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다로운 오디오파일인 나를 만족시키는 케이블을 만든다.
이 종학 (Johnny Lee)
아직도 많은 오디오파일들에게 의문의 대상이 되는 것은 케이블이다. 흔히 “줄질”이라고 하는 케이블 교체는 튜닝의 결정체일 뿐 아니라, 그 결과물에 있어서는 시스템 컴포넌트 자체를 능가하는 일도 왕왕 벌어진다. 그러므로 오래 전부터 케이블에 관한 정보며 지식을 모으고 있는데, 그중 최근에 놀라운 기세로 전세계 애호가들을 사로잡는 회사가 있으니 바로 요르마(Jorma)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스웨덴의 공업 도시 요테보리를 근거로 몇 개의 오디오 회사들이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스웨덴 하면 아무래도 스톡홀름을 떠올리겠지만, 이렇게 서열 두 번째에 해당하는 도시에 여러 회사들이 발흥한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듯싶다.
그런 차에 S 수입상 A 사장의 도움으로 이 도시를 방문해서 마르텐, 블라델리우스 및 요르마를 각각 하루씩 집중 취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참 행운이라고 본다. 그 중 요르마는 두 번째 날에 만났는데, 전날 마르텐 형제들과 밤이 늦도록 술을 마신 덕분에 아침에 별로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일을 해야 했다.
참, 여기서 한 가지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간밤에 마르텐 형제들과 우리 일행이 멋진 저녁 식사를 무려 다섯 시간이나 걸쳐서 한 후, 잠시 소화도 시킬 겸 선착장을 산책했다.(무려 밤 12시에!) 이때 커다란 기중기며 공장 건물이 있는 지역이 강 건너로 보였는데, 그 휘황한 불빛과는 달리 인적이 거의 없었다. 대체 저기가 뭐하는 곳이냐 물었더니 요르겐이 이렇게 답해줬다.
“저긴 조선소입니다. 한때 3~4만명이 일을 했죠.”
“지금은 얼마나 있죠?”
“한 100명쯤 될까요?”
“세상에 ...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 질문에 잠시 요르겐이 미소 짓더니 손가락으로 날 가리켰다.
“당신 때문입니다. 바로 한국이 일감을 다 가져갔답니다.”
잠시 술이 깨는 기분이 들었다. 이내 택시가 도착하고, 다시 마르텐의 전시장에 가서 새벽 2시까지 음악을 듣는 사이, 그 일은 잠시 잊혀졌지만, 아침이 되자 다시금 머리에 떠올랐다.
그렇다. 지금 우리는 조선업에서 대단한 위용을 발휘하고 있다. 한때 요테보리가 그랬듯, 지금은 우리가 최고다. 하지만 이런 위치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다분히 노동집약적인 산업은 결국 중국이니 인도니 인구가 득실거리는 곳에 밀리게 되어 있다. 우리는 보다 기술 지향적이고, 하이 테크한 쪽으로 움직여야 한다. 어쩌면 이 방문은 그런 우리 미래의 청사진을 그려보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여담이지만, 선진국들을 방문해보면 작고 강한 세계적인 기업들이 많다. 가족 중심적인 곳도 있고, 몇 대씩 계승되어 온 기업들도 있다. 확실히 그런 곳을 방문해보면 선직국의 개인들이 강하다는 것을 느낀다. 지금 우리는 대기업 중심이지만, 언젠가는 이렇게 강한 개인을 필요로 하는 시기가 올 수 것이다. 요테보리에 자리한 이들 회사들을 조금 더 면밀히 관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케이블 회사는 오디오용을 전문으로 할 경우, 그리 많은 인력이 필요치 않는다. 그것은 요르마뿐 아니라 다른 여느 회사도 마찬가지여서, 의학이나 산업쪽과 연계되지 않는 한 한 두 명이 일하는 곳이 많다. 단, 튜닝에 오랜 시간이 걸리고, 이것저것 시험을 해서 체험적으로 얻어지는 데이터가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 긴 제조 공정과 노우 하우를 가격표에 반영할 수밖에 없다.
