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만든 110옴 AES/EBU 케이블의 위력
Black Cat Tron AES/EBU Cable
AES/EBU 케이블과 크리스 소모비고(Chris Sommovigo). 참으로 할 얘기가 많다. 우선 지금까지 들었던 AES/EBU 케이블의 소리는 잊어야 할 것 같다. 그만큼 크리스 소모비고가 처음 만든 AES/EBU 케이블의 위력은 대단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른 AES/EBU 케이블은 각 대역은 이리저리 잘려나가고 디테일은 심각할 만큼 손상된 소리였다. 일찌감치 정해놓은 110옴 규격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탓이다.
이번 시청기는 크리스 소모비고의 블랙캣 케이블(Black Cat Cable)에서 최근 출시한 ‘Tron AES/EBU Cable’이다. 하이파이클럽 시청실에서 이뤄진 다른 AES/EBU 케이블과의 AB 테스트에서도, USB 케이블이나 동축 케이블과의 비청에서도 압도적이었다. 이번 리뷰는 이에 대한 리포트다.
AES/EBU 케이블의 세계
먼저 AES/EBU 케이블이 어떤 케이블인지 살펴보는 게 순서인 것 같다. 1985년, 미국 오디오 학회(AES)와 유럽 방송 연합(EBU)은 프로 음향 분야에서 지켜야 할 디지털 오디오 신호 전송 규약을 만들었다. PCM 2채널 신호를 밸런스 케이블, 언밸런스 케이블, 광케이블을 통해 손실 없이 전송할 수 있도록 케이블 임피던스와 송수신 측 스펙을 정한 것이다.
여기에 국제 전기 표준 협회(IEC)까지 가세, 각 AES/EBU 표준에 맞는 단자 규격까지 정해지면서 지금의 AES/EBU 밸런스 케이블, BNC 언밸런스 케이블, 동축 언밸런스 케이블이 탄생했다. AES/EBU 케이블은 IEC 60958 타입 1 규격의 XLR 단자를 사용한 110옴 임피던스의 밸런스 케이블. 이에 비해 BNC(Bayonet Neill Concelman) 케이블은 타입 2 규격의 플러그 단자, 동축 케이블은 타입 2 옵티컬 규격의 RCA 단자를 사용한 75옴 언밸런스 케이블이었다.
따라서 이 규격을 제대로 따르려면 AES/EBU 케이블은 밸런스 전송을 위한 3개 도체(플러스 마이너스 접지), 110옴 임피던스, 그리고 XLR 단자를 갖춰야 한다. 그리고 송수신 측 인터페이스는 주로 RS422 라인 드라이버와 리시버가 사용되고 있다. 칩 모양의 RS422은 밸런스 전송 기술을 활용, 최대 10Mbps의 데이터를 최대 15.24m까지 손실 없이 주고받을 수 있다.
요점은 이것이다. 1) AES/EBU는 110옴 임피던스를 갖는 디지털 밸런스 케이블이다, 2) 가청 영역대를 커버하는 아날로그 케이블과는 달리 디지털 케이블은 수십 MHz까지 커버하므로 임피던스 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3) 따라서 AES/EBU 케이블의 특성 임피던스는 무조건 110옴이 나와야 한다, 4) 단자가 똑같은 XLR이라고 해서 40~50옴 수준의 아날로그 케이블로 AES/EBU 케이블을 대신하는 것은 출발부터가 잘못됐다.
크리스 소모비고와 디지털 케이블
블랙캣 케이블의 CEO 크리스 소모비고는 오디오 케이블, 그중에서도 디지털 케이블에 있어서 세계 최고의 권위자로 칭송받는다. 지금도 오디오파일들이 레퍼런스 디지털 케이블로 사용하는 킴버의 ‘Orchid’와 ‘D60’을 설계했고, 1992년에는 디지털 전송 표준 SPDIF에 최적화한 75옴 규격의 동축케이블 ‘Illuminati’를 선보였다.
