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니드 코간 리이슈반
오디오 쇼 기간 중 엘피사냥은 거의 하지 못했다. 부스 사이를 연결하는 복도를 지나는데, 복도에 설치된 모니터에서 엘피 제작과정을 상영하고 있다. 국내에서 엘피를 다시 시작한 곳의 복도 부스다.
내가 모니터를 쳐다보고 있자, 직원이 다가와 친절하게 엘피 제작과정을 설명한다. 아날로그를 설명만 해주다가 설명을 듣고 있자니 좀 어색하다. 기초적인 얘기라 더 들을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열심히 설명하는데 됐다고 하기도 그랬다.
대화를 끊기도 그래서 자연스럽게 테이블에 판매용으로 전시된 엘피로 시선을 옮겼다. 그랬더니 이제 판매용 엘피 설명을 시작한다. 참 열심인 직원이다.
시선이 이 음반에 머문다. 내가 좋아하는 바이올리니스트다. 이 연주자의 음반이 몇장 있는데 이 음반은 없다.
순간 마음 속으로 여러 생각이 교차한다. 리이슈 엘피에 실망했던 기억, 조동진 유작 앨범에서 느꼈던 만족스럽진 않지만, 가능성을 느꼈던 마장스튜디오에 대한 작은 기대로 혼란스럽다.
마장 스튜디오에서 출시했던 요한나 마르치의 리이슈는 사지 않았다. 10년도 더 전에 고민하면서 샀던 쿠다르세 리이슈 엘피가 있기 때문이다. 들리는 풍문으로는 쿠다르세 리이슈 보다는 음질이 낫다고 하는 얘기가 들렸다. 요한나 마르치 연주에 그다지 큰 감흥을 느끼지도 못하는데, 굳이 같은 레파토리를 또 살 필요는 없었다.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발길을 가던 방향 그대로 잡았다. 귓가에 스테레오 버전 세계최초라는 말이 맴돌았지만 말이다.
그렇게 부스를 돌다가 문득 그래! 사자는 생각이 들었다. 호기심이 '리이슈가 그렇지 뭐' 하는 시니컬한 마음을 순간 넘어선 것이다. 부스 사이를 이동하면서 자연스레 다시 복도를 지나면서 코간 음반을 구입했다. 같이 권하는 쉐링의 음반은 사지 않고 코간의 음반만 집어 들었다.
코간을 만난지는 이십년 전이다. 누구나 처음에 클래식을 듣게 되면 만나는 바이올리니스트가 하이페츠 아니면 오이스트라흐다. 하이페츠의 현란함이 싫다면 자연스럽게 헨릭 쉘링이나 그뤼미오를 좋아하게 된다. 좀더 올라가면 크라이슬러나 마이클 라빈이나 미샤 엘만의 심심하고 단순하기 그지없는 바이올린의 세계로 간다.
하이페츠의 현란함에서 멀어져서 우아하고 유연하게 연주하는 지노 프란체스카티와 마이클 라빈에 관심 가질 때 쯤에 코간을 처음 만났다.
내 마음을 쏙 들어서 당시 적지 않은 금액을 주고 이 음반을 샀다. 코간의 연주가 부드럽고 매끄러워서 마음에 든 것은 아니다. 코간의 보잉도 하아페츠나 살바토레 아카르도에 버금갈 정도로 강하고 거침없다.
하이페츠가 기술적으로 최고의 경지에 이른 것은 맞다. 하이페츠는 화려하고 현란한 보잉을 하면서도 아키르도와 달리 활활 타오르는 듯한 열기를 느끼게 한다. 그 열기가 '너희는 못하지 나만 할수 있어!'라는 것으로 느끼는 나에게 문제가 있다면 있는 것이다.
코간의 보잉도 상당히 날카롭고 선명하지만, 하이페츠 같이 힘주어 혼신을 다해서 연주하는 듯한 그 열기가 별로 없다. 무심한듯 어려운 페시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연주한다. 하이페츠의 '너희는 못하는데 나는 이렇게 잘한다'고 느껴지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무심하게 연주한다고 해서 청장년기의 기돈 크래머의 무기질적 연주 와는 다른 것이다. 하고픈 말은 있으나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그러나 아주 정확하게 연주하는 느낌이다. 마음 속 깊이 심지를 내려두고 관조하듯 하는 연주다. 기품 있으면서 깊이가 깊은 느낌이다.
오디오 쇼에서 사오자 마자 턴테이블에 걸었다. 코간 특유의 무심한듯 하나 날카로운 보잉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초반을 처음 들었을 때의 날카로움을 생각하면 살짝 얌전해진 느낌이다. 고음 끝이 살짝 부드럽게 연마된 느낌이다. 아주 살짝 고음 끝자락 음색에서 크라이슬러 느낌도 난다.
세계 최초 스테레오 음반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온 음반이다. 이 얘기는 모노로는 초반이 존재한다는 얘기다. 두어번 듣기는 했지만, 이 모노 초반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1959년 녹음 당시 모노와 스테레오로 녹음을 했고, 음반 발매는 모노로만 했다. 마장 스튜디오 팀에서 RCA 녹음자료를 검토하다가 스테레오 녹음 자료를 확인하고 이를 계약을 통해서 고음질 음원으로 넘겨 받아서 이번에 발매한 것이다.
1면 보다는 2면이 초반의 코간 느낌에 가까웠다. 조동진 유작 앨범에서 보이던 정전기 문제도 거의 없었다. 바늘이 레코드의 소릿골을 긁을 때 생기는 기저 잡음도 아주 적었다. 엘피로 음반을 찍어내는 노하우가 쌓여가면서 음질이 좋아지는 것 같다. 한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엘피 발매를 전제로 리 마스터링을 해서 중고음에서 코간 특유의 음색을 좀더 살렸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코간 초반의 리얼함을 느끼기에는 살짝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합격점을 주어도 될 만큼 잘 커팅되고 프레싱 된 음반이다. 클래식을 좋아하고 그 중에서도 바이올린에 관심이 있다면 꼭 들어봐야할 연주자가 레오니드 코간이다. 이 가격에 깨끗한 음질로 코간을 만날수 있다는 것은 좋은 기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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