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커케이블에 대한 믹싱/녹음 엔지니어들의 답
Studio Connections Abbey Road Monitor Speaker Cable
#1. 영국 런던의 EMI 애비로드 스튜디오(Abbey Road Studios)는 명반의 산실이다. 과거 비틀스 앨범 210장 중 190장이 애비로드 스튜디오에서 녹음됐다. 사실, 그전까지 ‘EMI 레코딩 스튜디오’였던 이름이 ‘애비로드 스튜디오’라고 바뀐 것도 비틀스의 1969년 앨범 ‘Abbey Road’가 탄생한 것을 기리기 위해서다. 그리고 핑크 플로이드의 ‘Dark Side of The Moon’도 이곳에서 녹음돼 1973년에 발매됐다.
애비로드 스튜디오의 모니터링 시스템
너무 먼 과거 얘기, 지난날의 영광 아닌가 하실 수도 있겠다. 하지만 1931년부터 시작된 애비로드 스튜디오의 전설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라디오헤드, 오아시스, 카니예 웨스트, 에이미 와인하우스, 샘 스미스, 에드 시런, 프랭크 오션, 레이디 가가, 아델이 애비로드 스튜디오에서 녹음했고, 그래비티, 어벤저스: 엔드게임, 블랙 팬서 같은 유명 영화 OST도 이곳에서 탄생했다.
#2. 지난달 필자의 시청실로 스피커케이블이 한 조 배달됐다. 비교적 얇은 두께의 스피커케이블인데 투명 PVC 피복 안에 절연된 2개의 심선이 꽈배기처럼 꼬여 있었다. 눈길을 끈 것은 피복 위에 새겨진 ‘Abbey Road Monitor’라는 글자. 과연 이 케이블은 누가 만든 것인데 ‘애비로드’ 표식을 이렇게 훈장처럼 달고 있는 것일까. 또 실제 EMI 애비로드 스튜디오는 이러한 케이블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일까.
단자 슬리브를 살펴보니 다행히(?) 제작사 이름과 시리즈 이름이 씌어 있다. 제작사는 스튜디오 커넥션(Studio Connections), 시리즈 이름은 모니터(Monitor Series)다. 결국 필자에게 배달된 스피커케이블의 정식 명칭은 스튜디오 커넥션의 애비로드 모니터 스피커케이블이고, 이 케이블에 대한 필자의 호기심 어린 탐구는 이날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러면서 피복에 씌어있던 또 다른 표식 ‘Moving Air’에 대한 궁금증도 자연스럽게 풀렸다.
무빙 에어, 댄 게이블, 마이클 화이트사이드,
스튜디오 커넥션
이야기는 20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의 믹싱 엔지니어 댄 게이블(Dan Gable)과 레코딩 엔지니어 마이클 화이트사이드(Michael Whiteside)가 이 해 무빙 에어(Moving Air)라는 오디오 케이블 전문 제작사를 차렸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애비로드(Abbey Road) 스피커케이블과 인터케이블을 선보였다. 라인업은 모니터(Monitor) 시리즈와 이보다 상급의 레퍼런스(Reference) 시리즈였다.
마이클 화이트사이드(Michael Whiteside)
신생 제작사가 이처럼 당당히 애비로드 타이틀을 걸 수 있었던 것은 마이클 화이트사이드 공이 컸다. 1980년부터 레코딩 엔지니어 및 스튜디오 디자이너로 일한 그가 케이블링 작업을 포함한 EMI 애비로드 스튜디오의 3개 메인 스튜디오에 대한 개보수 공사를 진행했던 것. 영국 캠브리지 킹스 칼리지(King’s College)의 녹음 스튜디오도 그의 손을 거쳤고, 영국 하만 인터내셔널과 티악(TEAC) 기술 부문을 이끈 이도 마이클 화이트사이드였다.
