쁘게 시청실 안 이곳 저곳을 분주히 왔다갔다 했다. 물체의 위치와 각도를 바꾸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나의 눈은 시청실 여기저기로 향한다. 벽면을 감싸고 있는 수만장의 엘피가 음향적으로 괜잖은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기기들 위에는 작은 크램프가 2개씩 놓여져 있다. 강의도 겸하는 시청실인데, 의자 일부는 구석에 가지런히 정리가 되어 있고, 정수기에 거꾸로 박혀있는 생수통은 천으로 감싸져 있다. 플라스틱 쓰레기통도 표면에 무언가 자그마한 물체가 붙어 있다. 화장실 문 유리에도 작은 물체가 붙어 있다.

10평에 가까운 시청실에 단둘이 있는데, 첫 음이 나오자마자 혼자 있을 때와 소리가 달라졌다면서 다시 부산하게 물체들을 옮기고 방향을 바꾸는 일을 반복한다. 참 못말리는 예민함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면 '병이 아닌가?' 싶은 느낌이 들었다.

음악은 엘피를 주로 해서 들었다. 듣는 동안 이런저런 소품들을 만지고 움직였지만, 내눈에 들어오는 것은 레코드 위에 얹는 작은 액세서리였다. 레코드 스태빌라이저라고 하기에는 좀 작고 클램프 정도라고 하기에 적당한 크기였다. 아나로그를 좋아하는지라 유심히 살펴 보았다.

 

이 클램프가 올려져 있을 때는 없을 때에 비해서 소리에 약간 더 집중이 되고 악기의 음상이 살짝 더 속이 알차진 느낌이 들었다. 작고 가벼운 클램프가 미치는 영향이 예상보다는 커서 관심이 갔다.

이날 들은 소리는 내가 좋아하는 취향의 소리는 아니었다. 악기들이 앞으로 다소 나온 포워드한 소리로 입체감이 강조된 그런 소리였다. 악기의 미세한 여운이나 질감이 다소 거칠고 불분명하게 표현되었다.

턴테이블과 톤암, 카트리지를 빼고는 기기들의 수준이 중급기 수준이었다. 소리는 분명 이런 중급기들이 낼수 있는 수준 그 이상의 것이 확실했다. 내가 좋아하는 소리가 아닐지라도 소리의 수준은 정확하고 솔직하게 판단해야 한다. 만약 나보고 이 기기를 주고 이 정도의 소리를 뽑아 낼수 있냐고 한다면, 나는 단언코 '할수 없다'고 답을 할 것이다. 그 정도로 기기의 수준을 넘어서는 소리를 내준 것은 맞다.

소리에 대한 의견을 물어서 앞서 느낀대로 얘기를 했다. 그랬더니 며칠 말미를 주면 원하는 소리로 바꿀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보통 예민한 사람들은 특유의 예민함에서 기인하는 성격 탓에 조심스럽고 신중한 편이다. 그런데 며칠 만에 기기를 바꾸지 않고 원하는 소리를 만들 수 있다고 장담하다니 '도대체 이 독특한 캐릭터는 뭐지?' 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며칠 뒤 다시 초대를 했는데, 사실 갈지 말지 살짝 고민을 했다. 별반 달라지지 않은 소리를 듣게될 것이 뻔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장담을 한게 있으니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해서 시청실로 향했다.

오디오 기기 자체는 하나도 변한게 없었다. 케이블에 차폐제로 튜닝하고 액세서리를 더 투입하고 소품들을 조정 했다고 했다. 우선 앞으로 과도하게 나오던 음상이 스피커 연결선과 그 뒤쪽으로 들어갔다. 음상의 크기도 줄어들었고 음색도 차분해졌다.

특히 엘피에 올려놓는 클램프와 턴테이블에 올려진 액세서리가 소리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액세서리를 놓는 위치를 바꿔가면서 최상의 소리를 내기 위해 며칠동안 하루종일 매달렸다고 했다.

