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포크송의 계보 1
1960년대
한국 최초의 포크송 논란
해방 이후 급속하게 유입된 서구의 대중음악 장르가 일반대중에게 각광받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부터이다. 당시, 록, 포크, 스탠더드 팝, 재즈 등 다양한 장르가 기존의 트로트와 공존하며 대중음악의 부흥기가 도래했다.
한국 최초의 포크송은 무엇일까. 어느 분야나 최초 논쟁이 존재하듯 한국 포크송의 기원에도 논쟁이 있다. 1964년 아리랑브라더스의 유일 앨범과 트윈폴리오의 1968년 데뷔앨범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1969년 펄시스터즈와 함께했던 트윈폴리오의 음반과 1968년 미국에서 귀국해 창작곡을 발표한 한대수를 한국 모던포크의 시작점으로 보는 것을 당연시했다. 음반이 아닌 언론 기사나 문헌 기록으로는 1963년 7월 11일자 동아일보에 등장한 동국대 영문과 출신의 유세향과 서울대 성악과 출신의 정영일로 구성된 남성듀오 '유세향 포크싱거'가 가장 앞선다. 음반을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이들의 존재는 이미 1960년대 초반에 대학가를 중심으로 모던포크송이 소비됐다는 것을 증명한다.
아리랑 브라더스 <우리애인 미쓰얌체> (1964년)
통기타 음반으로는 가장 앞선 아리랑브라더스의 독집에는 코믹 번안 포크송 <동물농장>의 오리지널 버전이 수록되어 있다. 한양대생 서수남, 중앙대생 하청일, 성악가 석우장, 천정팔 들은 1963년 그룹을 결성했다. 녹음기사 이청은 모든 직원이 퇴근한 통금시간에 멤버들을 마장동 스튜디오로 불러 도둑질하듯(!) 녹음한 후 1964년 앨범을 발표했다.
송아지 코멧쓰 <수양버들 나무 밑> (1966년)
트윈폴리오 이전에 아리랑브라더스와 더불어 김상국, 박상규, 장우로 구성된 통기타 트리오 ‘송아지 코멧쓰’가 1966년 2곡의 포크송을 발표했다. 이들은 천막을 치고 산골마을까지 찾아가 공연했던 떠돌이 공연단 ‘뻐꾸기 단체’에서 노래했다. 이들의 <수양버들 나무 밑>은 춤추듯 부드러운 멜로디를 가진 곡인 반면 <천수삼경>은 코믹송이다.
트윈폴리오 <흘러간 외국가요 추억의 히트송 12집> (1968년)
국내 최초의 남성 포크 듀오 트윈폴리오는 번안곡 위주의 활동에 머물며 음악적 한계를 보여줬지만 그들이 들려준 감미로운 화음은 포크송의 대중화에 절대적 공헌을 했다. 한동안 트윈폴리오의 데뷔 음반은 1969년 음반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1968년 12월 10일 성음사에서 발매된 <흘러간 외국가요 추억의 히트송 12집>이 발견되어 그들의 데뷔 기록은 한 해 앞당겨졌다.
뚜아에무아 <약속> (1970년)
박인희가 작사하고 이필원이 작곡한 창작곡 <약속>은 음반으로 발표된 최초의 창작 포크송으로 거론된다. 하지만 1969년 기사에 발표한 노래 곡명이 확인되는 한대수와는 달리 이들은 1970년에야 기사가 나오고 음반도 1970년에 발매되어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혼성 듀엣 전성시대를 열며 포크의 대중화에 기여했던 뚜아에무아의 이필원, 박인희는 한국 포크의 태동기에 창작곡을 발표한 중요 뮤지션임이 분명하다.
한대수 <멀고먼 길> (1974년)
최초 포크송 논쟁의 마지막 주자는 1968년 장발을 휘날리며 귀국해 1969년 남산 드라마 센터 공연에서 창작 포크송을 발표했던 한대수이다. 그의 첫 독집 음반은 군대에 다녀온 후인 1974년에야 발표됐다. 음반 발표 시기로는 가장 늦은 셈이다. 하지만 한대수는 가장 먼저 창작곡을 발표했다는 점에서 한국 모던 포크의 창시자로 평가받아 온다.