이 밖에 2000년대를 풍미했던 스테레오복스(Stereovox. 2000년 설립)와 스테레오랩스(StereoLabs. 2008년 설립)도 그가 세운 케이블 제작사였다. 이런 그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스테레오랩스 제품 판매가 어려워지자 직접 딜러에게 판매하는 브랜드로 2010년 론칭한 것이 바로 블랙캣 케이블이다. 2015년에는 일본인 아내와 함께 일본으로 이주, 가나가와현 유가와라에서 제품을 만들었지만 올해 봄 노모가 있는 미국으로 생산거점을 옮겼다.
블랙캣 케이블은 무엇보다 크리스 소모비고가 100% 핸드메이드로 전 제품을 생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케이블 도체의 구조와 인슐레이터(절연체)의 지오메트리, 천연실크 직조의 외피까지 그가 직접 만든다. 선재가 얇은 것도 특징인데 이는 “도체가 두꺼울수록 저항 성분이라 할 셀프 인덕턴스 값이 높아지고 스킨 이펙트가 발생, 고주파가 도체 표면에만 흐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블랙캣 케이블의 시그니처는 웨이브 모양의 선재다. 선재를 사인 곡선처럼 물결치게 만들고 그 위에 튜브를 씌운 것으로, 이는 절연 및 차폐, 선재 보호 역할을 하는 튜브와 선재가 닿는 면적을 최소화해서 음질 손실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케이블을 구부렸을 때에도 큰 영향이 없다. 크리스 소모비고는 이를 ‘나미 컨덕터(nami conductor)’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역시 그가 일일이 손으로 구부려 만든다.
그러면 제작자 입장에서 크리스 소모비고가 생각하는 디지털 케이블의 핵심은 무엇일까. 역시 임피던스 준수였다. 지난해 말 직접 만나 인터뷰와 함께 식사까지 했던 ‘자상한’ 소모비고씨는 이렇게 말했다. “75옴 임피던스 규격의 일루미나티 디지털 케이블을 만든 지가 벌써 25년이나 됐다. 당시만 해도 기기 간 디지털 인터페이스가 정확히 뭘 원하는지 아무도 이해를 못 했다. 디지털 케이블은 아날로그 케이블과 달리 제작자들이 엄수해야 할 ‘표준’이 있는 것이고 그게 바로 75옴인 것이다.”
트론 AES/EBU 케이블
이번 시청기인 ‘Tron AES/EBU Cable’은 크리스 소모비고가 처음 만든 AES/EBU 케이블이다. 그는 지금까지 동축케이블에만 매진해왔다. 심지어 국내에서 이뤄졌던 한 인터뷰를 보면 “하이엔드 유저들은 AES/EBU 케이블을 선호하지만 저희 동축케이블을 쓰는 것이 음질 면에서 낫다”라고까지 했다. 하지만 AES/EBU 케이블을 직접 만들어달라는 유저와 딜러들의 요청이 워낙 강해 작심하고 ‘제대로’ 만든 것이 트론 케이블이다.
이런 크리스 소모비고가 만든 AES/EBU 케이블인 만큼 무엇보다 110옴 특성 임피던스에 모든 초점을 맞췄다. 55옴짜리 동축 선재를 2개 동원한 것도, 오야이데(Oyaide)의 고급 ‘Focus-1’ XLR 단자를 쓴 것도 이 때문이었다. 고주파가 흐르는 디지털 케이블의 속성상 EMI 및 RFI 차폐가 중요한 만큼 인슐레이터로 ‘QuieTex II’라는 신소재를 이중으로 투입했다.
이는 케이블의 특성 임피던스는 외부 전압과 전류의 비율에 의해서가 아니라 케이블 자체의 선재 구조와 절연체 지오메트리, 차폐, 단자 연결 방식에 따라 정해지는 값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특성 임피던스가 송수신 측이 요구하는 규격에 정확히 맞아야 소위 ‘리턴 로스’(return loss)를 최소화할 수 있다.
블랙캣에 따르면 트론 AES/EBU 케이블은 기존의 꼬임 절연 방식을 유지하면서도 AES/EBU 케이블의 듀얼 전송을 통해 보다 넓은 대역폭과 정확한 디지털 전송을 이뤄냈다. 참고로 트론 아래 모델인 ‘Digit AES/EBU cable’은 55옴 동축케이블을 2개 쓴 것은 동일하지만 ‘QuieTex II’ 절연체를 한 겹만 투입했고 단자도 뉴트릭스(Neutrix) 제품으로 바꿨다.