소리는 전체적으로 전혀 다른 소리로 탈바꿈되었다. 무엇보다 많이 자연스러워 진 것이 가장 큰 변화였다. 한마디를 물으면 두세 마디를 얘기하는데 약간 정신 없을 정도로 소리 변화의 포인트를 설명하는 것이다. 참 예민하기도 하지만 독특한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만남 이후 한동안 연락이 없었다. 한참 후에 이상한 나무박스를 들고 찾아왔다. 나무 박스만으로는 내용물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고급스런 나무 상자 속에는 예전 시청실에서 본 레코드 클램프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나도 레코드 스테빌라이저를 10여개 가지고 있는데, 이렇게 여러 개가 세트로 된 제품은 본적이 없다. 스태빌라이저는 크게 두가지 기능을 한다. 무거운 무게로 회전 안정성을 높이고 진동을 억제해서 소리를 차분하게 하는 기능이 그 하나다. 두번째는 스테빌라이저의 재질에 따른 음색의 변화다. 알루미늄은 알루미늄 특유의 밝고 화사한 소리를 스며들게 하고 흑단 같은 목재는 단정하면서도 목질감있는 음색을 내준다.

문제는 이런 스태빌라이저 마다의 특성 때문에 클래식에선 좋던 것이 재즈에는 어색해진다. 도이치그라모폰처럼 고음이 쎈 음반에는 무거운 것이 좋은데, 중역이 두툼한 콜롬비아 음반에는 무거운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때 그때마다 적당한 것을 골라서 얹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걸 다 기억하기도 힘들고 번거로워서 무난한 놈 하나를 주로 사용하게 된다. 아주 특이한 성향의 음반을 들을 때나 적당한 것을 찾아서 가끔 사용하곤 했다.

이 사람의 시청회 때도 어떤 음반은 정말 좋다는 느낌이 있었지만, 다른 음반은 그만큼의 만족이 오지 않았다. CD 도 녹음과 믹싱 마스터링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느냐에 따라서 소리가 달라지긴 하지만, 음반 마다의 편차는 엘피 레코드에 비하면 확실히 적은 편이다.

LP는 레이블마다 편차가 크다. 심지어는 같은 레이블이라도 엔지니어가 작업했고 어느 공장에서 찍었느냐에 따라서 소리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레코드는 CD 와 달리 레이블마다 소리편차가 심하다. 같은 레이블이라도 엔지니어가 어떻게 믹싱과 마스터링을 했는가에 따라 소리가 달라진다. 더 나아가 어떤 커팅머신을 사용했는지 어떤 프레스머신으로 찍었는지에 따라서도 소리가 달라진다.

열개가 넘는 레코드 클램프 세트를 보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이 예민한 친구가 어떻게 이것을 만들게 되었는지가 머리 속에 그려졌다. 좋아하는 판 한장을 턴테이블에 올리고 최고의 소리를 뽑아내기 위해서 병적일 만큼 예민한 감각을 총동원했을 것이다. 레코드 클램프 크기를 살짝 키우기도 했다가 줄여도 봤다가 조이는 나사를 세게 조였다가 느슨하게 조였다가를 수도없이 반복하면서 시청을 했을 것이다.

스핀들 꼭지가 끼워지는 가운데 구멍도 꽉끼게 했다가 키워서 헐렁하게도 했다가 했을 것이다. 밑판의 아크릴 가공도 정밀도를 높였다가 낮추어 봤다 했을 것이다. 흔히 이런걸 '안봐도 비디오'라고 한다.