아무튼 요르마 케이블의 오너가 직접 차를 끌고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로 왔다. 바깥에는 가볍게 빗줄기가 흩날리고 있어서, 약간 날씨도 쌀쌀했고, 분위기도 좀 어두웠다. 이런 날에 차편이 해결된다는 것은 아무리 봐도 참 적절하다.
일단 인사를 하고 명함을 받아보고야 요르마의 뜻을 알았다. 바로 오너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요르마 코스키(Jorma Koski). 코스키라는 성이 러시아쪽인지 뭔지는 알 수가 없지만(알고 보니 조부가 러시아 백군 출신이란다), 일체의 군살이 없는 호리호리한 몸매에 강한 안광을 갖고 있어서 첫눈에도 호락호락해 보이지 않는다.
나중에 공장과 리스닝 룸을 탐방하면서 알게 되었지만, 그는 일과 생활, 취미 등 자신과 관련된 부분에서 일체의 흐트러짐이나 혼돈을 엿볼 수 없는 완벽주의자였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환경을 철저하게 컨트롤하고 정확한 결론을 내는 타입인 것이다. 그런 모습에서 최상의 전송을 모토로 하는 케이블이라는 제품의 성격과 얼추 일치하는 면도 보인다.
아무튼 그의 안내로 간단한 투어를 하고 점심을 든 다음, 공장에 가기로 했다. 덕분에 그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이 도시 구석구석을 간략하게 둘러볼 수 있었다. 이 도시의 역사라던가 주변 환경 등에 대해 듣고, 시내 중심에 있는 산에 올라가 도시 전체를 감상했으며, 시 외곽에 있는 호수에 가서 산책도 했다. 도심에 위치한 산은 고작 해발 100M밖에 되지 않는 낮은 언덕이다. 즉 이 도시는 거의 평야에 가까울 만큼 앞뒤로 펑펑 뚫린 형세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정상에서 보는 느낌은 작지만 알찬 도시라고나 할까?
여기서 배를 타면 덴마크는 3시간, 독일은 12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전략적인 요충지라 스웨덴은 이 땅을 차지하려 부단히 노력했던 모양이다. 요테보리라는 뜻도, 요테라는 성을 지닌 도시라고 하니, 일단 두텁게 성을 쌓고 방어하면서 발전한 도시라 이해가 되었다.
이렇게 도시를 둘러보고, 곳곳의 역사와 사연을 듣다 보니, 점차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특히 이곳이 볼보의 본거지일 뿐 아니라, 하셀블라드 카메라의 본산이라는 점도 알게 되었다. 사진 취미가 있는 사람치고, 이런 곳까지 와서 하셀블라드가 운영하는 전시장을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다음날 저녁 어렵게 시간을 내서 결국 전시장을 둘러보고 덤으로 미술관도 관람할 수 있었다. 콘스트무지엄(Konstmuseum)이라 불리는 이곳엔 북구뿐 아니라 프랑스 인상파의 그림도 상당수 전시되어 있어서, 솔직히 꽤나 놀랐다. 고호, 고갱, 르느와르, 모네 등 가슴 설레게 하는 작품들이 많아 역으로 이 도시가 얼마나 부유하면서 높은 심미안을 갖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날 점심을 먹기 위해 요르마가 안내한 곳은 시내 중심에 있는 피시 마켓이다. 옛날 교회를 개조해서 각종 수산물을 판매하는 코너가 가득하고 또 레스토랑도 함께 있어서 이 또한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제공했다. 그러고 보면 여기는 항구 도시. 당연히 수산물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 싱싱한 어패류와 생선을 보면서 육류 일색이던 중부 독일과 스위스의 밥상과는 달라도 한참 다르구나 실감했다.
식사를 마치고 요르마 팩토리가 있는 곳으로 향했는데, 거의 다다를 즈음 볼보 공장을 지나쳤다. 이 회사는 현재 스웨덴 소유가 아니다. 네덜란드의 스포츠 카 만드는 곳에 팔렸다고 한다. 어젯밤의 조선소 기억이 또 떠올랐다. 그리고 이런 거대한 산업 대신 작지만 강한 기업을 육성하는 쪽으로 이 나라의 산업 구조가 변모했다는 느낌이 왔다. 다시 우리나라의 미래가 떠올라 여러 상념이 든다.