통기타의 전당 음악 감상실 쎄시봉
경제개발 계획으로 재건의 기틀이 마련되던 1960년대 중반 서울시내 곳곳에는 음악 감상실이 성업했다. 당시 음악 감상실은 입장권을 사서 입장하면 안내 아가씨가 자리를 정해 주고 신청곡 용지와 차 한 잔을 제공했다. 틀어주는 음악을 감상하거나 음악을 신청하다 보면 중간에 가수들이 무대에 나와 노래를 하기도 했다.
서울 무교동의 쎄시봉은 통기타 음악의 전당으로 알려졌지만 실은 시낭송회와 전위적인 누드공연까지 벌어졌던 복합 문화공간이었다. 쎄시봉에 드나들었던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한대수, 이장희, 김세환, 최영희 등은 이후 중요 뮤지션들로 성장했고 이제는 한국 포크의 전설로 회자된다.
조영남 <리싸이틀쇼> (1970년)
조영남은 1965년부터 쎄시봉에 드나든 초창기 멤버이다. 1970년 그는 첫 리사이틀 무대에 쎄시봉에서 만난 송창식 윤형주의 트윈폴리오와 함께 노래한 실황 앨범을 발표했다. 청년 조영남의 육성과 라이브 실황을 통기타 버전으로 들을 수 있는 희귀 앨범이다.
트윈폴리오 <하얀 손수건> (1969년)
한국 포크의 대중화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수훈갑은 1968년에 등장한 트윈폴리오이다. 이들은 쎄시봉 트리오 시절에 이니셜 C 로고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무대에 섰다. 당시 홍익대 도안과 2학년생 이상벽은 홍익대 교정에서 통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송창식의 노래 실력을 알아보고 쎄시봉에 진출시킨 공로자다.
최영희 <애창곡집> (1969년)
연세대 작곡과를 다녔던 최영희는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와 친하게 어울렸던 통기타 1세대 여성 포크 가수다. 탁월한 미모의 소유자였던 그녀는 드라마 출연은 물론이고 라디오방송 DJ로도 활약했던 팔방미인이었는데 당시 조영남이 짝사랑한 여인이기도 하다.
이장희 <그건 너> (1973년)
포크와 록을 넘나든 이장희는 가장 성공한 1세대 포크 싱어송라이터 중 한 명이다. 당시 연세대생 이장희는 쎄시봉에서 멋진 영시 낭송으로 여성들을 까무러치게 했다. 가사에 언문일치를 도입한 최초의 토크 송인 데뷔곡 <겨울이야기>와 당시 도시 젊은이들의 일상을 정감 어리고 솔직하게 표현했던 <그건 너>와 같은 그의 포크송들은 당대 젊은이들의 연가였다.
1970년대
서울 명동 포크송 노래운동
청년문화 시대인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성세대를 제치고 청년들이 대중문화의 흐름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급부상한다. 다시 말해 기성세대들을 대변하는 트로트의 아성이 청년들이 열광한 포크송의 기세에 흔들리게 된 것이다.
1970년대에는 대학생은 물론이고 각 직장과 청소년들까지 통기타 배우기 열풍이 뜨거웠다. 이에 학생들의 MT, 소풍, 캠프는 물론이고 여름휴가철에 전국의 산과 바다 등 “청년들이 있는 곳에 통기타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미자, 나훈아 등 기성 트로트가수들도 포크송을 취입했을 정도로 통기타 음악은 70년대 청춘을 상징하는 노래로 각광받았다.