이런 지난한 과정을 거쳐서, 아니 정확히 말하면 오랜시간 개고생을 해서 본인이 납득할 만한 소리를 뽑아냈을 것이다. 그런데 최고의 소리라는 것을 완성한 기쁨을 즐길 사이도 없이 곧바로 황당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이렇게 좋은 소리가 나는데, 다른 엘피는 어떤 소리가 날까 궁금해서 레코드를 바꾸어서 소리를 들어보니 '이건 뭐야?' 라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이런저런 시도를 통해서 기껏 소리를 맞춰 놓았는데, 레코드가 바뀌면 소리가 도로아미타불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 레코드에서는 딱 맞아서 좋은 소리가 나는데, 왜 다른 레코드에서는 그 느낌의 소리가 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그를 괴롭혔을 것이다. 레코드마다 거기에 맞는 레코드 클램프를 만들면 되겠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만장의 레코드가 있다면, 한장 한장에 맞춰서 만개의 레코드 클램프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보통은 여기서 멈추게 된다. 그리고 멈추는 것이 현명한 결정이다.

이 병적으로 예민한 친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레코드에 따라서 효과가 달라져버리는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고민을 계속한다. 왜? 무엇이 다르길레 이 레코드에선 좋은 소리가 나는데, 다른 레코드에서는 만족스런 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일까?

한참의 고민과 의문의 날을 보낸 후에 레코드 클램프가 직접 접촉하는 레이블의 중심부에 작은 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 작은 원형 돌기는 레코드 클램프가 레코드 레이블과 직접 닿는 면에 있어서 접촉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어라? 레코드를 이것 저것 꺼내보니 이 써클 직경이 다 같지 않고 다르다.


한눈에 보기에도 이건 직경이 크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흔적인지는 알수는 없으나, 이것을 한번 파보아야 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수 많은 레코드의 써클을 일일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같은 레이블 안에서도 서클의 직경이 다른 경우가 있고, 레이블은 다르지만 서클의 직경과 형태가 같은 경우가 있었다. 또한 서클의 직경이 무수히 많이 있는 것은 아니고 대략 20여가지 정도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레코드를 레이블 위주로 분류하지 않고 순전히 이 작은 써클기준으로 나눈 후에 그 각각의 써클에 맞는 레코드 클램프를 만들어 보기로 한 것이다. 만들어서 실험을 해보니 서클이 같으면 레코드 클램프가 동일하게 최적의 소리가 나온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래서 레코드 클램프를 각각의 서클의 직경에 맞게 만들어서 레코드 클램프 상단에 수치를 새겨 넣기에 이르렀다. 제품을 만들면서 아크릴 가공이 원하는 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몇번을 다시 가공해서 최적의 가공 상태를 찾아내야 했다. 조이는 나사도 그대로 사용해서는 원하는 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정밀 재가공을 통해서 새롭게 만들었다. 보통의 하이엔드 업체가 하는 수준이 이정도 까지다.

이 친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나사를 조이는 강도를 무수한 실험과 비교 시청을 통해서 토크를 조정해서 최적의 토크점을 찾아냈다. 손의 감각으로 토크를 느끼며 하나하나 조립을 해야만 했다. 조립 후에 나사의 위치를 정확히 새겨두기 위해서 레이져 가공집에 다시 보내서 조여진 나사 머리의 방향에 맞춰서 레이저로 상판 알루미늄에 새겨 넣었다.


자세히 보면 나사머리에 새겨진 선과 알루미늄 상단에 새겨진 레이저 각인이 일치한다. 처음에 알루미늄 상단을 만들 때 새겨 넣은게 아니고, 적절한 토크로 나사를 조여서 제품을 완성한 후에 나사머리의 방향에 맞춰서 레이저로 새로 새겨넣은 것이다.

이렇게까지 할수 밖에 없었던 병적인 집착과 예민함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그나저나 여기서 정말 궁금한 것이 하나 있다. 레코드 레이블 중심에 있는 저 작은 서클은 왜 생겼으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도대체 왜 있는 것인가?

 

레코드 레이블 중심에 있는 작은 서클이 어떤 이유로 만들어 지는지 예민함 작렬인 이 친구는 모르고 있었다. 나는 대략 짐작은 어느정도 하고 있었다. 우연히 국내에서 엘피를 찍고 있는 공장을 방문하면서 정확히 이 서클이 왜 생기는지 확인하게 되었다.