애비로드 케이블은 결국 이러한 마이클 화이트사이드와 EMI 애비로드 스튜디오의 각별한 인연으로 탄생한 결과물이다. 맥락을 따지고 보면 무빙 에어라는 제작사를 차린 후 애비로드 케이블을 내놓은 게 아니라, EMI 애비로드 스튜디오에 자신들이 만든 케이블을 깐 후, 이를 바탕으로 제작사를 차렸다는 것이 옳다. 물론 애비로드 타이틀 사용에 대한 라이선스도 스튜디오 측으로부터 획득했다.
그러면 왜 하필 제작사 이름을 ‘무빙 에어'라고 지었을까. 이는 케이블 지오메트리와 관련한 엔지니어 댄 게이블의 공이 크다. 지금도 계승되고 있는 것이지만 이 케이블의 핵심기술이 선재와 피복 사이의 1차 절연물질로 공기(air), 정확히 말하면 올레핀 탄화수소와 질소 가스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물론 최적의 절연 효과를 위해서다.
애비로드 케이블을 통해 제작사로서 별의 순간을 체험한 무빙 에어는 그러나 2011년에 사업을 접었고, 마이클 화이트사이드는 이후 이 제작사를 계승한 스튜디오 커넥션(Studio Connections)을 새로 론칭했다. 필자에게 배달된 스피커케이블 PVC 피복에 지금도 ‘Moving Air’라고 씌어있는 것은 애비로드 라이센스 획득 주최를 명확히 표기한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스튜디오 커넥션은 지금도 자사 레퍼런스 스피커케이블에 대해 “우리가 EMI 애비로드 레코딩 스튜디오에 설치한 케이블과 동일한 패밀리"(the same family of cable we fitted throughout EMI Abbey Road recording studios)라고 홈페이지를 통해 밝히고 있다. 참조하시기 바란다.
애비로드 모니터 스피커케이블 본격탐구
스피커케이블은 대전류가 흐르는 일종의 전력선이다. 대출력 파워앰프에 물리면 5~20A 정도의 대전류는 쉽게 흐른다. 일반 가정의 누전 차단기의 허용전류가 30A인 것을 떠올리면 이는 분명한 대전류다. 따라서 스피커케이블은 이러한 대전류가 쉽게 흐를 수 있도록 선재와 단자 등의 저항값이 낮아야 한다. 은선 케이블이 득세를 하는 것도 은의 전도율이 조금이나마 동보다 높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인터케이블은 차폐(절연+쉴드)에 신경을 써야 한다. 인터케이블은 파워앰프에서 전류 증폭이 되기 전 신호를 전송하는 만큼 mA 수준의 미세 전류가 흐르기 때문이다. 뮤메탈 쉴드, 테플론/PEEK 절연 등 여러 브랜드에서 인터케이블의 전자파 노이즈(EMI) 차폐에 갖은 애를 쓰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필자가 리뷰한 애비로드 모니터 스피커케이블은 이런 케이블이다.
- 선재 : 은도금 동선+OFC 동선. 연선 2심 꼬임 구조
- 1차 절연 : 올레핀 탄화수소와 질소 가스가 주입된 폴리에틸렌
- 2차 절연 : 솔리드 폴리에틸렌
- 피복 : 투명 PVC
- 길이 : 3m
- 단자 : 바나나
결국 애비로드 모니터 스피커케이블이 남다른 것은 음악 신호가 흐르는 선재(도체)로 은도금 동선과 OFC 무산소 동선을 혼합해 썼다는 것과 1차 절연물질로 가스를 활용했다는 것, 그리고 특이하게도 쉴드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하나하나 따져보자. 우선 선재로 가느다란 연선(stranded)으로 뽑아낸 은 도금 동과 OFC 동을 썼다. 제작사에서는 이를 하이브리드 도체(ultra fine stranded silver-OFC hybrid conductor)라고 부르고 있는데, 은 도금 동선을 쓴 것은 퓨어 은선보다 주파수응답특성이 더 좋아서, OFC 동선은 매우 낮은 저역 주파수 전송에 유리해서 각각 선택했다고 한다.
