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추락하고 있는가 혹은 비상하고 있는가?
아마 요즘 가장 핫한 이슈 중의 하나가 일본의 경제 관련 뉴스일 것이다. 나 또한 관심이 많아서 이것저것 챙겨보고 있는데, 사실 두 가지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일단 비관론을 보면, 디지털 시대에 너무나 뒤떨어져 있고, 구식 시스템에 안주하고 있다는 점을 든다. 아직도 팩스를 쓰고, 플로피 디스크가 통용되는 마당이니 뭐 할 말은 없다. 심지어 많은 일본 젊은이들이 외국으로 이주하고 있다는 말도 들린다.
반면 낙관론을 보면, 이렇게 일본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돈을 벌고 있기 때문이란다. 사실 중요한 중간재나 소재 부문에서 일본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상 이상이다. 오디오 부문만 해도 아직도 수많은 주요 부품이 일본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즉, 여태 하던 대로 해도 돈을 버는데, 굳이 왜 바꾸냐 이거다.
연초에 오사카에 보름 정도 머물면서 다양한 모습을 지켜봤다. 숱한 한국인 관광객의 러시라던가, 나름대로 변화를 추구하는 모습 그러면서 곳곳에 숨어 있는 수많은 장인들의 존재. 그렇다. 아직 우리가 일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판단할 때는 아니라고 본다. 그만큼 일본 산업의 저변이 두텁고 또 넓은 것이다. 그 증거 중의 하나가 바로 사에쿠(SAEC)다. 그리고 이번에 숨겨둔 발톱을 드러냈다. 바로 WE-4700이라는 비기가 그 주인공이다. 이 부분에 대해 차분히 알아보기로 하자.
톤암의 절대 강자
SAEC WE-308N 톤암
아날로그 전성기였던 1974년, 도쿄에 소재한 SAEC는 느닷없이 톤암을 생산했다. WE-308N이라는 모델로, 현재도 중고 시장에서 통용되는 모델이기도 하다. 당시 일본 산업계는 호황을 누리고 있었고, 오디오 부문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거창한 턴테이블이 잇달아 출시되면서, 일종의 니치 마켓이라고 할까, 아무튼 톤암에 주목한 것이 SAEC 이었다. 참고로 이때 카트리지, 그것도 대중적인 가격대의 걸작을 양산한 메이커는 바로 나가오카다. SAEC와 나가오카 두 회사는 지금도 꿋꿋이 버티고 있는 중이다.
SAEC WE-407 톤암
이윽고 SAEC은 1980년에 WE-407이라는 모델을 발표하면서, 비단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 아날로그 애호가들을 사로잡는 존재가 되었다. 사실 일본에는 숱한 카트리지 명가가 있다. 전술한 나가오카는 물론 오디오 테크니카라던가 데논과 같은 가격대에 포진하고 있고, 그 위로 고에츠를 비롯, 마이 소닉 랩, 에어 타이트 등 다양한 메이커들이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중 상당수가 아직도 현역이다. 게다가 탑 윙이라는 신진 브랜드도 무섭게 성장하고 있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
케이블 메이커로 변신
이 와중에 SAEC은 톤암에서 절대적인 신뢰를 쌓음과 동시에 본격적인 케이블 메이커로서 변신도 시도한다. 1986년 광케이블 OPC-201을 발매하면서, 이쪽 시장에 진입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시도는 미래를 내다본 선견지명이었다. CD의 등장 이후 아날로그 시장이 급속히 줄어들면서 톤암의 수요도 자연스럽게 감소되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케이블 제조에 치중하면서 조금씩 고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SAEC WE-4700 톤암
특히, 2014년에 이르면, PC-Triple C와 X라는 두 가지 소재를 개발하면서 본격적인 하이엔드 케이블 회사로 성장하고 있는 중이다. 이 부분은 본 원고 중간에 자세히 소개하겠지만, 아무튼 이렇게 케이블 회사로 자리 잡고 있는 와중에 코로나가 터지기 직전, 그러니까 2019년에 WE-407 시리즈를 현대적으로 개량한 WE-4700을 내놓고 또 한차례 큰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이제 코비드 사태가 수그러들면서, 이 제품의 존재가 서서히 베일을 벗는 와중에 있다. 그러므로 이번에 SAEC이란 브랜드를 소개하는 것은 매우 시의적절하다고 본다.