 

이 사진은 프레싱 하기 직전의 상태다. 가운데 검은 도우넛 같이 생긴게 염화비닐 칩을 녹여서 만든 퍽이다. 이 퍽 아래 위로 레이블 종이가 붙어 있다. 레이블 바로 밑에는 금속 스탬퍼가 있다. 원형으로 은색으로 빛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퍽 위에 있는 레이블 위쪽 방향에도 금속 스탬퍼가 붙어 있는 틀이 대기하고 있다. 이 상태에서 위쪽에 있던 틀이 아래로 내려오면 말캉말캉한 퍽이 스템퍼 사이에서 압착되면서 레코드가 만들어진다.

 

이건 아래쪽 틀(몰드/Mold)을 근접에서 찍은 것이다. 여기에 스탬퍼를 얹게 된다. 중앙에 작은 고정핀이 보일 것이다.

 

이것이 스탬퍼다. 레코드는 12인치 직경이지만 스탬퍼는 14인치 정도로 상당히 직경이 크다. 큰 이유는 스탬퍼의 바깥쪽을 몰드에 단단히 고정해야하는데 그럴려면 바깥쪽으로 여유가 있어야 한다.

몰드에 스탬퍼를 얹고 고정을 해야한다. 바깥쪽 테두리를 고정하는 곳이 몰드에 있다. 이렇게 스탬퍼의 바깥쪽만 고정하고 말캉한 퍽을 놓고 프레스하게 되면 압착이 끝나고 몰드가 위로 올라갈 때 스탬퍼의 중심부분이 딸려 올라가게 된다. 이런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스탬퍼의 중심 부분도 몰드에 단단히 고정해야한다.

 

이게 스탬퍼의 중심부에서 스탬퍼가 몰드에 단단하게 붙어 있도록 잡아주는 핀이다. 위쪽에 사진에 있는 스탬퍼의 가운데 구멍에 이 핀이 끼워져서 스탬퍼가 몰드에 단단하게 붙어 있게 되는 것이다.

 

스탬퍼가 상하로 있으니 한세트가 가운데 말깡한 퍽을 사이에 두고 이런 모습으로 있게 된다. 가운데 가늘고 긴 봉은 예상하는 대로 레코드에 스핀들 구멍을 만들어내는 센터 핀이다.

자! 이제 정리를 하면 스탬퍼를 몰드에 고정시키는 중앙에 있는 핀이 스탬퍼를 고정하면서 스탬퍼와 이 핀사이에 생기는 작은 원형의 틈이 레코드에 나 있는 작은 서클을 생기게 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거의 모든 프레싱 머신은 거기에 사용하는 몰드를 지정하고 있다. 몰드마다 중앙에 끼워지는 핀의 크기가 다 다르다. 아주 큰 것은 레이블의 80%를 차지하게 큰 것부터 스핀들보다 아주 조금 큰것까지 다양하다.

 

이건 극단적으로 중앙의 고정 핀이 아주 크고 넓은 경우다.

 

이건 핀이 아주 작은 경우다. 간혹 일본반의 경우 서클이 두겹으로 난 것도 있다. 이건 핀을 개조해서 이단으로 고정하게 만든 것이다.

그런데 모든 프레스 머신은 사용할 몰드를 지정한다고 이미 밝혔다. 특별하게 몰드를 개조하거나 변형하지 않았다면 특정 프레스 머신의 몰드로 찍은 엘피는 두께와 질량이 거의 같다. RCA 레이블이든 런던데카 레이블이든 영국에서 찍었든 스페인에서 찍었든 상관없이 말이다. 같은 붕어빵 틀로 붕어빵을 찍으면 서울의 종로에서 김서방이 찍거나 제주도에서 왕서방이 찍거나 거의 같은 형태의 붕어빵이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사용하는 반죽이나 팥소의 품질, 굽는 불의 조절 솜씨 차이로 맛은 다를 수 있지만 말이다.