제작사에서 딱히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단선(solid) 대신 연선을 쓴 것은 특히 고역 주파수가 도체 표면만을 타고 흐르는 표피효과(skin effect)를 최대한 이용하기 위한 것. 이 경우 가느다란 연선을 여러 가닥 쓰는 것이 굵은 단선 한 가닥을 쓰는 것보다 훨씬 유리하게 된다. 여기에 전도율이 동보다 높은 은으로 선재에 도금을 하면 표피효과를 더욱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가 있다.
절연(insulation)은 이중으로 돼 있다. 선재와 직접 만나는 1차 절연은 올레핀 탄화수소와 질소 가스가 주입된 폼 폴리에틸렌(gas foamed polyethylene), 이를 감싼 2차 절연은 솔리드 폴리에틸렌(solid polyethylene)으로 했다. 굳이 가스를 주입한 것은 공기가 최고의 절연물질이기도 하지만, 절연체가 음악 신호의 에너지를 흡수하고 속도를 늦추는 소위 ‘스펀지 효과’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한편 절연이 끝난 플러스, 마이너스 2심 선재를 꽈배기 모양, 즉 서로 90도로 교체되게끔 꼬은 것은 각 선재에서 발생한 서로 다른 위상의 전자파 노이즈(EMI)를 상쇄시키기 위한 것. 이를 통해 특별한 쉴드를 쓰지 않고도 차폐 효과를 톡톡히 누릴 수 있으며, 쉴드 투입에 따라 케이블의 커패시턴스가 올라가는 부작용도 크게 줄일 수 있었다는 것이 제작사의 설명이다.
시청
애비로드 모니터 스피커케이블 시청은 필자의 시청실에서 이뤄졌으며, 일렉트로콤파니에의 AW250R 파워앰프와 드보어 피델리티의 Orangutan O/96 스피커 사이에 투입했다. AW250R은 8옴 부하 시 250W를 내며, 오랑우탄 O/96은 공칭 임피던스가 10옴을 보인다.
사실 이 케이블에 대한 첫 번째 시청은 선재나 절연, 심지어 노 쉴드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이뤄졌다. 그러나 첫인상은 아니나 다를까, 화사한 고음과 관련된 것이었는데 마치 예전 서울 인사동에서 본 가느다란 실타래 모양의 엿이 한 올 한 올 터지는 듯했다. 벌써 몇 년째 동선 스피커케이블만 써오고 있는 필자 입장에서는 리뷰용으로 들은 몇몇 은선 케이블 이후 거의 처음 느껴본 음의 감촉이었다.
이 케이블은 그러면서도 저음의 양감을 놓치지 않았다. 물론 에이징 부족에 따라 완전히 몸이 풀린 저역, 그래서 몸집마저 다소 부푼 듯한 저역까지 들려주지는 못했지만, 똑같은 굵기의 은선 케이블이었다면 도저히 낼 수 없는 저음이 나온 것은 분명했다.
Nils Lofgren - Keith Don’t Go
Acoustic Live
첫 기타 음이 흘러나오자 마치 영화 ‘그래비티'의 무중력 우주 화면이 펼쳐진 것 같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오로지 기타 음만 난무한다는 인상. 그러면서도 매끄럽고 소프트하며 촉촉한 음이 계속됐다. 하지만 필자가 5년 가까이 써오고 있는 올닉의 ZL-3000 동선 스피커케이블처럼 음을 콸콸 내주는 정도까지는 아니다. 에이징 부족의 이유가 클 것으로 짐작된다.
어쨌든 이 케이블 투입 후 가장 큰 변화는 스피커케이블의 존재가 1도 없어졌다는 것. 기존 케이블을 쓸 때에는 음이 막힘없이 술술 나온다, 음의 표면적이 넓다, 이런 느낌이 항상 있었는데 지금은 그냥 기타와 보컬의 음상이 무대 가운데에 또렷이 맺힐 뿐이다. 제작사에서는 스피커와 스피커케이블의 존재를 모두 지워버린다고 했는데 이 말이 아주 틀리지는 않은 것 같다.