아무튼 요르마의 공장은 자택 근처에 별로 지은 곳이다. 전문적으로 마무리를 하는 직원 한 명이 근무하지만, 의외로 공간이 크다. 각종 자재와 장비와 완성품을 효율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데다가, 요르마 특유의 꼼꼼함이 어우러져,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보는 재미가 상당했다.
말이 공장이지, 요르마 케이블이 만들어지는 곳은 저택을 개조한 것이다. 일단 입구에 들어서면 왼편에 무슨 수납장이 있는데, 문을 열자 빼곡히 각종 자재가 나왔다. 기본이 되는 케이블류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모든 선재는 요르마의 특주에 의해 스웨덴의 모 회사에서 제작되고, 실딩 처리는 미국에서 행해진다고 한다.
그 외 여러 단자도 보였는데, 싼 제품에는 리히텐슈타인에 근거한 노이트릭제가 쓰여지고 있었다. 최근에는 파워 코드도 선을 보인 바, 일본에서 안전 인증을 획득하기 위해 무척 고심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2년간의 노력 끝에 허가를 받은 바, 전세계 케이블 메이커 중 유일하게 일본에 파워 코드를 당당하게 수출할 수 있게 되었단다. 당연히 그에 따른 자부심이 대단했다. 실제로 파워 코드를 살펴보니, 단자는 일제 오야데제가 쓰이고 있었다. 스피커 케이블 단자는 WBT가 중심.
좀 단계가 건너뛰었지만, 수납장 뒤편으로 공간이 있길래 봤더니 바로 케이블을 에이징시키는 곳이 나왔다. 저가 케이블(모델 1, 2)은 대략 3일 정도, 고가는 대략 일주일 정도 에이징시킨다고 한다. 노도스트의 비다르라는 장비를 쓰고 있었는데, 상당히 효과가 있는 듯 보였다.
룸 안쪽에 들어가니 정식 작업장이 나왔다. 현재 선재 작업을 담당하는 분은 베른트 야우손(Bernt Jausson)으로, 원래는 진공관 전문가라고 한다. 요르마에 뜻이 맞아 제작에 임하고 있는데, 상당히 숙련된 솜씨로 작업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여기에는 작지만 알찬 기기들이 참 많았다. 에스 코트(ES Cort)에서 나온 ELC-3133A라는 제품은 인덕턴스, 캐패시터 등을 테스트하는 기기이고, 플루크(Fluke)는 인슐레이션 테스트기다. 코맥스(Komax)는 스위스제인데, 75오옴용 디지털 케이블의 단자를 박는 용도로 쓰이고 있다. 오로지 이 케이블 하나만을 위해 무려 5천 유로나 주고 구입한 장비라고 한다.
또 DANA라는 기기도 보였는데, 선재를 자르고 그 끝에 밴딩 처리하는 일을 한단다.
짐작했겠지만, 케이블 회사들은 앰프나 스피커 메이커처럼 대단한 장비를 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당히 미세한 작업을 하기 때문에 이렇게 작지만 성능이 확실한 기기가 필요한 것이다.
이어서 작업실 구석에 보니 또 다른 수납장이 나왔다. 요르마가 문을 열자 가벼운 탄성이 나왔다. 여기서 제작된 다양한 케이블들이 종류별로 수납되어 있는 것이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일 누군가 이곳에 침입한다면 제일 먼저 손을 댈 곳이다. 지금 이 회사는 각종 인터 커넥터, 스피커 케이블 등뿐 아니라 파워 코드며 디지털 케이블도 제작하고 또 등급도 여럿 있기 때문에 완성품을 보관하는 일 역시 상당히 꼼꼼해야 할 것 같다.
