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피아니스트의 마지막 인터뷰>의 한 장면
너무나 좋아하는 감독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의 영화 [유스]의 제작진 그리고 영화 [기생충]의 제작진 등 화화 멤버들이 다시 모였다. 영화 제목은 [피아니스트의 마지막 인터뷰]. 작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무대 공포증에 시달리는 피아니스트 헨리 콜을 주인공으로 펼쳐지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영화다. 주인공이 클래식 피아니스트인만큼 유럽의 아름다운 풍광과 피아노 연주가 연신 귀를 즐겁게 한다. 영화의 시작부터 “음악이 없다면 인생은 한낱 실수일 뿐이다”라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엔 움찔할 수밖에.
그렇다. 이 미친 듯한 오디오에 대한 탐닉도 결국 인생을 실수로 만들지 않기 위한 발버둥인지도 모른다. 결국 오디오는 음악을 듣기 위한 도구이지 그것이 목표는 아니니까. 물론 반기를 드는 사람도 있겠지만 필자로선 변하지 않는 생각이다. 필자처럼 음악을 중심으로 오디오 취미에 발을 담근 사람들은 피아노 타건 하나에도 자기 주관이 뚜렷하다. 그래서 오디오, 특히 스피커 하나를 구입할 때도 자신의 취향대로 밀어붙인다.
하지만 종종 오디오 마니아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하는 것을 본다. 예를 들어 따뜻하고 온건한 소리를 좋아해도 포칼, 현의 풍부하고 촉촉한 질감을 좋아한다면서도 포칼 이런 식이다. 다소 냉정하고 차가운 음색을 가졌더라도 입체적인 무대가 펼쳐지는 게 좋다면서 하베스를 찾는다. 물론 그때마다 예산이나 가족들 눈치 때문에 그런 결정을 할 수도 있지만 음악과 음향에 대한 주관 없이 휘둘리는 경우도 많다.
이게 다 음악, 음질에 대한 주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없었던 음악적 취향이나 음향적 주관이 생길 리 만무다. 그렇다면 몇 개의 레퍼런스가 될 만한 곡이 있다면 조금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이미 필자가 출간한 두 권의 [고음질 명반 가이드북]에서 여러 앨범들을 소개했지만 추가로 좀 더 소개해보고자 한다. 소개할 앨범은 평소 오디오 리뷰어로서 하드웨어 테스트에 종종 시청하는 음악들로 녹음도 뛰어나고 음질에 대한 기준이 되어줄 수 있을만한 곡들을 담고 있다. 음악적인 부분은 차치하고서라도 음향적인 취향을 기르고 소리의 완성도에 대한 척도가 되어줄 수 있다면 좋겠다. 이미 주관이 뚜렷한 분이라면 과감히 넘어가도 좋다.
1. 켈리 스윗 / We Are One
10년도 더 된 이야기다. 2007년경 국내에도 발매된 앨범으로 당시 팝 음악계에선 여러 여성 팝 보컬이 인기가 높았고 그들을 뒤잇는 차세대 디바를 원했다. 그중 한 명으로 추켜올리던 뮤지션이 켈리 스윗이었다. 보도 자료엔 셀린 디옹,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의 전 프로듀서 마크 포트만이 참여했고 빌보드 차트와 라디오에서 인기를 모으고 있다고 광고하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존재는 잊혀져 갔다.
그렇다고 해서 이 앨범에 담긴 음악마저 퇴색된 건 절대 아니다. 신비로운 보컬과 함께 제법 비장한 분위기로 시작하는 ‘We are one’을 시작으로 뒤를 이어 ‘Raincoat’ 그리고 하드록 밴드 에어로스미스의 곡을 절묘하게 편곡한 ‘Dream on’이 흐른다. 하지만 이 앨범의 진가를 뒤늦게 알게 된 것 단 두고 때문이다.