SAEC의 짧은 역사
사실 아무리 자료를 뒤져봐도 이 회사의 전체적인 역사나 흐름을 조망하긴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정말 무명이냐고 하면 또 그렇지도 않다. 국내의 반응이 어느 정도 보이고 또 SAEC 본사의 직원들과 선이 닿으면 보다 확실한 내용을 파악할 수 있으리라 본다. 그런 면에서 이번 원고는 일종의 서론에 해당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냥 전체적인 윤곽을 그리는 데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SAEC 현 CEO 키타자와 케이타
전술했듯 SAEC은 1974년에 톤암 전문 메이커로 창업한다. 당시 창업자는 키타자와 사다오라는 분이다. 이후 2005년에 키타자와 케이타라는 분이 취임했으니, 두 분 사이에 어떤 가족의 연이 있지 않을까 추측이 된다. 아마도 아버지와 아들 사이 정도로 일단은 파악해두자.
사실 작고 내실이 있는 기업들 대부분이 일종의 패밀리 기업이다. 나는 다른 분야는 잘 모르겠고, 오디오 쪽은 이렇게 가업을 잇는 쪽이 좋다고 본다. 아무래도 대를 이어가며 쌓은 노하우가 외부로 유출되지 않으면서, 그 와중에 차곡차곡 새로운 기술을 도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런 회사가 의외로 많다. SAEC에서도 그런 모습이 자연스럽게 보이고 있어서 흐뭇한 기분도 든다.
PC-Triple C/X는 무엇인가?
사실 이번 원고의 주인공은 SAEC에서 내놓은 WE-4700이란 톤암이다. 이것은 아날로그 르네상스라는 흐름에 맞춰 정말 오랜만에 내놓은 역사적인 제품이고, 충분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SAEC의 주축은 케이블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SAEC 브랜드 스토리에 케이블을 빼놓는다면, 뭔가 말이 안 된다고 본다. 따라서 일단 케이블부터 소개하고, 나중에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다.
수프라(Supra), 라이트하우스(Lighthouse), 카멜롯(Camelot)
이 대목에서 하나 흥미로운 것은, 케이블 회사이면서도 다른 케이블 브랜드의 제품도 수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동사의 홈페이지에 가면, 수프라(Supra), 라이트하우스(Lighthouse), 카멜롯(Camelot) 등의 브랜드도 볼 수 있다. 여태 수많은 케이블 메이커를 만났지만, 타사의 제품도 수입하는 경우는 처음이어서 이 또한 흥미로웠다. 아마도 자사가 커버할 수 없는 내용을 가진 브랜드라고 하면, 일종의 보완책으로 수입하지 않을까 판단이 된다.
이런 SAEC에 전가의 보도와 같은 존재가 바로 PC-Triple이라는 도체다. 이른바 PC-OCC라고 해서 고결정 무산소 동선을 한층 더 개량한 것이라 보면 된다. 당초 이런 아이디어를 개진한 것은 프로모션웍스라는 회사다. 이 발상을 인정하고 적극 협력한 것은 FCM이라는 은선 전문 메이커. 전자가 동선 중심이고, 후자가 은선 중심이어서 자연스러운 협업이 이뤄졌다. 이래서 PC-Triple이 탄생한 것이다.
그 핵심은 기존의 고결정 무산소 동선 주위를 은 도금한다는 점이다. 잘 알려져 있듯 은은 전도성이 우수하다. 기존의 뛰어난 동선에 4N 급의 은을 입히면서, 기존의 강점을 더욱 배가시킨 것이다. 2014년에 이 도체를 활용한 제품이 나오면서, SAEC은 막강한 파워를 갖추게 된다. 플래그십인 스트라토스피어(Stratosphere)를 필두로, SL 시리즈가 뒤를 잇고 있다. 여기서 PC-Triple은 두 가지 종류로 나뉘는데, 바로 C와 X다. 이를 활용해서 XLR, RCA 등은 물론 스피커 케이블과 파워 코드 등을 만들고 있다. 개인적으로 한번 들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다양한 액세서리
테크닉스 SP-10R 전용 턴테이블 데크 SAEC SBX-10R
SAEC는 턴테이블을 만들지 않는다. 이것은 또 다른 영역이다. 대신 자사의 톤암이 뛰어난 성능을 발휘할 수 있는 배려는 잊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SBX-10R이라는 모델이 있다. 전설적인 테크닉스의 SP-10R용 턴테이블 데크다. 이 SP-10R은 따로 베이스를 갖고 있지 않아서, 그간 다양한 시도가 행해져왔다. 이에 착안해서 SAEC는 자사의 톤암과 매칭시킬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든 것이다. 이 제품에 관심이 있거나 혹은 사용하고 있는 분들이라면, SAEC의 WE-4700뿐 아니라 기존의 명작 WE-407/23도 가능하다고 하니,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
SL-1000R/SH-1000R 전용 WE-4700 대응 톤암 베이스 SAEC SAB-1000R
왼쪽부터 SAEC SS-300 MK2 솔리드 턴테이블 매트, SRS-9 레코드 스태빌라이저
한편 다양한 암 브라켓을 만드는 점도 재미있다. 숏 암과 롱 암을 구분해서 각각 장착할 수 있게 해놨다. 또 테크닉스의 SL-1000R, SH-1000R 용 암 베이스도 만들고 있고, 야마하 GT-5000에 달 수 있는 암 베이스도 출시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SS-300 MK2라는 매트에 관심이 간다. 고정밀 알루미늄 합금으로 만들어진 제품이어서 기존의 어떤 모델에 투입해도 무방하다. 그에 따른 SRS-9이라는 인슐레이터는 일종의 덤.
