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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음악가 이야기

여류 피아니스트 소개 - 리디아 그리치토로브나

by onekey 2024. 3. 8.
음반이야기 
말머리[음반소개]

여류 피아니스트 소개 - 리디아 그리치토로브나

롱암
2019.04.01. 18:50조회 411

폴란드를 대표하는 MUZA 레이블입니다. 거기에 폴란드는 쇼팽의 고향입니다. 그런데 연주자는 모르는 이름입니다. 판 상태는 좋습니다. 이걸 잡아야 할지 놔야 할지를 순간 판단해야 합니다. 재킷의 느낌은 좋습니다만 그렇게 골랐다가 망한 적도 많아서 망설여집니다. 

잠깐 머뭇거리는 순간 이런 생각이 스치더군요. 미국서 수입한 중고 판 박스 속에 폴란드 무짜 레이블의 판이 있다는 것은 폴란드에서 찍어서 먼 미국으로 이 판을 수출했다는 얘기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한번 사보자는 생각이 들더군요.

밤 늦게 귀가했지만 낮 동안 음악과 술에 취한 여운이 남아서 이것 저것 듣다가 이 엘피를 얹었습니다. 첫 음의 톤이 아주 묘합니다.

여류 피아니스트 중에 잉글리드 헤블러는 밝고 명쾌한 연주를 합니다. 듣고 있으면 기분이 맑아지는 느낌이 듭니다. 제가 좋아하는 클라라 하스킬은 멜랑꼬리하면서도 그 슬픔이 질척거릴 정도로 어두워지진 않지만 서정적이면서 애수가 깃든 연주를 들려줍니다. 하스킬 스스로 건강이 좋지 못해서 평생을 병마와 싸워야 했고, 나치를 피해 은둔해야했던 정치적 상황도 겪어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들이 그녀의 연주에 영향을 주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엘리 나이는 정교하면서 정확하고 탄탄한 해석을 보여줍니다. '클래식 피아노란 이런 것이다'라고 보여주는 연주를 합니다. 두말하면 잔소리라는 생각이 드는 연주를 보여줍니다.

lidia grychtolowna는 정확하게 타건을 하지만, 묘한 여운이 느껴지는 터치를 합니다. 헤블러 처럼 밝고 명확하지 않고, 그렇다고 하스킬처럼 어둡거나 섬세하면서 서정적인 느낌이 들지도 않습니다. 들을수록 이건 어떻게 봐야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톤입니다. 그렇다고 엘리 나이처럼 견고하고 탄탄해서 흔들릴것 같지 않은 그런 터치나 해석도 아닙니다. 

강하게 힘차게 타건하는 스타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늘어지거나 유약하지 않습니다. 여유는 있는데 억지로 힘을 주진 않습니다. 참 다른 사람이 쓴 표현을 가져다 쓰는 것을 피하고자 하는데, 할머니의 자장가 같은 느낌이는 표현외에 다른 것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보통 부모가 자식한테 하는 얘기는 자식에 대한 걱정과 노파심이 깃들어 있어서 아무래도 힘을 줘 얘기하게 됩니다.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얘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유년기와 청년기를 지나 인생의 희노애락을 다 경험했습니다. 손자나 손녀를 보는 마음은 부모와 그것과 결은 같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나 태도에서는 사뭇 다릅니다. 힘주어 얘기하기 보다는 아이가 자연스럽게 느껴지도록 부드럽고 편안하게 얘기를 할 것입니다. 

얘야! 살다보면 그런 것이란다. 내가 전에 이런 슬픈 일이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서 보니 그게 나쁜 일이 아니라 더 잘되는 밑거름이 되었단다. 한 때의 격했던 감정도 세월의 흐름 속에서 편하게 바라볼 만큼 여유가 생기게 됩니다. 긴 호흡으로 인생을 보는 노년의 지혜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얘기를 손자들에게 해줄 것입니다.

리디아 그리치토로브나의 연주를 듣다보면 할머니가 해주는 옜날 얘기 같습니다. 음악이 이런거란다. 여기선 이런거고 저기선 저런거야. 복잡하고 어려운게 아니란다. 요렇게 따라오면서 들으면 되는 거란다. 마치 잘 구운 조기의 살을 발라 손주에게 먹이듯 음악을 들려줍니다. 행여 가시라도 들어가 걸리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손질을 하듯 말입니다.

너무 밝지도 그렇다고 어둡지도 않은 톤으로 작곡가가 만든 음악을 생선을 발라서 손주에게 주는 마음으로 편안하게 나에게 들려주는 것 같습니다. 귀가 쫑긋해지거나 이건 뭐지 라는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습니다. '이게 답이야!'라고 하지도 '이렇게 해야 해!'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이 할매의 연주를 듣고 있으면 편안하게 음악이 가슴에 와서 적셔집니다. 할머니 자장가에 스스륵 잠이 드는 것처럼요. 

바이올린도 아닌 피아노가 이럴수도 있다는게 신기합니다. 피아노 좀 들어 보셨다는 분이라면 한번 꼭 들어보라고 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