작업실이 1층에 있다면, 그 윗층은 현재 공사중인 곳이다. 여기에 요르마의 사무실이며 중요한 자재 보관함 등이 있기에 잠시 들러봤다. 창밖으로 한가로운 전원 풍경이 펼쳐져, 이런 세심하면서 또 집중을 요하는 작업을 하는 데에 참 이상적인 곳이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제일 먼저 들어간 곳은 각종 케이블을 담는 케이블 박스가 놓인 곳이다. 뭐 모델에 따라 케이스의 급수도 달라지겠지만, 상당히 정성들여 만들어진 케이스를 만져보니 무척 감촉이 좋다. 기본적으로 부피가 크기 때문에 이곳에 따로 보관하는 모양이다.
이어서 들어간 곳은 요르마가 직접 일하는 사무실이다. 아직 완성이 되지 않았지만, 여기에 들인 공은 상상을 초월한다. 무엇보다 벽 처리에 신경을 쓴 바, 이를 위해 2천년전 로마가 콜로세움을 지을 때 사용한 기법을 동원했다. 이 건물을 보면 알겠지만, 얼핏 보면 마블 덩어리를 깎아서 사용한 것처럼 보인다. 실은 마블을 갈아서 덧붙인 것으로, 그 기법을 응용해 벽 처리를 했다.
또 벽에 스피커가 하나 설치되어서 뭐 하는 용도냐 물어봤더니 경비를 위해 도입했다고 한다. 만일 누가 이곳에 침입하면 자동으로 문이 닫히고, 스피커에서 130dB의 고주파가 흘러나와 도둑은 귀를 막고 괴로워하다가 혼절한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평범한 집처럼 보이는 이 공장에 이런 철저한 경비 시스템이 설치되어 있다는 점이 놀랍다.
그리고 보니 방 곳곳에 카메라가 장치되어 있고, 인페르노 인텐시브라는 센서가 있으며, 심지어 연기가 터져 나오는 장치도 보였다. 얼마나 요르마가 철두철미한 분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한구석에 포스터가 놓여 있길래 잠깐 살펴봤더니 요르마가 얼른 보여준다. 이것은 전문 사진가의 작품으로, 그는 상당한 개런티를 받는 베테랑이라고 한다. 다행히 그가 오디오파일이어서, 대금은 자신의 케이블로 치뤘다고 하니, 서로 만족할 만한 거래라 여겨진다.
이번 탐방에서 제일 놀란 것은 바로 금고다. 여기에 현찰을 보관하고 있지는 않지만, 현찰보다 더 귀중한 자재들이 꼭꼭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만일 화재가 나도 1시간 정도는 너끈히 버틸 뿐 아니라, 온도 및 습도까지 조절하는 장치가 되어 있단다. 무게만도 무려 600Kg이 넘기 때문에 훔쳐가려고 해도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안에 들어있는 부품들은 최고급만 망라되어 있다.
이를테면 WBT에서 나온 0681cu라는 모델은 상당히 고가로 알려져 있는데, 이를 한번에 1천개씩 산다. 그 이유는 제품을 주문해도 생산에 시간이 꽤 걸리기 때문이다. 요르마에서 만드는 스피커 케이블은 단자와 연결할 때 절 때 납땜을 하지 않는다. 완전한 압착으로 만들어지기에 이런 고급 단자가 필수인 것이다.
또 동사를 대표하는 테크놀로지 중의 하나인 퓨리파이(Purify)를 위해 꼭 필요한 바이비 퀀텀 퓨리파이어(Bybee Quantum Purifier)도 여기에 보관되어 있다. 바이비 테크놀로지는 약 20년전에 설립된 회사로, 핵 잠수함을 위해 개발된 것이란다. 잠수함이란 결국 노이즈를 먼저 들키는 쪽이 끝장나는 시스템인지라, 이 제품을 쓰면 상당히 노이즈가 감소된다고 한다. 고작 4개 사는 데에 1천불이 든다고 하니, 이런 튼튼한 금고는 필수라 하겠다.