톤암의 역할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다.
SAEC WE-4700 톤암
자, 그럼 본격적으로 WE-4700에 대해 알아보자. 그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바로 톤암의 존재 이유다. 사실 아날로그 시스템을 들여다보면, 턴테이블 메커니즘이나 카트리지 그리고 포노 앰프 등 눈길을 끄는 요소들이 한 둘이 아니다. 그러므로 톤암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도외시되고 있는 실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카트리지에서 픽업한 미세하면서 예민한 신호를 포노 앰프에 전달한다는, 무척 중요한 사명을 수행하는 톤암의 존재는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랄 정도다. 40년 전에 발표한 제품의 경우, 당시 최상의 퀄리티로 만들어졌으며, 소재라던가 강성이라는 측면에서도 현대의 어떤 기기도 대적하기 힘든 수준을 달성한 바 있다. 특히 숙련된 장인의 손길로 꼼꼼하게 조립된 완성품을 보면 절로 탄성이 나올 정도다.
SAEC WE-4700 톤암
이런 역사적 명기를 다시 만든다는 것은 당연히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간 발전된 기술이 대폭 투입되면서 초정밀 절삭 가공이 이뤄진 것은 물론이고, 동작 특성과 강성 등을 세밀하게 연구해서 최상의 전달 능력을 확보하고 있다. 이 단계에서 시계나 일본도 제조의 수준에 도달한 장인들을 모셔 와서 최종 어셈블리를 실시하고 있다. 이로써 전작의 내용을 압도하는 수준의 새로운 명기가 탄생되기에 이른 것이다.
WE-4700의 특징
그럼 본 기의 특징 몇 가지를 이번 기회에 소개하도록 하겠다.
- 최신의 가공 기술을 사용해서 부품의 정밀도를 높이고, 다이내믹 레인지를 확장했으며, 왜곡을 최소화했다.
- 내부 배선재는 PC-Triple C의 도체를 사용했다. 피복은 천연 소재를 사용해서 자연스러운 절연을 이루고 있다. 명쾌한 스테레오 이미지와 음악적 감흥을 끌어낼 수 있는 내용을 갖춘 것이다.
- 암 베이스는 높이 조정이 쉬우며, 특히 샤프트 부분의 강성을 높여서 내구성을 한껏 끌어올렸다.
- 강성이 높은 두랄루민을 투입해서 헤드셀을 만들었다. 카트리지의 대응 폭이 넓어서 대부분의 모델을 다 커버하고 있다. 와이드 레인지한 사운드의 재생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 2 종류의 카운터 웨이트를 채용해서, 카트리지의 무게가 13g~35g 사이에 이르면 모두 달 수 있다. 현재 시판되는 카트리지 대부분이 여기에 속하므로, 당연히 어떤 모델이건 주저 없이 달면 된다.
한편 동사가 자랑하는 기술은 더블 나이프 엔지 시스템(Double Knife Edge System). 톤암을 올리고 내리는 메커니즘을 정교하게 구축하는 과정에서 나온 기술이다. 사실 음반을 돌리다 보면 음반의 휨 상태에 따라 끝없이 톤암이 위아래로 솟구친다. 그 과정에서 이 기술을 통해 정확한 시그널을 재생하고, 디스토션을 대폭 감쇄시키는 결과를 얻고 있는 것이다. 언제고 직접 시청할 기회가 생기면, 자세한 리포트를 쓸 생각이다.
결론
히든 챔피언이라는 용어가 있다. 사업체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아도, 해당 분야에서 막강한 지배력을 가진 회사를 말한다. 전술한 나가오카의 경우, 전 세계 다이아몬드 팁 생산량의 90% 이상을 독점하고 있다. SAEC은 톤암 분야에서 아직 그 정도는 아니지만, 세계적인 제품 못지않은 퀄리티를 확보하고 있는 만큼, 앞으로의 활약이 기대된다. 이제 WE-4700으로 포문을 연 만큼, 과거의 영광을 재현해서 이 분야의 히든 챔피언으로 등극할 수 있는 메이커라고 본다. 향후의 행보가 궁금해지는 메이커라 하겠다.
이 종학(Johnny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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