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악의 발전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는 19세기에 유럽에서 활동한 유명한 피아니스트로서 당대 그의 인기는 요즘 아이돌 가수 그 이상이었다고 한다. 잘생긴 외모와 뛰어난 연주 기교로 듣는 이들의 눈과 귀를 휘어잡았던 그의 연주회 객석은 각지에서 온 귀부인들로 가득 찼고, 그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이 어찌나 대단했던지 그의 연주에 열광하던 어떤 여인들은 흥분한 나머지 장갑을 무대 위로 던지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정숙을 강요받던 귀족 계층 여인들이 이런 경망스런(?) 행동을 벌였다는 것이 당시 세간의 큰 화제였다고 한다.) 리스트는 자신의 빼어난 기교와 신체적 조건을 활용하여 유명하면서도 어렵기로 악명이 높았던 다른 악기 연주곡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하는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바이올리니스트였던 니콜라 파가니니(Niccolò Paganini)의 곡을 주제로 하여 편곡한 「라 캄파넬라(La Campanella)」이다.
▴ 프란츠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 발렌티나 리시차(Валентина Лисиця, 1973-)의 연주.
위 영상의 리시차의 멋진 피아노 연주와 함께 등장하는 장면은 엄청나게 복잡한 기계와도 같은 피아노를 제조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대관절 이 아름다운 음색을 자랑하는 저 피아노는 도대체 어떻게 발명이 된 걸까?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발명하지는 않았을 터, 당시 서양인들은 대체 왜 이런 악기가 필요하다고 느꼈던 것일까? 이러한 피아노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양 음악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악기에 대해 얘기하기 전에 우리 인간이 가진 고유한 악기, 곧 목소리로 노래하는 성악(聲樂)을 먼저 생각해보자. 동양 음악도 마찬가지지만 서양 음악의 시작은 단성부(單聲部) 음악이었다. 단성부 음악의 영어 멍칭인 모노포니(monophony)라는 단어의 모노(mono-)라는 접두어에서 알 수 있듯이 단성부 음악이란 하나의 단일한 선율로 구성된 음악을 말한다.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곡조를 따라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초창기 교회 음악은 모두 이와 같은 모노포니였다.
▴ 모노포니의 예: 「주기도문(Pater Noster)」, 그레고리오 성가(Gregorian chant).
그 이후에 발전한 것이 바로 화성적(和聲的) 단성부 음악인데 이를 영어로는 호모포니(homophony)라고 한다. 호모포니의 접두어인 호모(homo-)는 한 종류의 선율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모노포니의 단일한 선율과는 다른 말이다. 즉, 종류가 하나일 뿐 선율은 여럿이라는 뜻이다. 호모포니에서는 모노포니에서 말하는 단일한 선율에 동일한 진행을 가지는 다른 선율이 덤으로 얹어져 있기 때문에 화성이 존재하는데 초창기 호모포니는 대개 일정한, 혹은 정해진 음정 간격을 가진 서로 다른 선율이 동시에 상행하거나 동시에 하행하는 형태를 가졌다.
▴ 호모포니의 예: 「Rex Caeli Domine」, 평행 오르가눔(organum)
호모포니의 발전은 이 엄격한 진행 방식을 깨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즉, 초기 호모포니 형태였던 평행 오르가눔의 진행에서 벗어나 아랫 성부가 상행 진행을 하면 윗 성부가 하행 진행을 하거나 엇박자가 도입되는 등 조금 복잡해진 변칙 오르가눔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좀 더 대담해진(?) 결과, 다른 선율이 점차 독립적으로 진행하는 다성부(多聲部) 음악, 즉 폴리포니(polyphony)가 발생하였다. 우리는 접두어 폴리(poly-)에서 다성부 음악의 특징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¹
▴ 폴리포니의 예:「Itene o Miei Sospiri」, 마드리갈(Madrigal)
건반 악기의 발전
악기로 노래하는 기악(器樂) 역시 다를 바 없다. 최초의 악기가 어떤 형태였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지만 적어도 한 번의 연주로 하나의 음을 내는 형태였을 것이다. 즉 모노포니처럼 단선율을 연주하는 악기가 처음 개발되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성악이 단성부에서 다성부로 발전한 것처럼 기악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을 것이고, 이러한 변화는 필연적으로 다선율을 연주할 수 있는 악기의 개발을 요구했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가장 잘 부합하는 악기의 형태는 바로 건반 악기였다.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건반 악기는 10 개의 손가락의 개별적 움직임 및 합치된 움직임으로 연주되므로 수많은 악기들 중에서 가장 많은 수의 음을 동시에 연주해낼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우리의 손가락은 민첩하고도 다양한 움직임을 의지에 따라 조절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은가? 따라서 건반 악기는 기교를 통해 기악 음악을 다양하고 풍부하게 발전시킬 수 있는 여지가 많은 악기였다. 또한 연주 역사가 짧은 것도 아니었으므로 건반 악기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연주되어 왔던 친숙한 악기이기도 했다.² 그러므로 다선율 음악의 발전을 건반 악기들이 견인했다는 사실과, 그리고 특히 그 중에서 피아노가 르네상스 이후 기악 음악을 선도하게 된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 미국 애틀랜틱 시티(Atlantic City)에 있는 파이프 오르간.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오르간으로 건반에 해당하는 매뉴얼(manual)이 무려 7개인데다가 연결된 파이프의 개수는 33,112개나 된다.