흥미로운 점은 프레스 공장이 큰 경우 같은 공장 안에서도 다른 종류의 프레스 머신이 동시에 가동되기도 한다. 그러면 같은 공장에서 찍은 레코드라도 다른 직경의 서클이 새겨진 레코드가 나오게 된다. 동일한 가수의 동일한 앨범도 대히트를 치면 단기간에 많은 양을 찍어야 하기 때문에 공장에 있는 모든 프레스머신을 가동해서 찍게 된다. 물량이 백만장 이상이라면 여러 공장에서 동시에 찍어야 주문량을 소화할수 있게 된다. 결국 다양한 종류의 프레스 머신으로 동시에 찍게 된다. 그러면 동시에 빌매된 같은 앨범이라도 프레스 공장과 머신이 각각 달라서 서클의 직경이 다르게 나올 수 있다.

레코드 레이블 중심에 있는 작은 서클은 레코드를 찍으면서 새겨지는 지문과 같은 것이다. 레코드의 매트릭스 넘버가 누가 어디서 커팅한 것인지를 알려주는 지석이라고 한다면, 중심부의 서클은 레코드라는 물건 그 자체가 어떤 기계로 찍혀 나왔는지를 알려주는 지문 같은 것이다.

이 예민한 친구가 우연히 집착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한 작은 서클이 그 레코드판을 찍어낸 프레스머신과 몰드의 흔적이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이 서클의 직경이 같으면 레이블과 장르를 불문하고 특정한 레코드 클램프를 올렸을때 물리적으로 거의 똑같은 효과를 내게 되는 것이다.

비유가 맞은지 모르겠지만 '소가 뒷발질하다가 쥐를 잡은 격'이라고 할만큼 우연치고는 상당히 재미있는 발견을 한 것이다.

앞에서 이미 밝혔듯이 서클의 직경에 딱맞게 튜닝된 레코드 클램프를 올리면 음악에 좀더 집중하게 되고 악기가 표현되는 음상의 핵이 실하게 꽉찬 느낌이 든다. 예민한 이 친구는 얹었을 때와 아무것도 없을 때의 차이가 엄청나다고 하는데, 나의 예민함으로는 차이가 분명히 있긴 하지만 천양지차 만큼은 아니다. 당연히 오디오 매니아 중에 그 차이를 못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런 사람은 축복을 받은 것일 수도 있다. 차이를 느끼지 못하면 사고 싶은 욕구도 전혀 생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레코드 클램프를 사용할 때와 사용하지 않을 때의 차이는 어느정도 숙련된 귀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 차이를 알수 있을 것이다. 나도 물론 그 차이는 어렵지 않게 느낀다. 그러나 이정도 차이를 느끼는 수준에서 나의 의심병이 멈추지는 않는다. 진짜로 서클의 직경 수치에 따른 차이가 존재하는지 확인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

예를 들어 서클 직경이 2.0 으로 된 레코드에 2.0 이 아닌 1.8이나 1.9 혹은 더 나아가 2.1이나 2.2를 얹고 소리를 들어보고 싶었다. 레코드 클램프는 사실 수치에 관계없이 기본 구조는 동일하다. 다만 아크릴 밑판의 크기와 가운데 구멍의 크기만 다를 뿐이다. 물론 눈에 보이지 않는 나사의 조임 강도나 그런 것을 다르게 했을 가능성은 존재하지만 말이다.

레코드를 정하고 레코드의 정해진 서클 직경보다 작은 수치의 클램프에서부터 차례로 윗 단계로 올라가면서 시청을 했다. 직경이 다른 레코드를 선택해서 역시 같은 방법으로 정해진 서클 직경보다 한참 큰 레코드 클램프부터 한단계씩 내려서 시청을 했다.