다양한 단자들을 보관하는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스피커용 퓨리파이어, 인터 커넥터용 퓨리파이어, 논 솔더링 단자류, 디지털 케이블용 단자류 ... 대부분 납땜을 하지 않는 논 솔더링 기법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한편 대체 퀀텀 퓨리파이어가 하는 역할이 뭐냐고 물어봤더니, 여러 면에서 탁월하지만 특히 소리를 다소 릴렉스하게 만들어준다는 답이 나왔다. 그러면서 다른 부분에 일체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하니, 이 대목에서 더욱 흥미가 유발되었다. 나중에 이 제품에 대해 좀 더 공부해야겠다.
“처음부터 돈 벌 생각을 했으면 이런 일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비싼 부품을 잔뜩 들여놔서 부담이 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대한 요르마의 답이다. 우문에 현답이라 하겠다.
인터뷰를 위해 요르마의 자택에 들어갔다. 부엌에 있는 큰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이것저것 물어볼 요량이었다. 그런데 입구에 면한 작은 방이 눈에 들어왔는데, 이곳이 그가 처음 케이블을 제작한 곳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일의 성격상 혼자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이 작은 방에서 혼자 연구하고 또 실험했다고 하니, 뭐가 숙연한 기분도 든다. 3평 남짓한 공간이 지금은 집 한 채 크기의 공장으로 발전한 부분에서 역으로 그의 제품이 얼마나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가를 증명한다 하겠다.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런칭하게 되어 축하합니다. 일단 요르마씨 개인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주시죠.
JK : 저는 1952년, 스웨덴에서 출생했습니다. 모친은 핀란드 분이시고, 부친은 러시아 분입니다. 출생지는 스웨덴 북부로, 거의 인적이 드문 곳입니다. 옆집에 가려면 무려 3Km나 걸어야 했으니까요.
-그런 환경에서 어떻게 음악을 접했는지 궁금합니다.
JK : 당연히 그 당시엔 TV가 있을 수 없었죠. 다행히 장전축 세트가 들어와 음반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또 57년부터 라디오 방송이 시작되었으므로, 여러 장르를 섭렵할 수 있었죠.
-개인적으로 오디오에 관심 가진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JK : 15~6세 무렵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더 나은 스테레오를 원해서 앰프를 직접 제작하기에 이르렀죠. 솔리드 스테이트 방식으로 만든 다음, 스피커까지 손을 댔습니다. 그러다 60년대 말, IMF라는 영국제 유닛을 구해서 트랜스미션 라인 방식으로 4웨이 스피커까지 만들었습니다. 이게 제가 자작한 마지막 작품이 되었죠.
-그 이후로는 정식 오디오 브랜드의 제품을 사용했군요.
JK : 그렇습니다. 부친께서 B&O를 사와서 한동안 들었고요, 이 제품은 나중에 뉴욕 현대 미술관에 전시될 정도로 디자인이 빼어나서 지금까지 소유하고 있답니다. 또 빌 마스터의 제품을 구해서 한동안 들은 기억이 납니다.
-최초의 하이 엔드 제품이라면?
JK : 바로 아큐페이즈입니다. 73년도에 E202이라는 모델을 구입해서 듣고는 그만 오디오파일이 되어버렸답니다. 당시 쓰던 스피커는 요테보리에 소재한 전파상에서 만든 것인데, 지금까지 갖고 있을 정도로 성능이 괜찮았습니다. 그 후, 80년대에 들어와 CD가 출현하면서 시스템 역시 바뀌게 됩니다. 엠파이어 턴테이블에 데논 DL-100을 끼워서 사용한다거나, 비투스에서 만든 J-Cable을 구하는 등, 여러모로 급수가 올라갔죠.
-케이블 이야기를 해볼까요?
JK: 오디오파일의 경험에 비춰볼 때, 1970년대만 해도 아무도 케이블에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80년대에 들어와 수프라 케이블이 나오면서 조금씩 의식하게 되었죠. 이 회사는 요테보리에서 3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데, 어찌 보면 30년전에 일찍 케이블을 만들 만큼 선진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 케이블은 하이 엔드용은 아니고, 일반적인 유저들이 쓸 만한 수준이었습니다.
-하이 엔드 케이블은 언제 구입했습니까?