세속 음악이라고 할 게 변변치 않았던 서양의 고대 및 중세 시대 때 음악의 중심은 바로 교회였고 그 중심에는 오르간이 있었다. 그런데 교회 음악에서 오르간은 전례 중에 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것을 찬미하기 위한 도구였기 때문에 건물 전체를 울릴 수 있는 소리를 발생시켜야 했다. 따라서 오르간의 규모는 대체로 컸으며, 이 때문에 오르간은 건물 설계시 고려되어야 했던, 일종의 건물의 부속품과 같은 존재였다. 게다가 지금같이 전력을 이용한 송풍(送風) 장치가 없었던 옛날에는 인력이나 기계를 이용하여 지속적으로 바람을 관에 불어넣어야 했다. 따라서 비록 르네상스 시기 이후 세속 음악이 유럽 사회 전반에 확산 및 발전되기 시작했다 하더라도, 이런 거대한 악기와 부속 장치들을 개인 집에 설치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따라서 오르간과 같은 건반 악기의 개량은 두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졌는데 첫번째는 소형화였고 두번째가 기명악기로부터의 탈피였다. 그 결과 유럽 사회에 등장하게 된 대표적인 개량 건반악기가 바로 하프시코드(harpsichord)와 클라비코드(clavichord)였다. (이 두 악기의 역사를 설명하면 너무 글이 길어지고 산만해질 테니 악기의 특징만을 다루기로 하겠다.)
하프시코드의 건반은 피아노 건반과 흑백이 반대로 되어 있다. 수평하게 놓인 건반이 눌리면 지레의 원리에 따라 반대쪽에 있는 잭(jack)이 들려 올라가는데, 이 잭에 설치되어 있는 탄성력 있는 플렉트럼(plectrum)이 함께 올라가게 되면서 수평하게 놓인 현을 마치 기타 줄 퉁기듯 뜯는다. 따라서 하프시코드 소리는 기타같이 현을 뜯는 소리이다. 이렇게 개량된 현명악기인 하프시코드의 소리는 집안에서 울러 퍼지기에 적당한 수준이었는 데다가 크기는 책상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당시 돈 좀 있는 사람들이 집에 들여놓고 연습하기에 매우 좋은 악기였다.