하나는 ‘Nella fantasia’로 이 곡은 높은 고역 옥타브를 얼마나 안정되게 재생해 주는지 하드웨어의 수준을 가늠할 때 무척 유용하다. 특히 스피커의 트위터가 하드 돔이냐 소프트 돔이냐에 따라서 고역의 뉘앙스가 많이 다르다. 때론 고역 재생 수준이 떨어지는 스피커의 경우 밋밋하게 들리거나 또는 탁하게 들리기도 한다. 더불어 ‘Je T’Aime’같은 경우도 오디오 시스템의 중, 고역 투명도, 공간감을 테스트할 때 꼭 들어보는 트랙이다. 그중에서도 얼마 전 YG 어쿠스틱스의 스피커로 들었던 ‘Nella fantasia’은 압권이었다.
2. 얀 가바렉 / Officium
요즘처럼 공연을 즐기지 못할 때면 과거 재밌게 즐겼던 공연을 머릿속에 떠올리곤 한다. 예술의 전당이나 세종 문화회관 그리고 롯데 콘서트홀까지. 언젠가는 뮤지크페라인 황금 홀도 직접 가볼 수 있는 날이 오겠지. 그리고 최근 얀 가바렉의 음악을 듣는데 꽤 오래전 예술의 전당에서 관람했던 그의 공연이 생각났다. 음반으로만 듣던 그의 소프라노 색소폰의 위력을 처음 체험했던 날이었다.
그 당시 얀 가바렉이 연주했던 음악들은 [Twelve Moons]같은 앨범에 수록되었던 곡이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앨범은 그보다 더 오래전인 1994년 작품인 [Officium]이다. 사실 오래전 이 앨범을 처음 접했을 땐 음악적으로 크게 감흥을 받지 못했었고 나중에 오히려 더 좋아하게 되었다. 공연을 본 후부터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하이엔드 오디오를 더욱 깊게 탐닉하면서부터다.
그저 고리타분하고 어렵게만 느껴졌던 앨범이 엄청난 음향적 쾌감을 통해 멋지게 다가오는 시점이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엔 음악에 대한 이해도 더 깊어지면 음악 자체도 좋아하게 되었다. 음악을 듣지 않고 음향만 탐닉한다고 질타를 보내는 음악 애호가도 있지만 오히려 음향적 감동을 통해 음악과 가까워지는 경우도 있다. 요즘 이 앨범을 자주 꺼내 듣는다. 그리고 엘피도 구입하게 되었다. 오디오가 과거에 별로 감흥을 받지 못했던 음악을 소환해 주는 경우다. 이 곡 또한 트위터의 성능을 가늠하는데 무척 좋은 곡인데 배음 표현이 가장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색소폰이 얼마나 왜곡 없이 깨끗하게 재생되는지 테스트해보길 바란다.
3. 앨리스 사라 오트 / Wonderland
1970년, 25세의 한 첼리스트는 쉽게 피로해했고 눈이 침침해지기 일쑤였다. 손가락은 물론 발도 굳어져 걸음걸이가 이상해졌다. 바로 천재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의 20대 중반은 그렇게 아프고 불길한 기운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다발성 경화증이란 병은 그녀를 천천히 목조여 오면서 삶을 방해했다. 그녀가 42세에 일찍 생을 등진 이유다.
현재 그 병을 앓고 있는 또 한 명의 음악인이 있다. 이번엔 첼리스트가 아니라 피아니스트다. 왜 천재적 재능을 가진 뮤지션들에게 이런 병마가 자주 찾아오는 것일까. 다행히 앨리스 사라 오트는 이미 많은 명연을 남겼다. 가장 감명받은 앨범은 쇼팽의 ‘녹턴’ 여주였고 녹음도 무척 뛰어나 오디오의 성능을 체크할 때도 자주 들었다.
이번에 소개하고 싶은 곡은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 곡을 재생하자마자 좌측에서 번개처럼 날아오는 피아노 타건 그리고 맑고 경쾌한 그녀의 피아노 연주는 음정과 스피드, 어택의 강도 등 여러 요건이 충족되었을 때 상당한 쾌감을 동반한다. 아마도 가장 커다란 쾌감을 얻었을 땐 매지코 M2였던 것 같다. 매지코로 이 곡을 듣고 있으면 베릴륨과 다이아몬드로 만든 트위터는 무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4. 요요마 & 바비 맥퍼린 / Hush
하나의 드라이브 유닛을 통해 모든 소리를 주파수 대역에 관계없이 모두 재생해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만 현실을 그리 녹록지 않다. 모든 대역을 하나의 유닛으로 재생한다는 풀레인지 유닛이 있지만 주파수 대역에 한계가 있다. 그래서 많은 메이커들은 폭넓은 대역을 두 개 이상의 드라이브 유닛에서 재생할 수 있도록 하고 크로스오버로 잘라서 설계한다.