1970년 서울 종로2가의 YMCA 강당에서는 제1회 포크 페스티발이 개최되어 관심을 끌었다. 당대의 젊은이들은 놀 공간이 부족했고 다양한 문화를 향유할 기회도 적었다. 외국 번안곡이 넘쳐났던 그 시절, 젊은 포크송 가수들은 서울 명동을 중심으로 “우리의 얼을 담자”며 우리 노래 창작운동을 시작했다. 서울 명동 서울 YWCA는 젊은이들에게 잠시 쉴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기 위해 급한 대로 직원식당을 개조해 매일 밤 개방했다. 안뜰 구석 큰 버드나무 그늘 아래에 있던 단층 건물은 ‘청개구리의 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서울 YWCA 청개구리 홀 공연
1970년 6월 29일 서울 명동 서울 YWCA 청개구리 홀 공연에 젊은 포크가수들이 모이면서 명동 포크송 노래운동의 서막이 올랐다. 청개구리홀은 의자도 없는 소박한 공간이었지만 모두들 아무 불평 없이 바닥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 차를 마시고 음악을 듣고 연극과 영화를 즐겼다.
이곳을 통해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김민기, 양희은, 서유석, 이용복, 김도향, 은희, 방의경, 김광희, 이주원 등 한국 포크의 1세대가 활동을 시작했다. 개관 이후 매일 같이 엄청난 학생들이 몰려들었는데, 이에 부담을 느낀 군사정권에 의해 공연은 1년 만에 문을 닫게 된다.
이용복 <지쳐버린 사랑> (1970년)
국내 최초의 시각장애인 가수 이용복은 등장만으로도 화제가 되었지만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 때문에 방송 출연이 쉽지 않았다. 활동 제약이 많았던 그는 통기타 하나로 노래할 수 있는 청개구리 공연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기타 실력이 대단했던 그는 그곳에서 김민기, 양희은 등과 친분을 맺게 되면서 양희은의 데뷔 앨범에 기타 세션으로 참여하게 된다.
듀엣 라나에로스포(개구리와 두꺼비) <사랑해> (1971년)
<사랑해>, <꽃반지 끼고>로 유명한 은희도 청개구리 초창기 멤버였다. 그녀의 노래는 학생층을 넘어 폭넓은 계층의 사랑을 받았다. 1970년 여고를 졸업한 은희는 청개구리홀에서 미니 리사이틀 무대를 가졌다. 이후 한민과 ‘개구리와 두꺼비’라는 뜻의 혼성 듀엣 ‘라나에로스포’를 결성해 청개구리 공연과 데뷔 음반 녹음작업을 병행했다.
양희은 <고운노래모음> (1971년)
청개구리 홀에서 만난 김민기와 양희은 콤비가 빚어낸 노래들은 그 시대의 상징이 되었다. 마장동 스튜디오에서 진행된 양희은의 데뷔 앨범 녹음을 위해 김민기, 김광희, 이용복 등 청개구리 홀 멤버들이 모였다. 김민기가 멜로디 파트를 맡고, 국내 최초의 시각장애인 가수 이용복이 12줄 스틸기타로 리듬 파트를 맡아 녹음을 마쳤다. 김광희는 자작곡을 제공했다. 1971년에 발표된 양희은의 데뷔 앨범은 70년대를 대표하는 포크 명반이다.
김민기 <친구> (1971년)
서울대 미대 재학 중 음악에 매력을 느낀 김민기는 명동 YWCA 청개구리의 창단멤버가 되었다. 그곳에서 여러 포크 가수들과 평론가 최경식, CBS 김진성 PD 등과 친분을 맺으며 그의 노래가 방송을 타게 되고, 음반 녹음도 할 수 있었다. 김민기의 노래는 사랑과 이별 타령으로 일관된 대중가요의 한계를 깨트렸다. 삶과 사회에 대한 진지한 고뇌를 담은 그의 아름다운 노랫말과 뛰어난 음악성은 외국 팝송 번안에 급급했던 한국 음악 시장에 창작 음반 시대를 본격화했다.