▴ 하프시코드의 연주 원리
그런데 하프시코드가 소리를 내려면 건반을 눌렀을 때 플렉트럼이 현의 높이보다 높아져서 퉁겨낼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건반을 약하게 누르면 플렉트럼이 현의 높이에 도달하지 못한채 아래쪽에서 깔짝거릴 뿐이기에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는다. 건반을 강하게 눌러도 플렉트럼이 도달하는 높이에는 변화가 없는 데다가 건반이 눌리는 깊이가 그리 깊지도 않으므로 최종적으로 현을 퉁길 때 플렉트럼이 지나가는 속도에도 그리 큰 차이는 없다. 그리고 하프시코드는 그렇게 피아노처럼 세게 누르며 연주하는 악기도 아니다! 이 사실들을 종합해보면 우리는 하프시코드가 가진 한 가지 한계점을 알아낼 수 있다. 바로 건반 연주의 방식을 통해 음정의 셈여림을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하프시코드에는 오르간에서 차용한 것과 같이 보이는 스탑(stop)이라는 것이 있어서 잭이 상승할 때 현을 하나만 퉁길지, 혹은 여러 개를 동시에 퉁길지, 혹은 퉁기는 위치를 바꿀지 결정할 수 있게 함으로써 작은 소리나 큰 소리를 표현할 수 있게끔 장치를 해 놓았다. 하지만 스탑은 연주가 잠시 쉬거나 악절이 끝났을 때 연주자가 약간의 시간을 들여 기계적으로 교체하는 것이지 연주 중간에 개인의 표현에 따라 수시로 변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편 오르간에서와 같이 매뉴얼이 두 개 이상인 하프시코드의 경우 위에 위치한 매뉴얼은 애초에 하나의 현만을 건드리게 하므로 작은 소리가 나긴 한다. 그러나 이 역시 손이 여러 매뉴얼을 왔다갔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한 곡을 연주할 때 음정의 셈여림을 자유자재로 제어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 하프시코드로 연주한 요제프 하이든(Joseph Haydn, 1732-1809)의 「Sonata in B Minor, Hob. XVI:32」
매뉴얼을 오가면서 연주함과 동시에 1분 39초경에 연주자가 스탑을 바꾸는 것을 볼 수 있다.³
이에 반해 하프시코드보다 먼저 발명되었던 클라비코드라는 악기는 소리의 셈여림을 표현할 수 있는 건반악기였다. 클라비코드의 구조는 매우 단순한데, 소리 강약을 제어하기 위해 현을 뜯는 플렉트럼 대신 현을 때리는 탄젠트(tangent)를 키 레버 끝에 설치하였다. 건반을 누르면 지레의 원리에 따라 탄젠트가 공중에 떠 있는 현을 때리게 되고 이것이 소리를 만들어내는데, 건반을 약하게 누르면 탄젠트가 현을 느린 속도로 때리게 되므로 약한 소리가 나오게 되고, 반대로 건반을 강하게 누르면 탄젠트가 현을 빠른 속도로 때리게 되므로 센 소리가 나오게 된다.
▴ 클라비코드의 연주 원리
그런데 클라비코드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는데, 바로 악기 소리가 극단적으로 작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것은 탄젠트를 이용하는 악기 구조상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건반을 눌러서 탄젠트가 현을 때린다. 그것까지는 괜찮은데 건반을 누를 때의 상태를 달리 말하자면 탄젠트가 현을 건드리고 있는 형태이다. 진동하는 현을 가만히 건드리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현은 순식간에 진동 운동을 잃고 정지 상태로 급격하게 바뀌게 되며 현에서 나는 소리 역시 문자 그대로 '죽어 버린다'. (앞에서 살펴본 하프시코드의 경우 플렉트럼이 현을 퉁기고 그냥 지나가버린 뒤 하행할 때는 현을 크게 건드리지 않고 슬쩍 내려오므로 이런 현상이 발생하지 않는다.) 게다가 당시 기술력으로 제조한 클라비코드의 현은 황동이었는데, 이렇게 만든 금속선이 끊어지지 않는 선에서 악기를 연주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악기 소리가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클라비코드는 집안에서 연습을 할때에는 적절했지만 공연장에서, 아니 심지어 집에서 하는 파티 자리에서 연주 실력을 뽐내기에는 상당히 부적합한 악기였다. 아무리 강약 표현이 섬세하게 가능하다고 해도 남들에게 보여줄 수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클라비코드로 연주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의 「골드베르크 변주곡(Goldberg Variations)」
영상에서는 소리가 무척 큰 것 같지만 타건시 발생하는 소음의 소리를 생각해보면 악기 소리가 타건 소음 소리와 비교될 정도로 무척 작은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하프시코드와 클라비코드는 악기 구조상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다. 따라서 바로크 시대 이후 기악 음악이 비약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사람들은 두 악기들의 단점이 극복되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건반 악기의 개량은 이제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했을까? 사람들은 우선 대중 공연장에서도 충분히 들릴 만한 소리를 낼 수 있는 건반 악기를 필요로 했고,한발 더 나아가 소리의 강약이 연주 중에 자유롭게 조절될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당시 악기들은 기껏해야 2~3 옥타브 정도의 음을 표현할 뿐이었으므로, 사람들은 좀 더 넓은 음역을 표현할 수 있는 건반 악기를 원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이탈리아의 악기 제작자인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토포리(Bartolomeo Cristofori, 1655-1731)라는 사람이 세상을 뒤흔들 만한 기막힌 악기를 세상에 내놓았으니 그것이 바로 오늘날 피아노라고 줄여 부르는 피아노포르테(pianoforte)라는 악기였다. 이 악기는 당시 건반 악기의 한계점으로 지적되던 소리와 음역 문제를 동시에 멋지게 해결해냈다. 이 새로운 건반 악기는 기존의 건반 악기와는 뚜렷한 차별성을 가졌는데, 그것을 세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해머(hammer)를 사용하여 현을 때린다.