클램프 자체의 성능 확인 보다는 서클의 직경이 커지거나 작아지는 것이 어떠한 일관된 방향성을 가지고 소리가 변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역시 이 친구는 옆에서 차이가 많이 난다고 쉬지않고 얘기를 하고 있다. 좀 조용히 해달라고 부탁을 하고 시청을 했다. 나중에 이 친구가 간 뒤에 조용히 혼자서 다시 한번 시청을 하기도 했다.

여러 번의 집중적인 시청을 통해서 느낀 느낌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0인 레코드를 기준으로 설명하면 1.8이나 1.9를 얹으면 소리가 나쁘다고 할순 없지만, 왠지 자기 치수보다 작은 옷을 입은 느낌이다. 좀더 정확히 묘사하자면 겉옷이 아닌 런닝과 팬티를 자기 치수보다 작게 입은 느낌에 더 가깝다. 수치를 낮추면 낮출수록 스키니 진처럼 아주 타이트하게 꽉 끼는 옷을 입은 느낌이 강해진다. 오디오적으로 표현하자면 음상이 작고 단단해지면서 음상 주위의 여운이 적어진다. 울림이 자연스럽게 퍼져 나가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다.

반대로 2.1이나 2.2를 얹으면 자기 치수보다 큰 옷을 입어서 헐렁한 느낌이 든다. 오디오적으로 보면 음상이 커지면서 음상의 표면이 단단하지 않으면서 경계가 흐릿해지는 느낌이다. 울림도 살짝 과해져서 약간 풀어지는 느낌이 든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들 것이다. 아예 클램프를 얹지 않고 그냥 들었을 때의 느낌은 어땠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표현이 좀 거시기한데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팬티와 런닝을 입지 않고 나체로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분명 이런 느낌을 좋아하는 오디오 애호가도 있을 것이다. 나체로 있는게 우리가 태어날 때 본모습이겠지만, 나는 오래동안 런닝과 팬티를 입고 살아서 인지 나체 보다는 적당히 맞는 사이즈의 내의를 입은 느낌이 제일 편안하다.

앞서의 의문으로 돌아가서 정리해보면 레코드 클램프의 수치가 올라가고 내려감에 따라 음이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변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재미난 상상을 하자면 예민함 작렬인 이 친구가 지정한 수치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취향에 맞춰서 지정한 수치보다 일률적으로 한 단계씩 올려서 듣거나 내려 들을수도 있지 않나 하는 것이다.

개인의 취향은 존중되어야 한다.

 

보통 사람이 상상하기 힘든 예민함을 가진 이 친구의 행동을 꽤 오랜시간 지켜 보면서 예민함에 대한 의문이 증폭되었다. 예민함의 근원이 무엇인지? 왜 이친구는 이렇게 예민하게 되었는지? 고민이 안될 수가 없다.

십 수년 이상 오랜 기간 집중해서 올라올 수 있는 예민함의 수준을 이 친구는 어렵지 않게 넘어선다는 게 문제다. 그럼 우선 이 친구가 그런 노력의 과정을 자연스럽게 거칠만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친구의 직업은 평범한 은행원이다. 소리나 음악과 관련된 엔지니어도 아니고 연주자도 아니다. 심지어 오디오를 시작한지도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 물론 음악은 어려서부터 즐겨 들었다.

즐겨 듣던 음악도 팝에서 시작해서 하드락과 메탈을 집중해서 오래 들었다. 어려서부터 음악을 들어서 스피커 보다는 헤드폰과 이어폰으로 음악 듣는 시간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음악적으로 지극히 평범한 이력의 소유자다. 사실 오디오하는 사람치고 음악 20년 이상 들은 사람은 쌨고 쌨다. 오디오 매니아로 치면 정말 보통사람인 이 친구가 어떻게 예민함의 극한를 보여주는 사람이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음악이 좋아서든, 아니면 소리의 매력에 빠져서든 음악 듣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음악을 듣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모든게 과하면 탈이 나듯이 아무리 좋은 음악과 매혹적인 소리도 너무 크게 오래 들으면 탈이 나게 된다. 고막의 손상과 달팽이관의 노화를 촉진해서 난청을 유발하게 된다. 그런데 대부분은 고막이 손상되기 전에 뇌의 청각 중추에 이상이 생겨서 오늘 이명 현상이 먼저 찾아온다.