셋업 및 시청
시청에는 오렌더의 네트워크 서버 ‘W20’, 브라이스턴의 DAC ‘BDA-3’, 비투스의 프리앰프 ‘RL-102’와 파워앰프 ‘RS-101’, YG 어쿠스틱스의 ‘Hailey’ 스피커를 동원했다. ‘W20’이 AES/EBU와 동축, USB 출력을 모두 지원하는 만큼 한자리에서 여러 케이블을 비청할 수 있었다.
먼저 몸풀기로 아르네 돔네러스의 ‘Limehouse Blues’를 트론 AES/EBU 케이블로 들어보니 확 전해오는 공간감과 소프트한 음의 촉감이 두드러진다. 음악이 본격 시작되기 전 베이스의 준비 동작마저 느껴진다. 입자가 곱고 예쁘며 화사한 소리다. USB 케이블로 바꿔보면 음이 또렷한데 깊이감이 얕고 경직된 모습. 하지만 명암대비와 디테일은 더 낫다는 게 솔직한 인상이다. 동축케이블은 좀 더 온기와 힘이 붙은 소릿결을 들려준다.
먼저 트론 AES/EBU 케이블로 들어보면 드럼 심볼이 ‘차그르르’ 하는 모습이 잘 전해진다. 음수가 많고 밀도감은 높으며 무게중심은 낮다. 무엇보다 한 공간에서 여러 악기들이 어우러져 연주하는 느낌이 잘 전해진다. USB 케이블로 바꿔보면 ‘차그르르’가 약하며 평면적이다. 소릿결 역시 각 악기들을 따로따로 녹음해서 나중에 합친 느낌이 강하다. 보컬이 좀 덤빈다. 동축케이블에서는 약간 밋밋하긴 하지만 편안한 사운드가 흘러나온다.
이 과정을 한 번 더 반복했다. 트론 AES/EBU 케이블로 다시 들어보면, 확실히 보컬이 덜 덤비고 악기들은 상대적으로 더 잘 들린다. 서로 눈높이를 맞춰 즐겁게 노래하고 연주하는 모습이다. USB 케이블에서는 음 끝이 약간 거칠고 전체적으로 산만해진다. 동축케이블로 들어보면 처음부터 힘이 붙은 사운드다. 세 케이블 중에서 청감상으로는 이 동축케이블을 투입했을 때 음량이 가장 큰 것 같다. 슬슬 세 케이블의 특성이 파악된다.
트론 AES/EBU 케이블은 확실히 부드럽고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소리를 들려준다. 공연장에서 듣는 듯한 현장감이 좋다. 다이내믹스와 다이내믹 레인지도 우악스럽지 않고 자연스럽다. 입자감이 고운 것도 시청 내내 확인할 수 있었던 트론 케이블의 특징. 경쾌한 풋워크와 팀파니 폭발음에 단단한 심지가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USB 케이블은 세 케이블 중에서 청감상 해상력이 가장 앞선다. 선명하고 명암대비가 높은 것이다. 그러나 쨍한 소리라는 부담감이 있고, 인위적인 사운드를 애써 만든다는 느낌도 있다. 결정적으로 음이 예쁘지가 않다. 이는 무엇보다 노이즈가 곡의 미세한 정보를 잡아먹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결국 전체적인 음악성과 디테일을 동시에 잘 살려낸 것은 AES/EBU 케이블 쪽이다. 동축케이블에서는 정보량이 더 많이 줄었다. 저역의 양감은 가장 많지만 해상력과 음악적 감흥, 오디오적 쾌감은 셋 중 가장 떨어진다.
이번에는 다른 브랜드의 AES/EBU 케이블을 투입해서 지금까지 듣던 곡을 역순으로 들어봤다. 필자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음과 사운드스테이지, 이미지, 다이내믹스, 디테일, 공간감에 대한 기억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다.