2. 더욱 강하고 튼튼한 현을 사용한다.
3. 더욱 튼튼한 본체를 제작했다.
이 중에서 이번 편 후반부에서 다룰 내용은 바로 1번, 피아노는 해머를 사용하여 타현(打絃)한다는 것이며 다음 편에서 다룰 내용이 바로 2번, 피아노의 현에 관한 내용이다.
해머와 탄성력
피아노의 발음 원리를 이해하는 것의 상당 부분은 바로 이 해머라는 특수한 구조를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해머는 피아노의 건반마다 연결되어 있는 일종의 망치같은 구조인데 둥글게 마감된 해머의 주재료는 겹겹이 치밀하게 쌓은 부직포(不織布, nonwoven fabric)이다.⁴ 건반을 눌렀을 때 부직포 해머가 연결된 정교한 목재 기계 구조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데 이를 액션(action)이라고 부르며 아래의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가히 복잡한 구조의 현란한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 피아노 해머의 생김새와 구조
▴ 슈타인웨이(Steinway) 그랜드 피아노의 액션
피아노 액션시 해머는 영상에서 본 것처럼 수직한 방향으로 올라오게 되고 아래 모식도처럼 현을 때림과 동시에 약간 들어올리게 된다. 직관적으로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해머가 현을 세게 때리면 현은 더욱 더 많이 들리게 될 것이다. 즉, 변형되는 정도 x가 훨씬 커질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해머가 현을 세게 때리게 할 수 있을까?
▴ 피아노 해머의 타현
이제 물리학적으로 접근해보자. 건반에 큰 힘(F)을 주어 빠르게 내려친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뉴턴의 역학 제2법칙에 따라 정교하게 연결된 목재 구조를 따라 해머는 빠르게 가속(a=F/m)될 것이다. 가속도가 크기 때문에 정지 상태에 있던 해머가 가속되어 현에 도달할 당시 속도(v=at)는 매우 빠르게 된다. 속도가 빠르다는 것은 해머가 가지는 운동량(p=mv)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해머가 현에 충돌하게 되는데 이 때의 충격량은 해머가 가지는 운동량과 같으므로 해머와 현이 충돌하는 시간이 비슷하다고 가정한다면 해머가 현에 가하는 충격력(F=mv/t)은 결국 커지게 된다. 그러면 훅의 법칙에 따라 탄성체인 피아노줄의 변형되는 정도(x=-F/k)는 커지게 된다. 요약하자면, 건반에 힘을 세게 주고 빠르게 내려치면 피아노줄이 훨씬 많이 변형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악기가 소리를 내는 것이 무엇이었다고 2편에서 그랬더라? 바로 악기에 유도되는 정상파 때문이라고 했다. 따라서 피아노줄이 크게 변형되는 충격을 받게 되면 그에 따라 유도되는데 정상파의 진폭 역시 클 수밖에 없다. 2편 말미에서 진폭은 바로 소리의 세기와 관련된 물리량이라고 언급했었다. 그러므로 건반을 빠르게 내려치면 피아노에서 나는 소리가 커지는 것이다.
어라, 그런데 클라비코드의 탄젠트도 이런 식으로 현을 때려서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었나? 여기서 아주 중요한 차이를 알아내려면 위의 피아노 액션 영상을 다시 보자. 피아노 해머 구조상 해머는 현을 때린 뒤 재빨리 후퇴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따라서 현의 진동은 클라비코드의 탄젠트처럼 해머에 의해 방해받지 않게 된다. 그 결과 발생하는 효과는 두 가지이다.
1. 같은 음을 연속해서 빠르게 칠 수 있다.
2. 해머가 재빠르게 후퇴한다는 것은 현과 해머의 충돌 시간(t)을 극단적으로 짧게 만들 수 있으므로 해머가 현에 가하는 충격력(F=mv/t)을 보다 극단적으로 높일 수 있다. 따라서 피아노 소리는 클라비코드 소리보다 월등히 커질 수 있는 물리학적 근거를 가지게 된다.
