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모델이란 이렇게 만드는 것이다
Pro-Ject Audio 175 Vienna Philharmonic Recordplayer
지난 5월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무지크페라인에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을 들었다. 빈필의 신년음악회로 유명한 무지크페라인 황금홀. 실제로 가본 그곳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으나 곳곳에 스며든 음향학적 설계와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에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아, 이곳이 작곡가들이 그렇게나 선호한다는 공연장이고, TV로만 보던 이곳에서 쇼스타코비치 5번을 직접 듣는다는 사실에 감개무량하기까지 했다.
이 무지크페라인을 기반으로 한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1842년 창립됐다. 지난해가 175주년이다. 구스타프 말러, 푸르트뱅글러, 칼 뵘, 카라얀, 로린 마젤, 번스타인, 주빈 메타, 정명훈, 오자와 세이지 등 수많은 지휘자들이 거쳐간 이 명문 오케스트라는 ‘빈필’이라는 그 이름만으로도 전 세계 클래식 팬들의 마음을 뒤흔들어놓는 마력을 갖췄다.
이번 시청기인 프로젝트 오디오(Pro-Ject Audio)의 ‘175 Vienna Philharmonic Recordplayer’는 모델명에서 알 수 있듯 빈필의 175주년 기념 모델이다. 프로젝트 오디오가 1990년 비엔나에서 설립된 제작사이니 왠지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만약 비엔나와 아무런 연고가 없는 제작사에서 빈필 운운하며 기념 앰프나 스피커를 내놓았으면 왠지 뜬금포에 억지라는 인상이 강했을 것이다.
턴테이블과 톤암에 안긴 바이올린, 플루트, 클라리넷
이 턴테이블은 전 세계 175대 한정으로 제작됐다. 홈페이지에 가보니 이미 다 팔렸다고 한다. 물론 제작사 입장에서 각국 수입사로 물량이 다 나갔거나 예약이 됐다는 뜻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175 빈필 레코드플레이어’는 소리도 소리지만, 보고만 있어도 사람 마음을 쿵쾅쿵쾅 뛰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다. 특히 황금색으로 빛나는 플린스 상판과 이와 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은색 톤암은 무지크페라인 황금홀에 처음 입장했을 때의 그 놀라움과 설렘,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필자를 더 놀래킨 것은 이러한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외모, 프로젝트 오디오 턴테이블 역사상 가장 비싼 가격표가 아니었다. 이 기념작 곳곳에 깃든,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싶은 창의적 발상이었다. 빈필이라는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를 기념하는 모델인 만큼 오케스트라 악기들의 부품과 재료를 직접 투입해서 턴테이블과 톤암을 만든 것이다. 말은 쉬워 보이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할 때 이런 아이디어를 떠올린다는 것은 거의 콜럼버스의 달걀 수준이다.
구체적으로 본다. 우선 목재 프레임과 그 위에 칠한 하이 글로스 래커는 실제 바이올린에 사용된 것과 동일하다고 한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플린스 상판의 청동은 관악기 몸통에서 가져온 것이고, 헤드셸의 손잡이는 클라리넷 플랩(구멍을 덮는 덮개)을 썼다. 회전수(33, 45rpm)를 선택할 수 있는 버튼 2개와 전원 온 오프 버튼도 실제 플루트 버튼. 한마디로 작은 오케스트라를 품에 안은 것이다. 턴테이블 베이스는 2016년 뮌헨 오디오쇼에서 첫선을 보인 ‘The Classic SB’ 모델에서 가져왔다지만, 세상에 이런 턴테이블과 톤암은 없다.
실제 골드문트 포노, 프리, 파워에 물려 시청에 임했을 때에도 여느 턴테이블 테스트 때와는 다른 심정으로 대했다. 그 세세한 재생음에 대한 사운드적 평가보다는 이 레코드플레이어 자체가 주는 심미적 아름다움, 기능적 유려함에 마음이 쏠렸다. ‘플루트’ 버튼을 눌러 플래터를 멈추고, 헤드셸의 ‘클라리넷’ 손잡이를 살짝 위로 받쳐 원위치 시키는 동작 자체가 남달랐다. 스크류 타입의 알루미늄 클램프(이 역시 눈맛과 육중한 손맛이 대단했다)를 빼내고, 준비해 간 LP를 매트 위에 얹힌 후, 레버를 내릴 때에도 정성을 다했다.
맞다. 이 레코드플레이어는 테스트를 위해 자신을 다루는 리뷰어에게도 이러한 엄정함을 요구했다. 음만 듣지 말고 자신의 자태와 곳곳에 숨은 오케스트라 악기들의 체취까지 직접 몸으로 느껴달라는 것이다. 사실, ‘175 빈필 레코드플레이어’보다 비싸고, 더 높은 수준의 하이엔드 메커니즘과 스펙을 갖췄으며, ‘넘사벽’ 사운드 완성도를 갖춘 턴테이블과 톤암, 카트리지는 이 세상에 많다. 그러나 이 플레이어에서는 그것을 초월한 아우라, 단번에 청자를 무장해제 시켜버리는 포스가 뿜어져 나왔다.