또 하나 특기할 만한 것은 기타의 화사한 고음이다. 위에서 언급한 실타래 엿 같은 체험을 바로 이 곡에서 했다. 고음 한 올 한 올이 극세사처럼 터져나가는 쾌감이 장난이 아니다. 익숙한 파워앰프와 스피커, 그리고 더 익숙한 곡에서 이렇게 활짝 열린 고음은 간만의 일이다. 다시 기존 케이블을 투입하니 이 고음이 얼마나 화사했던 것인지 더 실감이 났다.
Andris Nelson, Boston Symphony Orchestra
Shostakovich Symphony No.5
Shostakovich Under Stalin’s Shadow
견고하게 펼쳐진 사운드 스테이지나 팀파니의 정위감, 그리고 팀파니 연타의 해상력은 마음에 들지만 뭔가 아랫도리를 묶은 듯한 부족함이 있다. 기존 케이블을 투입하면 확실히 저음이 보다 수월하게 뛰쳐나온다.
하지만 이렇게 에이징이 덜 된 상태에서도, 그리고 절반 수준의 가격 차이에도 불구하고 음 하나하나를 보다 세밀하게 그려주는 맛은 애비로드 모니터 케이블이 더 낫다. 역시 그 출발점이 레코딩 스튜디오인 케이블답다.
Anne-Sofie von Otter - Baby Plays Around
For The Stars
안네 소피 폰 오터의 입술향이 훈풍처럼 부드럽게 필자 쪽으로 몰려온다. 정신이 아찔해질 만큼 생생한 이 온기와 실체감! 음이 평소보다 고급스럽고 입자가 고운 것은 역시 은 특성이 반영된 것으로 짐작된다.
또 하나 두드러진 것은 무대 앞이 무척 투명하다는 것. 미세하게 지글지글대는 노이즈도 없고, 흐느적거리는 얇은 베일도 없이 그냥 탁 트였다. 덕분에 악기와 보컬의 색채가 더욱 선명하게, 음상은 더욱 실물 사이즈로 등장한다. 기존 케이블을 투입하니 그녀가 보다 앞으로 다가오고 체감상 음압이 높아지지만 보컬이 빅마우스가 돼 약간 당황했다.
Maria Joao Pires, Augustin Dumay, Jian Wang
Piano Trio No.1
Brahms Piano Trios Nos. 1&2
첼로 뒤에서 반주하는 피아노의 형체와 그 음이 또렷하다. 지금이 분명 코부즈 스트리밍 음원으로 듣는 상황인데도 마치 DSD 음원을 듣는 것 같다. 한마디로 피아노 음의 입자가 곱고 건반에 좔좔 윤기가 흐르는 것 같은 상황.
의외인 것은 무대 왼쪽에서 등장한 바이올린의 고음이 평소보다 두드러지지 않았다는 것. 이 케이블 특성대로 고음이 화사하게 열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오히려 덤덤하고 무색무취하다. 이는 실제 콘서트홀에서 들어본 바이올린의 고음이 이와 비슷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박수를 쳐주고 싶다. 믹싱과 녹음 엔지니어가 바로 이런 재생음을 원했던 게 아닐까 싶다.
총평
고백컨대, 애비로드 모니터 스피커케이블을 결국 구매했다. 어차피 스피커가 2조인 상황이라 괜찮은 스피커케이블이 하나 더 필요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현시점에서 보면 모니터 성향에 고음 표현력이 좋아 기존 올닉 케이블과 몇몇 지점에서 비교가 된다. 길이가 3m로 긴 점, 100만 원이 채 안 되는 점도 구매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정리를 해보면 스튜디오 커넥션의 애비로드 모니터 스피커케이블은 케이블에 대한 영국 믹싱/녹음 엔지니어들에 대한 생각과 철학을 읽을 수 있는 제품이다. 게다가 세계적인 명성의 EMI 애비로드 스튜디오에 투입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근사한 히스토리까지 깃들었다. 이 케이블이 앞으로 에이징이 되면 필자의 스피커가 또 어떤 소리를 내줄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by 김편 오디오 칼럼니스트
수입사 | 오디트 |
구매문의 | 02-582-98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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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0,000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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