▴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의 「마왕(Der Erlkönig)」. 같은 음을 빠르게 연타하는 반주의 대표적인 곡이다. 물론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Dietrich Fischer-Dieskau)의 노래 및 연기는 일품이다.
해머의 응력
그런데 피아노 해머의 비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번에 주목해야할 점은 피아노 해머가 겹겹이 쌓인 부직포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다. 부직포는 억세고 질긴 천이긴 하지만 힘을 가하면 눌리는 등 변형될 수 있는 소재이다. 따라서 해머가 현을 때릴 때 현만 들리는 변형을 겪는 것이 아니고 실은 해머 역시 머리 부분이 조금 눌리는 변형 과정을 겪게 된다.
▴ 해머의 변형
일차원적인 현의 변형과는 달리 해머의 변형은 3차원적이고 복잡하다.⁵ 그런데 이러한 물질의 일반적인 변형을 불러일으키는 힘인 응력(σ, stress)과 변형(ε, strain) 사이에는 훅의 법칙과 비슷한 관계가 있으며 그 사이에는 탄성 계수 k에 해당하는 영의 계수(E, Young's modulus)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런데 마치 용수철이 탄성체처럼 작용하다가 일정 수준 이상의 변형이 일어나면 더 이상 탄성체처럼 작용하지 않게 되다가 결국 끊어지는 현상을 우리는 모두 초등학교 때부터 배워서 알고 있다. 이것은 용수철만의 특별한 성질이 아니고 변형을 겪는 세상 대부분의 재료들이 다 이런 성질을 갖는다. 즉, 일정 수준까지는6 응력에 비례하는 '선형적(linear)' 변형을 보이다가 그 이상의 응력에서는 비례하지 않는 '비선형적(nonlinear)' 변형을 보이게 된다. 이 경우에는 응력과 변형의 비인 영의 계수가 일정하지 않게 된다. 만일 어떤 물질이 선형적인 변형 구간을 상대적으로 많이 나타내어 영의 계수가 일정하다면 그것은 선형 탄성체라고 부를 수 있고, 대체로 비선형적인 변형 구간을 상대적으로 많이 보여 영의 계수가 일정하지 않게 된다면 그 재료는 비선형 탄성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력과 변형 사이의 관계. 아래 그래프의 붉은 부분이 비탄성체 거동을 보이는 비선형적 변형 구간에 해당한다.
부직포로 구성된 피아노 해머는 바로 비선형 탄성을 가진 물질이다. 해머의 영의 계수는 해머가 얼마나 변형되느냐에 따라 달라지게 되는데 해머가 변형되는 정도는 자연스럽게 현이 변형되는 정도에 비례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결국 피아노 현을 때리는 속도에 연관되지 않는가? 따라서 해머가 피아노 현을 세게 때릴 때와 약하게 때릴 때 해머의 영의 계수가, 다시 말해 해머의 탄성 성질이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측정에 따르면 해머가 피아노 현을 세게 때리는 경우에는 해머의 강도는 영의 계수가 높아져 상대적으로 단단한 것처럼 느껴지고, 반대로 피아노 현을 약하게 때리는 경우에는 영의 계수가 낮아져 해머의 강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7 그런데 이게 뭐 신기한 사실은 아니고 우리가 감각으로 느끼는 바를 물리학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피아노 해머를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러본다고 생각해보자. 처음 얼마간은 푹신하게 느껴질 것이다 (영의 계수가 낮다). 그러나 계속 더 깊게 누르게 되면 부직포의 푹신함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그냥 딱딱한 나무 막대기를 누르고 있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영의 계수가 높다).
그럼 이게 무슨 현상과 관련이 있나? 예를 들어 같은 높이에서 계란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해보자. 딱딱한 콘크리트 블록 위에 떨어뜨리면 계란은 반드시 깨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푹신한 담요 위에 스펀지와 각종 지푸라기를 푹신하게 깔아 놓은 지점 위로 계란을 떨어뜨린다면? 계란은 대개 깨지지 않을 것이다. 아니, 같은 높이에서 자유 낙하시킨 계란들은 해당 재료 표면에 닿을 때 속도(v)가 동일할 것이므로 운동량(p=mv)은 같을 텐데 왜 어떤 것은 깨지고 어떤 것은 안 깨지나? 원인은 충격력(F=mv/t)에 있다. 딱딱한 표면의 경우 계란과 상호작용하는 시간이 굉장히 짧으므로 충격력이 커지고 그때문에 계란이 깨지게 된다. 반대로 푹신한 표면의 경우 계란과 상호작용하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길기 때문에 충격력이 급격히 낮아져서 계란이 온전하게 보존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논리를 피아노 해머에 적용하면? 해머가 피아노 현을 세게 때리면 해머의 강도가 단단한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해머가 현에 가하는 충격시간은 짧아지게 된다. 반대로 피아노 현을 약하게 때리면 해머의 강도는 약한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해머가 현에 가하는 충격시간이 길어지게 된다. 아래 그림을 참고하면 '매우 세게'라는 셈여림표에 따라 145 N 의 힘으로 타건하면 해머가 현에 미치는 충격 시간은 0.22 ms 정도이다. 그런데 '매우 여리게'라는 셈여림표에 따라 거의 1/12 수준인 12 N 의 힘으로 타건하면 충격 시간은 0.47 ms 정도로 두 배 이상 늘어나게 된다.