서유석 〈I WANT TO SEE MY MOTHER〉 (1972년)
1964년 체육 특기자로 성균관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서유석은 포크 가수 오세은의 형인 학교 선배 오세춘에게서 기타를 배웠다. 대학 3학년 때 명동 미도파 살롱의 아마추어 노래자랑대회에서 4주 연속 우승하며 노래 실력을 인정받았던 그는 대학 졸업 후 실업 핸드볼 선수를 그만두고 코미디언 구봉서의 주선으로 가수로 데뷔했다. 그는 1970년 서울 명동 YWCA 청개구리 홀 개관공연에 참여하며 포크 가수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양희은 <고운노래모음 제3집> (1973년)
양희은의 노래로 널리 알려진 <세노야>의 오리지널 가수는 청개구리에 참여했던 서울대 작곡과 학생 김광희이다. 엄한 가풍과 학교의 제한으로 이름을 드러내고 활동할 수 없었던 그녀는 자작곡을 동료 여성 포크 가수들에게 주거나 가명으로 불렀다. 김광희는 김민기 데뷔 앨범과 양희은 1, 2집에서 피아노 연주로 녹음에 참여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녹음된 LP는 음악 감상실 내쉬빌 포크 가수들이 참여한 앨범 한 장뿐이다.
방의경 <내노래 모음> (1972년)
청개구리 홀에서 리사이틀을 열었던 이화여대생 방의경의 이 유일한 독집은 한국 최초의 여성 포크 싱어송라이터의 창작 앨범이다. 당대의 어두운 사회 현실을 맑고 아름다운 은유적인 가사로 표현한 포크 명반으로 꼽힌다. 하지만 수록곡들이 ‘데모하는 학생들이 즐겨 부른다.’는 이유로 발매 즉시 방송과 판매가 금지되어 희귀 음반이 되었다.
이주원 <한사람> (1976년)
이주원은 청개구리에서 만난 양희은에게 자작곡 <내님의 사랑은>, <한사람>, <네 꿈을 펼쳐라>, <들길 따라서> 등의 곡을 주어 히트시킨 인물이다. 이 앨범은 1970~1980년대 포크 음악계에 큰 족적을 남긴 싱어송라이터 이주원의 유일한 독집으로서 양희은과 원 작곡자 이주원이 혼성 듀엣으로 부른 <한사람>에서 멋진 하모니를 들을 수 있다.
맷돌 공연
YWCA 청개구리 공연이 문을 닫고 나서 1972년 6월 14일 서울 명동 코리아나 백화점 3층 문화 살롱에서 맷돌 공연이 시작되었다. 9월 26일 서울 명동의 시공관(국립극장)에서 특별공연이 열렸다. 이 공연의 특징은 장현종, 임진수, 이탄 등 6명의 시인에게 가사를 의뢰하고 송창식, 백순진, 김광희 등이 노래를 작곡해 발표하는 실험적인 무대를 시도했다는 점이다.
맷돌 <밝은노래모음> (1972년)
한국 포크 음악의 최전성기에 당대의 포크 뮤지션들이 참여해 만든 실황 음반으로서 ‘맷돌 공연’의 실험성과 대중성을 여실히 증명하는 앨범이다. 이 앨범은 1970년대 청년문화를 주도했던 4월과5월, 송창식, 김민기, 서유석, 양희은, 신창균 등 포크 가수들의 공연을 녹음한 최초의 음반이자 김민기, 양희은의 <아침이슬> 최초 라이브버전이 수록된 한국 포크의 명반이다.
음악 감상실 내쉬빌
방의경 김광희 박두호 등 <아름다운 사람아 아름다운 노래를> (1972년)
1971년 말 이수일, 김무영, 김유복 등 3명의 음악 감상실 내쉬빌 운영자들은 김민기 1집에 자극받아 내쉬빌 멤버들의 창작곡을 모은 음반 제작을 기획했다. 이들은 앨범에 참여한 포크 가수들과 수원 시민회관에서 3일 간의 포크 공연을 자체 기획했다. 대학생 포크 가수들이 자체 제작한 프로젝트 포크 컴필레이션 음반은 500장 소량 제작되었지만 1970년대 ‘한국 3대 포크 명반’으로 평가받는다.