하지만 2웨이 이상, 그러니까 3웨이 이상의 스피커부터는 크로스오버 튜닝이 매우 힘들며 위상 일치가 어긋나기 쉽다. 바로 각 주파수 대역마다 속도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선 트위터와 미드/베이스를 하나의 축에 합쳐버린 동축 유닛이 유리한 게 사실이다. 예를 들어 탄노이나 케프 같은 브랜드. 최근에 경험한 스피커로는 TAD 같은 경우도 매우 우수한 동축 유닛을 만들어내고 있다.
요요마와 바비 맥퍼린의 [Hush] 앨범에 수록된 ‘Hush little baby’같은 곡을 들어보면 이런 위상 일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인간 악기라는 별명답게 바비 맥퍼린의 보컬은 무척 넓은 대역을 오간다. 그의 보컬이 마치 하나의 유닛에서 나오는 것처럼 음상이 분명하게 맺힌다면 잘 세팅된 오디오지만 여러 유닛에서 나오면서 산만하게 느껴진다면 스피커의 성능이나 세팅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 목소리를 내는 사람의 입은 2웨이도 3웨이도 아닌 단 하나니까 말이다.
최근 이 곡을 가장 인상 깊게 재생했던 스피커는 의외로 액티브 스피커 케프 LS50 Wireless II였다. 동축 유닛을 탑재하고 내부에도 유닛에 최적화된 앰프가 내장되어 있어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시청해도 시간차 없이 매우 또렷한 음상을 형성해 주었다. 반드시 3웨이 이상의 스피커가 좋은 스피커라는 편견은 버리는 것이 좋다. 가능하면 동축이나 2웨이 그리고 대형 스피커라면 적어도 중역과 고역을 가상 동축 방식으로 설계한 스피커를 권하는 이유다.
5. 유코 마부치 트리오
제대로 된 마스터링과 프레싱으로 탄생한 재발매 엘피는 종종 오리지널 앨범을 들을 때보다 더 높은 만족감을 주기도 한다. 특히 최근 45RPM으로 발매하는 트렌드가 생겨 과거 명연들을 종종 45RPM 엘피로 감상하기도 한다. 사실 음질을 극대화하기 위해 45RPM을 선택하지만 불편한 것이 사실이다. 두어 곡 끝나면 엘피를 뒤집어야 하기 때문. 하지만 종종 이런 불편함은 사람을 음악에 잡아두어 음악에 대한 집중력을 높여주기도 한다.
최근 듣고 있는 유코 마부치 트리오의 앨범이 바로 그런 경우다. 얄룽(Yarlung) 레코드라는 레이블에서 출시되었는데 이 레이블은 엘피의 경우 모두 45RPM으로만 제작한다. 대표가 워낙 음질에 공을 들이는 레이블이어서 CD 같은 경우도 특수 합금을 사용해 제작하고 있으니 이해할 만하다. 게다가 스티브 호프만이나 케빈 그레이, 버니 그런드먼 등 특급 엔지니어들이 앨범 제작에 참여하고 있다.
유코 마부치도 예외가 아니다. 일본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 중인 유코 마부치의 피아노 트리오 앨범인 본 작은 아날로그 전문 평론가 마이클 프레머도 극찬했는데 그 이유을 알 것 같다. 2017년 녹음한 이 작품은 정말 환상적인 녹음을 담고 있다. 마치 녹음 현장 앞에 있는 듯 입체적인 무대가 펼쳐지는데 음원은 물론 엘피도 상당히 잘 만들어졌다. 해외 오디오쇼에서 플레이백 디자인의 수장 안드레아스 코흐가 이 앨범으로 시연을 한 이유가 있다.
Written by 오디오 칼럼니스트 코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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