▴ '매우 세게'인 포르티시모(ff)일 때와 '매우 여리게'인 피아니시모(pp) 세기로 연주할 때 현에 가해지는 충격 펄스를 나타낸 그림
그 결과 건반을 때리는 힘의 차이가 단순히 음량의 차이만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게 된다. 건반에 유도되는 충격의 크기와 폭이 다르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현에 유도되는 정상파의 형태가 다소 달라지게 된다. 이 말은 정상파의 파형에 변화가 생긴다는 것인데 전편에서 파동의 형태는 음색과 관련된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세게 연주된 음과 약하게 연주된 음은 소리의 크기뿐만 아니라 음색에서도 차이가 나게 된다. 못 믿겠으면 피아노의 가온다 음을 세게 눌러보고 그 다음 약하게 눌러보라. 같은 다 음임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음색이 미세하게 다름을 느낄 수 있다.
▴ 프레데리크 쇼팽 (Frédéric Chopin, 1810-1849)의 「Étude Op. 10, No. 12」. 예브게니 키신(Евгений Кисин, 1971- )의 연주.
위의 영상에서 알 수 있듯이 강하게 몰아칠 때의 격정적인 음색과 부드럽게 연주할 때의 서정적인 음색은 사뭇 다른데 파아노는 이 상반된 음량과 음색뿐만 아니라 그 중간 지점에 있을 그 무수하게 다른 음량과 음색들을 연주자의 의도에 따라 세밀하게 구현해낼 수 있다. 이는 기존의 오르간, 하프시코드, 클라비코드와는 확연히 다른 특징으로 작곡가 및 연주자의 감정을 보다 풍부하게 드러낼 수 있다는 큰 장점이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특징은 바로 피아노가 가진 해머라는 독특한 구조에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김성수
¹가만, 호모포니의 반대는 헤테로포니(heterophony)가 아니란 말인가? homo-(同)와 hetero-(異)는 반대의 접두어니까, 그렇다면 헤테로포니는 폴리포니인 걸까? 헤테로포니는 분명 호모포니와는 다르지만 폴리포니와도 다르다. 헤테로포니는 호모포니의 주선율을 변형한 선율을 다른 성부가 담당하는 것인데, 호모포니처럼 엄격한 법칙에 따라 선율이 구성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폴리포니처럼 아주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선율이 구성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이걸 빼놓고 바로 폴리포니로 설명이 넘어갔느냐? 서양 음악에서는 헤테로포니의 예를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²최초의 건반악기로 알려진 오르간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는 기원전 3세기부터 선을 보였다고 하니 건반악기의 역사는 적어도 2,300여년 정도 하는 것이다.
³스탑을 바꾸니 아래 매뉴얼의 소리가 둔탁하게 바뀌는데 이런 소리가 나게끔 해 주는 스탑을 류트 스탑(lute stop)이라고 한다.
⁴여기서 잠깐! 흔히 부직포라고 하면 합성 섬유로 만든 것을 떠올리지만, 본래 부직포라는 것은 섬유를 열 혹은 화학적 압착 과정을 통해 서로 얽히게 하는 처리를 거쳐 만든 직물을 통틀어 부르는 말로 씨줄과 날줄을 교차하는 직조(織造)를 통해 만들어진 직물(織物)과 대비된다. 피아노가 최초로 만들어졌을 때 부직포를 제작하기 위해 사용한 섬유는 양털로부터 얻은 섬유였다.
⁵응력과 변형은 모두 3차원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텐서(tensor)로 표현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역학 수업을 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런 사실은 간단하게 넘어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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