JK : 여기엔 좀 사연이 있습니다. 1990년에 순은으로 제작된 인터커넥터를 구입해서 그 차이를 실감하긴 했지만, 파워 코드에 대해선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러다 한 10년쯤 흘렀을까요? 당시 저는 스웨덴의 하이파이 애호가들이 모인 <오디오 포럼>이라는 사이트에 가입해서 한동안 활동했습니다. 그러다 오디오 포럼을 주재하는 팀브라라는 친구에게 트랜스페런트에서 나온 파워 코드를 써봐라, 라는 제의가 왔습니다. 일단 가져와서 바로 듣지는 않았습니다. 파워 코드에 대한 편견이 있었으니까요. 그러다 며칠 후 밤에 우연히 CDP에 연결하고선 깜짝 놀랐습니다. 오죽하면 아내까지 깨워서 들어보라고 했으니까요. 당신 나 모르게 새로 CDP 샀어요, 라고 아내가 물을 정도였습니다.
-그때부터 케이블에 대한 관심이 본격화되었군요.
JK : 원래 저는 엔지니어입니다. 산업 공학쪽으로 공부를 했고, 특히 엘리베이터의 서비스 엔지니어로 25년간 일도 했습니다. 오랜 오디오파일의 감각에다 자작의 경험까지 가미한다면, 이런 케이블이 내는 소리의 변화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인터넷이며 잡지를 통해 케이블에 대한 여러 정보를 수집하고 또 공부했습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제조에 이르게 된 것이죠.
-애호가에서 본격 제작자로 변신한 것이군요.
JK : 최초로 만든 제품은 오디오 포럼을 통해서 여러 애호가들에게 들려봤습니다. 아주 반응이 좋았으므로, 6개월 후 자신감을 갖고 스톡홀름에 있는 딜러에게 연락했습니다. 그게 바로 JPC 2.5라는 모델로 파워 코드입니다. 노르웨이며 스웨덴의 오디오 잡지에서 호평을 실을 정도로 반응이 좋았으므로, 더욱 힘을 얻을 수 있었죠. 판매도 순조로워서, 이 제품의 경우 스웨덴에서 1,500 페어, 노르웨이에서 5~600 페어 그리고 덴마크에서 300 페어 정도가 팔렸습니다.
-대단한 판매량입니다.
JK : 당시 파워 코드라는 컨셉은 흔치 않은 데다가 가격도 적절해서 큰 호응을 얻었던 것 같습니다. 아이언 실딩 처리를 하고, 너무 타이트하게 죄지 않는다는 발상으로 만들었는데, 이게 히트해서 점차 박차를 가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번 돈을 모두 연구를 위해 사용했는데, 아직은 직장에 다니고 있었으므로, 금전적인 여유가 있어서 큰 무리는 없었습니다. 그 후 약 3년 반 동안 연구에 몰두했답니다.
-본격적으로 창업한 것은 언제입니까?
JK : 2005년 여름입니다. 이때 퇴사를 하고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빚이 없는 데다가 은행 융자도 없었으므로, 쉽게 독립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랍니다. 저기 새로 지은 공장 역시 모두 제가 번 돈으로 만든 것이니까요.
-2005년이라면, 요르마 케이블이라는 이름은 이미 어느 정도 알려진 상태였죠?
JK : 그렇죠. 2002년 10월에 열린 스톡홀름 쇼에 출품해서 본격 데뷔를 한 상태입니다. 이듬해 1월 CES에 갔을 때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작은 방을 300불에 임대해서 전시했는데 평이 좋아 여러 딜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또 여기서 마르텐의 레이프를 알게 되어 의기투합, 이어진 프랑크푸르트 쇼에 함께 하게 되었답니다. 핼크로 앰프와 마르텐 콜트레인 스피커가 같은 부스에 있어서 여러 모로 좋았고, 나중에 블라델리우스도 알게 되어 잠시지만 스웨디쉬 스테이트먼트를 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케이블 이름을 넘버 원으로 정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까?
JK : 우선 첫 번째로 만든 아날로그 케이블이라는 뜻으로 지었지만, 세계 최고라는 의미도 있고 또 그대로 노 원, 즉 당시 아무도 날 모른다, 라는 제 자신만의 유머도 섞여 있습니다.