가톨릭 여학생회관 해바라기 공연
1973년 해바라기란 이름의 무료 노래 공연이 매주 토요일 가톨릭 여학생회관을 주 무대로 하여 열렸다. 청개구리 공연이 기성 포크 가수들도 같이 참여하면서 포크의 저변을 확대했다면 해바라기 공연은 노래로 의식화운동을 했던 청년 저항문화의 산실이었다. 오리지널 멤버는 ‘한국의 피터, 폴&메리’라 불렸던 강성학, 장상태, 배화순이었다. 외국 곡만을 불렀던 이들에 여학생회관 담당 꼴레드 모아 프랑스 수녀가 실망하자 김의철의 주도로 창작곡을 부르기 시작한다. 이에 젊은 관객들이 북적거리자 김의철은 상주 정보원들에게 목탁으로 머리를 얻어맞기도 하며 사퇴 협박을 받았다. 이에 김의철은 1975년 선배 이정선에게 공연의 진행을 넘겼다.
김의철 <노래모음> (1974년)
해바라기 노래운동의 리더였던 김의철의 포크 명곡 <저하늘에 구름따라> 오리지널 버전이 수록된 포크 명반이다. 원제목은 <불행아!>로 김광석이 리메이크해 널리 알려진 <저하늘에 구름따라>는 김의철이 고등학생 시절 만든 노래로, 70-80년대 포크 가수들에겐 일종의 바이블처럼 여겨지며 수도 없이 리메이크된 한국 포크의 명곡이다. 소름끼치는 허스키 창법으로 노래한 여대생 가수 박찬응의 <섬아이>는 한국 포크의 컬트로 평가받는다.
이정선 <노래모음 이리저리> (1973년)
이정선의 데뷔 앨범은 발매 당시 한국 대중가요계에서 보기 드문 블루스 포크를 시도하며 시대를 선도한 명반이다. <거리>가 방송 금지되면서 제작사는 자발적으로 배포된 음반을 수거했고 이후 음반은 사장되면서 저주받은 걸작이 되었다. 이 음반은 2005년 한 인터넷 음반 경매에서 사상 최고가인 176만 원에 낙찰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해바라기 <노래모음 제1집> (1977년)
김의철의 뒤를 이어 해바라기 공연을 이끈 이정선은 한영애, 이광조, 김영미, 이주호 등과 그룹을 결성해 자연을 소재로 한 포크송으로 혼탁했던 70년대의 사회 분위기를 정화시켰다. 이 앨범에는 1970년대 후반 청년들이 즐겨 듣고 함께 화음을 넣어 불렀던 주옥같은 포크 명곡들이 대거 수록되어 있다. 또한 이 음반은 참여했던 멤버 대부분에게 80년대 한국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뮤지션으로 성장시킨 출발점이 되었다.
가톨릭 ‘참새를 태운 잠수함’ 공연
1975년 2월 “순수하고 진실한 민족의 얼이 담긴 창작노래로 혼탁한 사회를 정화시키고 경종을 울리겠다”는 선언을 하며 ‘참새를 태운 잠수함’ 노래모임이 출범했다. 이 이름은 “잠수함은 한국사회를 상징하며 그 사회에 순수와 진실이라는 산소가 희박해지면 노래로써 정화하고 경종을 울린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국일보 소극장에서 개최했던 첫 공연이 성공을 거두면서 참새를 태운 잠수함은 동숭동 성베다 교회 교육관에서 매주 토요일 정기공연을 열었다. 첫 정기공연은 썰렁했다. 준비도 부족했지만 관객도 들지 않아 청소부 아저씨가 유일한 관객이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촛불을 켜고 진행되었던 공연은 1년 후 동숭동에서 명동으로 옮기게 된다.
서울 명동 카톨릭 여학생회관으로 무대를 옮기면서 멤버들은 방송국과 신문사를 돌며 등사한 정기 공연 자료를 돌려 홍보했다. 언론에 소개되면서 회원이 급격히 늘어 ‘4함대’로 나뉘어 활동했다. 1함대는 음악 관계자들로 구성한 자문위원단, 2함대는 직장인, 3함대는 대학생, 4함대는 중고등학생들이었다. 참새를 태운 잠수함은 매주 일요일 오후 7시에 열렸다.