‘Shostakovich Symphony No.5’ = 다른 AES/EBU 케이블로 들어보면 각 대역에서 뭔가가 잘려나간 느낌이 강하다. 풍성한 맛이 사라진 것을 보면 음수와 정보량이 줄어든 게 확실하다. 음들이 좁은 직경의 관을 통과하다가 그 벽에 이리저리 부딪힌 끝에 깎여 나온다는 인상. 팀파니 역시 동글동글하게 때리다 만다. 쇼스타코비치 5번 4악장은 절대 이래서는 안된다.
‘Come Away With Me’ = 초반 ‘차그르르’ 소리가 심각하다 싶을 정도로 안 들린다. 밸런스 케이블이긴 하지만 임피던스 110 옴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한 결과로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피아노가 노라 존스 옆에서 살갑게 반주를 하고 있는 조화로움은 USB 케이블이나 동축케이블보다 훨씬 낫다. 전체적으로 트론 AES/EBU 케이블만큼 음이 안 예쁜 것을 빼면 이 곡에서만큼은 크게 흠잡을 데가 없다. AES/EBU 케이블의 재발견이라 할 만하다.
2곡을 다시 트론 AES/EBU 케이블로만 들었다. 노라 존스 곡에서는 음들이 훨씬 폭신폭신하게 느껴진다. 첫 음부터 우악스럽거나 거친 구석이 전혀 없다. 쇼스타코비치 5번 4악장에서는 음들이 그야말로 예리하고 선명하며, 산뜻한 데다 색채감까지 좋다. 대편성곡일수록 두 케이블에서 큰 차이가 나는 것 같다. 음들이 딱딱 아귀가 맞고, 곡의 흐름도 물결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현장에서, 공연장에서 듣던 실연의 음과 비슷하다.
먼저 트론 AES/EBU 케이블로 들어보면 소프라노의 여성성이 거의 역대급으로 잘 드러난다. 파이프 오르간 역시 처음부터 잘 들린다. 대성당에서 듣는 것처럼 편안하고 조용하며 성스럽다. 코러스가 가세하는 대목 역시 인위적으로 갖다 붙인 게 아니라 소프라노 옆에 있던 합창단원들이 때가 되니 함께 노래를 부른다는 느낌. 인공미, 스튜디오 테크닉, 이런 느낌이 없다. USB 케이블로 들어보면 소프라노 목소리가 곱긴 하지만 여성성보다는 중성미에 가깝다. 코러스 역시 따로 녹음했다가 극적 효과를 위해 기계적으로 붙인 느낌이 강하다.
동축케이블에서는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약간 의기소침해진 가운데 소프라노의 성별 자체가 파악이 안될 정도로 디테일과 정보량이 열화 됐다. 코러스 등장 대목은 부자연스럽다. 무엇보다 이 곡 최대의 매력인 깊숙한 공간감이 잘 안 느껴진다. 끝으로 다른 브랜드의 AES/EBU 케이블로 바꿔보면 소프라노는 여성과 중성 그 사이쯤이고 코러스 등장 대목은 매끄럽지가 않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차분하고 고운 소릿결에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결국 트론과 이 케이블의 차이는 완성도의 차이로 볼 수밖에 없다.
총평
한자리에서 AES/EBU, USB, 동축 케이블을 비청한 후 귀가하면서 필자는 내내 한 생각만 했다. ‘아, AES/EBU 밸런스 전송이 정답인가. 왜 나는 미리미리 AES/EBU 디지털 입출력 단자가 있는 소스기기를 장만하지 않았을까. 이런 확장성도 생각하지 않고 그 비싼 네트워크 플레이어와 DAC를 덜컥 덜컥 사버린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하지만, 고백컨대 필자에게 이 쓰라린 후회를 안긴 크리스 소모비고가 고맙다. 제대로 표준규약을 지킨 AES/EBU 케이블의 무한한 가능성을 제대로 알게 해줬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자연스럽고 곱고 부드러운 음의 격조였으며, 음악이 음악답게 들리는 재생음의 품격이었다. 일부에서는 AES/EBU 디지털 케이블 대신에 아날로그 XLR 케이블 꽂아 쓴다지만 최소한 필자는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다. 필자가 처음부터 새롭게 AES/EBU 밸런스 전송의 세계를 탐미한다면 그 동반자는 당연히 트론이 될 것이다.
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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