-스웨디쉬 스테이트먼트는 언제 시작되었습니까?
JK : 2005년 CES에 대비하면서 함께 모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마르텐의 아이디어로, 콜트레인 수프림이라는 커다란 스피커를 발표하면서 그에 따른 이벤트를 필요로 했습니다. 당시 저는 프라임이라는 최상위 모델을 만든 터라, 당연히 큰 주목을 받을 것이라 생각해서 블라델리우스, 솔리드텍 등과 함께 한 것이죠.
-프라임의 인기가 대단한 것으로 알고 있는 데요.
JK: 2006년부터 지금까지 프라임은 고가임에도 불구하고 매주 하나씩 판매가 되고 있습니다. 인터커넥터가 6~7000 유로, 스피커 케이블이 15,000~18,000 유로 정도하는 것을 보면 대단한 실적입니다.
-프라임엔 파워 코드도 있죠?
JK : 네. 그런데 1미터짜리엔 프라임이라는 모델 명을 붙이지 않습니다.
-거기엔 이유가 있나요?
JK : 너무 짧으면 실딩 효과가 없답니다. 제 경험으로는 1.5미터 정도가 되어야 효과가 나타나고, 2.5미터가 되었을 때가 적당합니다.
-아직도 케이블의 효과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들에게 해줄 말씀이 있다면?
JK : 예전에 전송에 관련되어 전문가라고 불리는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2미터가 넘는 키에 180Kg이나 나가는 거한이었습니다. 그는 제가 만드는 방식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였습니다. 하긴 그 분의 별명이 “닥터 수퍼 컨덕터비티”였으니, 각종 지식으로 무장한 상태에서 제가 경험론을 앞세워 설명하는 것이 우스워 보일 수도 있었죠. 하지만 막상 제 케이블을 듣고는 매료되어 최대 고객이 되었답니다.
-마지막으로 케이블 제조 시에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사항이 있다면?
JK : 저는 오랫동안 오디오를 좋아했고, 바꿈질도 많이 했습니다. 이쪽 경험으로 말하면 케이블은 전대역이 평탄하게 나와야 합니다. 특정 대역이 부스트 되었을 경우, 당시에는 좋을지 모르지만 시스템이 바뀌면 바로 약점이 드러납니다. 저는 6~7세 때부터 음악을 들었고, 지금도 사랑합니다. 결국 최종 튜닝은 이런 음악성이라는 부분과 관련되지 않을까요? 그런 면에서 이론 못지 않게 경험이 중시되는 것이 케이블 분야라 생각합니다.
-장시간 인터뷰에 감사합니다.
JK : 감사합니다.
P.S)
인터뷰를 마치고 요르마의 리스닝 룸으로 갔다. 과연 오랜 구력이 말해준다고나 할까? 고가의 하이 엔드 기기에서 나오는 잘 조정된 음에 그만 매료되고 말았다. 마르텐의 콜트레인 스피커를 중심으로 블라델리우스 CDP, 비투스 파워 앰프 등이 매칭되어 있었고, 까다롭기로 소문난 쿠즈마의 턴테이블도 눈에 띄었다.
당연히 음악은 장르 불문, 다양하게 즐기고 있었는데, 전대역의 밸런스가 뛰어나고, 장시간 들어도 귀가 피곤하지 않으면서도 생생하고, 활기찬 음이 인상적이었다. 과연 오디오파일로서 고수라고 평해도 좋을 수준이었다.
역으로 그런 자신의 급수에 맞는 제품을 만들려면 보통 일이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꼼꼼하고 섬세하고 까다로운취향을 가진 분이 자기 자신부터 납득시킬 수 있는 제품을 만든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신뢰가 가고 남았다.
그러고 보면 인터뷰 중에 요르마 자신이 프라임 케이블을 처음 만들어서 듣던 날, 꼬박 밤을 새우고 말았다고 한다. 꼭 그런 급수까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의 퀄리티를 가진 요르마 제품을 듣는다면 아마 다른 오디오파일도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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