우리말로 귀울림이라고 하는 것으로 외부의 소리가 없는데도 귀에서 '삐~' 혹은 '찌잉~' 하는 잡음이 들리는 것이다. 단순한 잡음 외에 매미소리나 파도소리 같은 소리가 들린다고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

 

나도 며칠 계속 잠을 설치거나 과로를 계속하면 아주 작지만 귀에서 소리가 나는 경험을 한적이 있다. 물론 충분한 수면과 휴식을 통해서 바로 사라지는 수준이다.

이런 경미한 경우는 많은 사람들이 경험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적극적인 치료가 필요한 이명 환자도 생각보다 많다. 귀울림이 심해지면 일상 생활에 지장은 물론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에도 어려움을 겪게 된다. 시각과 달리 청각은 인간의 감정과 좀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감정과 정서적인 문제를 초래하는 경우가 많다. 이명이 심하면 일상생활을 할수 없음은 물론 아주 심한 경우는 자살에 이르는 경우도 보고 되고 있다.

이명은 치료가 쉽지않은 질병이다. 많은 병의원에서 치료 가능하다고 광고하고 있지만, 치료율이 높지 않은게 현실이다. 실제로 이명 초기의 경우는 완치 사례가 꽤 있다. 하지만 일년 이상 지속된 이명은 완화되는 경우는 많지만 완치되는 경우는 드물다.

예민함 작렬인 이 친구가 음악을 신나게 듣다가 어느 날 극심한 이명 증상을 보이게 되었다고 한다. 음악을 워낙 크게 오래 듣다가 찾아온 이명인지라 일상생활에 지장은 물론 회사에 출근할수도 없는 수준이었다. 이비인후과를 찾아갔으나 해결이 안되서 대학병원까지 수소문해서 진료를 받았지만, 차도가 거의 없었다.

조용한 집에서도 귀울림이 너무 심해서 외출은 당연히 불가능하고 창문을 닫고 커튼을 여러 겹해서 소음이 거의 없는 수준에 이르러야 그나마 견딜수 있을 정도 였다. 이런 고통의 시간을 보내면서 이걸 어떻게 고칠까 곰곰히 생각하게 되었다. 병원 치료가 효과를 보지 못하자 스스로 해결을 해보기로 한 것이다. 보통은 또 다른 용하다는 병원을 수소문해 찾아가기 마련인데, 여기서도 색다른 선택을 한 것이다.

기거하는 방을 암막커튼으로 가려서 한낮에도 밤처럼 어둡게 하고, 온갖 방음재를 사용해서 외부 소음이 최대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루 종일 지내는 것이다. 소리를 너무 많이 들어서 온 병이니 소리를 가능한 한 안들으면서 안정을 취하면 증상이 개선되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생각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막연한 기대 속에 어둠 속에서 며칠을 보내도 처음레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열흘이 지나면서 울리는 소리가 아주 조금이지만 줄어드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들을 수 있을거라는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 두어달이 지나면서 방에서 나와서 간단한 생활을 할 수준까지 좋아졌다.