설계디자인
‘175 빈필 레코드플레이어’는 톤암과 카트리지가 세트로 구성된 턴테이블이다. 그래서 ‘레코드플레이어’다. 턴테이블 자체는 기본적으로 플로팅형 섀시 디자인에 벨트 드라이브 타입. 안정감 있게 각진 원목 프레임과 고광택 청동 상판을 조합한 베이스부터가 “나, 턴테이블이야”라고 고백하는 듯하다. 플린스 상판은 MDF 보드 위에 두께 3mm의 청동을 얹힌 샌드위치 구조이며, 오른쪽에 기념 로고가 새겨져 있다. 이 상판은 ‘The Classic SB’의 스프링 대신 고탄성 플라스틱(TPE)으로 섀시에 연결됐다.
다른 구성 역시 최선을 다했다는 인상. 겉만 번지르르한, 마케팅에만 올인한 기념 모델 수준이 아니다. 카트리지는 ‘Ortofon WPH 175’. 오토폰(Ortofon)과 협업해 오토폰 최상위 라인인 ‘Cadenza’ 시리즈를 근간으로 특주한 MC 카트리지다. 루비 캔틸레버에 프릿츠 가이어(FG) 70 수준의 다이아몬드 스타일러스 사양. 제작사에 따르면 카덴자 블랙이나 브론즈보다 훨씬 좋은 소리를 내준다고 한다. 하우징은 댐핑력이 탁월한 합금 재질로, 턴테이블 품위에 맞춰 고광택을 냈다. 출력전압은 0.5mV, 무게는 10.7g. 포노앰프 쪽의 권장 로딩 임피던스는 50~200옴이다.
톤암은 9인치 S 타입에 탈착이 가능한 청동 헤드셸이 달렸다. 정식 이름은 ‘Pro-Ject 9 S-Shape Special Tonearm’. 튜브부터 베이스까지 모두 고광택 알루미늄을 아낌없이 쓴 덕에 외관이 무척 고급스럽다. 톤암 베어링은 짐벌(gimbal) 서스펜션 구조로 조작감이 매끄럽다. VTF(Vertical Tracking Force) 조정은 무게추를 이동시키는 스태틱 밸런스형. 안티 스케이팅(anti-skating)은 가느다란 실로 연결된 안쪽 추의 위치를 3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물론 스타일러스의 VTA(Vetical Tracking Angle)와 카트리지의 아지무스(Azimuth) 미세 조정도 가능하다.
300mm 직경의 플래터는 알루미늄 재질이며 그 위에 가죽 매트가 올려졌다. 플래터 무게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턴테이블 전체 무게는 13kg이다. 플래터를 들어 올리면 모터와 벨트로 연결된 알루미늄 재질의 서브 플래터가 보인다. 메인 베어링은 스테인리스 스틸 재질. 와우&플래터는 33회전시 +,-0.10%, 45회전시 +,-0.09%에 그친다. 회전속도 오차도 33회전시 +,-0.13%, 45회전시 +,-0.10%에 머문다.
시청
시청에는 골드문트의 ‘Mimesis PH3.8 NextGen’ 포노스테이지, ‘Mimesis 22H NextGen’ 프리앰프, ‘Telos 1000 NextGen’ 모노블럭 파워앰프, 포칼의 ‘Maestro Utopia EVO’ 플로어 스탠딩 스피커를 동원했다. 너무나 호화로운 구성이지만, 달리 생각하면 ’175 빈필 레코드플레이어’에 이 정도 대접을 해주는 게 맞다고 본다.
Jacintha - Moon River
Autumn Leaves
45회전 180g 중량반이다. 재생이 시작되자 야신타 그녀가 허공에 훅 하며 떠오른다. 훅 하는 과정에 일체의 잡소리가 없다. 촉촉한 숨결과 심해 같은 공간감에 소름이 돋을 정도. 과연 이런 소리를 디지털로 들으려면 얼마나 많은 돈을 들여할지 가늠이 잘 안된다. 아, 저 위에서 들리는 피아노 소리 좀 보소. 이 높이감이 정말 놀랍다. ‘피아노가 실물 사이즈로 등장한다’, 이런 표현을 습관적으로 썼지만 지금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오른손과 왼손의 거리가 느껴질 만큼 실물 사이즈다. 확실히 오토폰 카트리지가 그루브에 담긴 모든 정보를 남김없이 긁어오고 있다. 피아노의 미세한 여운까지 모조리 포획해온다. 그야말로 뒤틀림이나 왜곡이 없는 순결한 음 그 자체다.