참새를 태운 잠수함 1, 2, 3··· (1979년)
참새를 태운 참수함 노래모임은 DJ 출신인 구자룡과 구자형 형제가 주도했고 강인원, 남궁옥분, 곽성삼, 유한그루, 이종만 등이 참여했다. 첫 앨범이 발표될 즈음, 내공을 쌓은 멤버들이 프로가수로 독립하기 시작했다. 남궁옥분은 라이브클럽으로 빠져나갔고, 강인원도 그룹 따로또같이를 결성해 탈퇴했고, 한돌도 독집을 발표하며 솔로가수로 독립했다. 1979년 이 앨범 발표와 함께 노래모임이 해체되면서 명동 포크송 무브먼트도 종료되었다. 70년대 서울 명동 일대에서 진행된 노래운동은 이후 80-90년대의 소리패들과 ‘햇빛촌’, ‘종이연’, ‘푸른섬’ 등 노래동아리들의 탄생에 자양분을 제공했다.
어니언스 <사랑의 진실> (1973년)
남성 듀오 어니언스의 첫 독집이 나오기 전까지 포크 음악은 소수 엘리트 청년층이 소비하는 저항의 노래로 인식됐으나, 어니언스의 등장 이후 보편적인 대중가요 장르로 자리 잡았다. 어니언스의 성공은 남성 포크 듀오의 전성시대를 불러왔다.
현경과 영애 <아름다운 사람> (1974년)
1971년 서울대 미대의 전설적인 여대생 포크 듀엣 현경과 영애의 유일 독집이다. 서울 약수동에서 동네 강아지와 함께 촬영한 사진으로 앨범 커버를 장식한 이 음반은, 그들의 데뷔작이자 은퇴기념 음반이었다. 수록곡은 1970년대 포크의 원형질을 담은 순수 결정체였다.
김정호 <이름 모를 소녀> (1974년)
호소력 짙은 노래로 가득한 김정호의 데뷔 앨범은 과거 학생층에 국한되었던 포크송의 향유 계층을 전 국민으로 넓혔다. 히트곡 <이름 모를 소녀>는 김정호가 총각 시절 아내 이영희를 애타게 짝사랑하던 감정을 스케치한 명곡이다.
양병집 <넋두리> (1974년)
대부분 사회 풍자적인 노랫말과 어두운 곡이 포진한 양병집의 첫 독집은 발매 1년 만에 ‘방송 부적격’ 판정을 받고 판매 금지되었다. 시작부터 활동에 제약을 받은 양병집은 금지 조치 이후 김민기, 한대수와 더불어 1970년대의 대표적인 3대 저항 포크 가수로 회자됐다.
윤연선 <매혹의 노래모음> (1975년)
국민가요 <얼굴>을 수록한 포크 가수 윤연선의 2집에는 1970년대의 낭만과 순수함을 담은 포크송이 가득하다. 특히 금지곡 <고아>를 수록한 초반은 남아 있는 음반 수가 매우 적고 금지 흔적이 역력해 한국 포크의 명반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정태춘 「정태춘의 새노래들」 <시인의 마을> (1978년)
정태춘의 첫 정규앨범은 한국적인 포크 스타일이 대중적으로 잘 표현된 명반이다. 이 앨범에는 정태춘 특유의 시적인 가사, 읊조리는 창법, 토속적이고 한국적인 정서, 방황과 유랑의 메타포 등 정태춘 음악의 중요한 원형을 담고 있다. 정태춘은 이 앨범으로 1979년 MBC 10대가수가요제 신인 가수상과 TBC 방송 가요대상 작사 부문상을 수상했다.
조동진 1집 <행복한 사람> (1979년)
조동진 1집은 오랜 음악적 내공을 응집한 순도 높은 결정체이다. 30만 장이 넘게 팔려나간 이 앨범은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 가수’라는 거센 흐름을 대중음악계의 전면에 이슈화하면서 1970년대와 1980년대 음악의 분기점이 되었다.
제공처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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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공처 한국대중가요연구소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 포크송의 계보 1 (가요앨범사, 최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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