이후로 서서히 좋아져서 지금의 상태에 이르렀다고 한다. 추측컨데 청각 중추에 엄청난 자극이 가해졌고, 그 결과로 청각 중추에 이상이 생겨서 뇌 스스로 소리를 만들어 자가발전하는 이명 증상을 초래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후 절대 안정을 취하면서 새롭게 뇌의 청각 중추에 세팅이 새롭게 이루어지면서 청각적 예민함을 갖추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원래 예민함이란 특정 자극에 과도하게 반응하는 것으로, 알러지나 트라우마와 관련이 깊다. 토마토 알러지가 있는 사람은 음식 속에 토마토가 아주 소량만 들어 있어도 귀신 같이 알아낸다. 토마토의 맛과 풍미에 감각을 발달 시켜야 알러지로 인한 고통과 심지어 죽음에 까지 이를 수 있는 위험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어린 시절 장난삼아 친구가 귀 근처에서 딱총을 발사했다고 하자. 예측이 되었다면 전혀 문제가 없는데, 전혀 예상을 하지 못했다면 소스라치게 놀랐을 것이다. 그로 인해 비슷한 상황이 되면 아주 예민한 반응을 하게 된다.

예민함은 어떤 면에서 약자나 약한 사람의 생존전략과 깊은 관련이 있다. 수십년 동안 거의 매일 기십명의 사람들에게 일정한 통증을 주는 일을 하면서 발견한 것은 체력이 좋고 긴장이 적은 상태에서는 통증을 크게 느끼지 않는다. 체력이 떨어져 있고 긴장한 상태에서는 동일한 자극을 주는데도 훨씬 아프게 받아 들인다. 외부 자극에 대해서 긴장 상태에 있거나 스스로를 방어할 체력이 떨어져 있으면 좀더 예민해지는 것 같다.

이런 점에서 보면 감각이 둔한 사람들이 체력도 더 좋고 외부 자극에 대해서도 휠씬 더 유연하게 대처하는 건강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후천적인 예민함도 그렇지만, 선천적인 예민함도 고통이나 질병의 영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다. 미묘한 소리의 차이를 기가막히게 찾아내는 이 친구를 보면서 만약 이 예민함이 더 심해진다면 더 고통스러운 상황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예민함은 그 분야에서는 축복 받은 것으로 여겨지지만, 실상 예민한 당사자에게는 번뇌와 고통을 안겨주는 숙명일수도 있다. 고흐나 슈만, 차이코프스키가 대표적으로 정신병으로 고생하다 생을 마감한 예술가다.

나는 이 친구에 비하면 덜 예민하지만, 그렇다고 나를 기준으로 정상과 비정상을 나눌 수는 없다. 예민함이 사람마다 다 달라서 스펙트럼처럼 펼쳐져 있는데, 어디까지가 정상이고 어디까지가 비정상이라고 단정할수 있겠는가?

비슷하게 생긴 레코드 클램프의 작은 차이를 소리로 그 차이를 인식 할수 있을까? 차이를 인식할 수 없다고 낙담할 필요는 없다. 그 미묘한 차이를 인식한다고 뽐내거나 자랑할 것도 물론 아니다. 각자 주어진 예민함 속에서 제일 좋다고 판단되는 선택을 하고 그것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해도 당신은 스스로 얼마나 예민한지 궁금할 것이다. 예민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부러워 할수도 있을 것이다. 예민함이란 당신 인생에세 제일 중요한 당신의 시간을 10년이상 쏟아 붓거나, 일상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고통을 수개월 이상 겪거나, 정서 불안과 감정적으로 불안정한 삶을 평생 살아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기꺼이 이 중 하나를 받아 들일수 있다면 당신은 예민함을 갖출수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다시 한번 묻고 싶다. 당신은 청각적인 예민한 감각을 갖고 싶은가? 예민함을 갖는 대신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을 10년정도 소모해야 하거나, 극심한 고통 속에서 수개월을 보내야 한다.

예민함이란 잊어도 좋을만큼 음악은 아름답다 . 예민함이란 걸 얻기 위한 고통이나 노력 없이도 음악은 충분히 아름답다. 음악을 듣는데 예민함이란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불편하게 하기도 한다. 당신은 얼마나 예민한가? 라고 마지막으로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