Janos Starker - Boccherini: From Sonata in A Major
Starker Plays Italian Sonatas
스트레이트하게 등장한 첼로, 그 뒤에서 은은하게 들려오는 피아노의 하늘하늘한 음. 들을수록 깨끗한 소리를 들려주는 레코드플레이어다. ‘175 빈필 레코드플레이어’의 소리 특성이 서서히 파악된다. 확실히 무게감과 온기가 두드러지는 타입은 아니며 그냥 자연스럽게 그리고 중립적으로 음을 전해준다. 디테일 역시 현미경을 들이댄 듯한, 고도의 해상력을 과시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진중하면서도 해상력이 높은 아날로그 시스템을 원한다면 이 모델은 적합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거의 모든 노이즈가 휘발된 듯한 조용한 배경은 초하이엔드 수준이다. 슈타커의 코로 숨 쉬는 기척이 생생하다. 음들을 끝까지 챙기는 모습 또한 대견하다.
Anne-Sophie Mutter, Herbert von Karajan, Wiener Philharmonic
Concerto for Violin and Orchestra in D major
Tchaikowsky Violinkonzert
의도한 것은 아닌데 빈필 음반을 듣게 됐다. 처음 들리는 박수소리부터가 현장(잘츠부르크 대축전 극장)에 왔음을 실감케 한다. 물론 매칭한 골드문트 포노와 프리 성향이 크게 반영됐겠지만 여지없는 순백의 음이다. 한 음 한 음을 정확히 짚고 넘어가며 그 음의 윤곽선이 진하고 또렷한 것도 특징. 바이올린 여린 음에서는 현 주위로 퍼져나가는 공기의 작은 파장까지 느껴지는 것 같다. 전체적으로 상쾌한 음, 지저분하지 않은 음, 혼탁하지 않은 음이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에너지감을 발산한다. 물론 포칼 스피커의 베릴륨 트위터와 우퍼 2발, 그리고 이를 울리는 모노블럭 파워앰프의 영향이 크다. 하지만 이 촉감의 심지는 분명 턴테이블과 톤암, 카트리지라고 봐야 할 것이다.
Larry Carlton & Lee Ritenour - After The Rain
Larry & Lee
홀로그래픽하게 펼쳐지는 무대, 깊숙한 공간감, 핀 포인트로 맺히는 음상. 소스기기로서 ‘175 빈필 레코드플레이어’의 자질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일렉 기타의 음 하나하나가 너무나 선명하다. 기타 줄을 필자 바로 앞에서 튕기는 것 같다. 여기에 아날로그 소스기기다운 소프트함과 리퀴드함은 두고두고 칭찬할 만하다. 필자의 피부에 와닿는 음끝이 거칠거나 따갑지가 않은 것이다. 고역은 그야말로 청명하게 뻗는다. 스피커는 진작에 사라졌다. 이어 들은 ‘Remembering J.P.’에서는 드럼의 타격감과 신시사이저의 울부짖는 사운드가 요염하고 섹시하다. 대역을 오르내리는 모습 역시 매끄럽기 짝이 없다.
총평
‘175 빈필 레코드플레이어’는 화려한 외관 속에 탄탄한 기본기를 갖춘 시스템이었다. 소리도 그랬지만 메커니즘 역시 뭐 하나 빼지도 보태지도 않았다. 기본 톤암 대신 유저가 선호하는 SME 톤암이나 카트리지를 장착할 수 있지만, 만약 필자가 이 레코드플레이어를 쓴다면 톤암만큼은 결코 손 하나 안 댈 것이다. 기능과 성능을 떠나 색깔과 촉감, 형상 모든 것이 이미 완벽한 오브제로서 턴테이블과 한 몸이 됐기 때문이다. 소유의 기쁨은 그저 물욕일 뿐이라고 생각해온 필자이지만, 이 기기만큼은 예외다. ‘추천’ 혹은 ‘일청’, 이런 수준을 초월한 마스터피스다. 기념 모델은 이렇게 만드는 것이다.
김편
Technical SpecificationsSpeedDrive principlePlatterMains bearingWow & flutterSpeed varianceSignal to noiseTonearmEffective arm lengthEffective arm massOverhangTracking forceIncluded accessoriesPower connectionPower consumptionDimensionsWeight
33, 45 RPM (electronic speed change) 78 RPM (manual speed change) |
Belt drive |
300 mm aluminium |
Stainless steel |
33: ±0.10 % 45: ±0.09 % |
33: ±0.13 % 45: ±0.10 % |
70 dB |
9” aluminium S-shape, Brass Headshell |
230 mm |
15.5 g |
18 mm |
10 - 30mN |
Record Clamp, leather mat, dust cover, phono cable, precision scale, power supply |
110/120 or 230/240 Volt - 50 or 60 Hz |
5 watt max / < 0.5 watt standby |
460 x 131 x 351 mm (WxHxD) lid closed |
13 kg 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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