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개한 브리티시 아날로그의 꽃
베르테르 어쿠스틱스 DG-1S
좋은 턴테이블의 조건
엘피로 음악을 듣는 일은 일면 단순한 일이다. 엘피를 꺼내 널따란 턴테이블 플래너 위에 얹고 스타트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 카트리지가 장착된 톤암을 엘피 위에 사뿐히 내려 앉히면 끝이다. 이제 앰프의 볼륨을 적당히 마음에 드는 위치까지 올리고 음악을 즐기면 된다. 요컨대 엘피를 듣는 데 필요한 건 턴테이블과 카트리지 그리고 포노앰프며 이 외에 앰프나 스피커 등은 꼭 엘피를 듣지 않는다고 해도 어차피 음악을 듣는 데 필요한 것들이다. 요즘엔 포노앰프가 턴테이블에 내장되어 출시되거나 카트리지가 기본 장착되어 나오는 모델도 있어 엘피를 즐기는 일은 과거보다 더욱 편리해진 면도 없지 않다.
이렇게 단순해 보이는 턴테이블도 역사적으로 보면 매우 다양한 메이커가 무척 다양한 설계로 만들었다. 일단 플래터를 회전시키는 구동 메커니즘만 해도 아이들러 방식과 벨트 드라이브 방식 그리고 다이렉트 드라이브 방식 등 천차만별이다. 톤암으로 넘어가면 9인치 등이 일반적이지만 트래킹 에러 각을 줄이기 위해 12인치 롱암이 여전히 생산된다. 톤암의 주행 방식에 따라 짐벌, 유니피봇 등 다양한 설계가 도입되었다. 카트리지도 MM, MC, MI 등 다양하며 내부의 마그넷, 코일 등 모두 제각각이다. 아마도 이처럼 표준화가 안 되어 있는 분야도 없을 듯하다.
하지만 결국 턴테이블이 갖춰야할 조건은 매우 명확하다. 최대한 정밀하며 지속적으로 균질한 플래터 회전 속도를 유지할 수 있어야하며 모터 회전시 소음이 적어야하며 진동이 플린스, 플래터, 톤암 등으로 전이되지 않아야 한다. 모터의 성능은 물론 플린스와 플래터의 소재, 구조가 뛰어나야하고 서로 황금비율처럼 조화롭게 배치되어야 한다. 또한 플래터와 톤암 등 계속해서 움직이는 부품들의 경우 마찰이 아예 없다면 가장 좋고 마찰이 있을 경우 마찰 저항을 최소화해야한다. 정밀한 베어링이 필요한 이유며 이는 플래터와 톤암에 해당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단 하나의 진리와 같은 턴테이블은 단 한가지로 통일될 수 있을 것 같지만 생각처럼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이러한 좋은 턴테이블의 조건을 모두 알고 있으나 엔지니어들은 이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 서로 다른 턴테이블을 만들어냈다. 토렌스, 가라드, 엘락, 린, 미셸, 핑크 트라이앵글, 듀얼, 레가, 록산, 마이크로세이키, 야마하 등으로부터 시작해 클리어오디오, 트랜스로터, VPI, 브링크만, 닥터 페이케르트 등 하이엔드 턴테이블 그리고 엔트리급에선 데논, 마란츠, 오디오테크니카 등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이다.
혜성처럼 나타난 베르테르
그 중 록산의 경우 당시 린 등 전통적인 영국의 전설들이 버티고 있던 영국 턴테이블 시장에 떠오른 경쟁자였다. 록선 적시스는 린에 필적하는 모델이었고 그 단아한 디자인과 독보적인 설계에서 뿜어 나오는 사운드는 기세등등했다. 턴테이블은 이후 TMS같은 하이엔드 턴테이블까지 발전하면서 한 시대를 호령했다. 아날로그에 진심이었던 록산은 카트리지도 만들었다. 아직도 나는 처음 들었던 록산 코러스 MM 카트리지 사운드의 충격이 생생하다. 바로 그 록산을 만들었던 전설이 돌아왔다. 다름 아닌 록산의 설립자 투라지 모가담이 베르테르 어쿠스틱스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어김없이 그는 턴테이블을 개발해 내놓고 있다.
DG-1S
그럼 평생을 아날로그 기기 설계에 바친 투라지 모가담의 턴테이블은 어떤 모습일까? 그 중 베르테르 어쿠스틱스의 대표적인 모델 DG-1S를 통해 그 심연을 들여다보자. 일단 벨트 드라이브 방식으로서 24폴 동기식 모터를 채용해 플래터를 회전시키는 방식이다. 일단 모터의 경우 축 방향으로부터 분리되어 있고 풀리는 초정밀 알루미늄 합금을 사용해 정밀한 속도 및 진동을 최소화하고 있는 모습이다. 구동 벨트는 특별히 제작한 실리콘 고무 소재를 활용하고 있다. 실제 사용해보면 모터가 약간 떨면서 회전하다가 정속에 이르면 아주 조용히 회전하면서 플래터를 돌린다.
플래터의 경우 정밀 가공한 알루미늄 합금을 사용했고 열가소성 폴리머 매트와 코르크를 부착해놓는 등 이중 삼중으로 진동 최소화를 꾀하고 있는 모습이다. 더불어 플래터 중심에서 플래터의 안정적인 회전을 돕는 스핀들과 스핀들 베어링 또한 매우 공을 들였다. 스테인리스 스틸 스핀들에 텅스텐 카바이드 볼을 사용하고 있는데 정밀하면서도 마모나 손상이 거의 없게 했다. 그리고 이 정밀 베어링은 황동으로 만든 하우징에 안전하게 수납되어 있는 모습이다. 스핀들 오일 충전도 거의 필요 없어 유지, 관리도 편리한 편이다.
흥미로운 것은 구동계의 모터와 플래터가 플린스에 장착되는 방식이다. 아무래도 턴테이블에서 불필요한 진동을 가장 많이 만들어내는 핵심 소자는 모터다. 이 진동을 없애기 위해 많은 엔지니어들은 다양한 시도를 하는데 일단 베르테르는 독자적인 모터를 개발했고 플래터가 장착되어 있는 플린스와 이격시켜놓았다. 안팎으로 두 개로 나눠진 플린스는 수지 댐핑 소재로만 연결시켜 진동 전이를 막는 구조다. 모터를 플린스 외부로 독립시키는 등 복잡한 구성을 하지 않고도 모터의 진동을 격리시킨 것이다.
톤암은 외부에서 볼 때 가장 독특한 점이다. 일단 둥근 튜브 형태를 피했고 폴리머 소재를 5층, 이 중으로 만들어 겹쳐놓은 모습. 보기와 달리 직접 만져보면 꽤 단단한데 수많은 실험 결과 이런 방식이 튜브형 톤암에 비해 공명 면에서 더 우수하다고 한다. 케이블은 마치 노도스트처럼 얇은 플랫 케이블을 교묘하게 연결해놓아 톤암 주행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 구조다. 한편 이 톤암은 후방 무게추로 침압을 주며 톤암 중간에 또 다른 조정 장치가 있어 매우 정밀한 컨트롤이 가능하다.
이 외에도 이 간단해 보이지만 독특한 설계의 톤암은 VTA 및 아지무스, 안티스케이팅 등 다양한 조정 포인트가 모두 마련되어 있다. 어떤 카트리지를 사용하더라도 세밀하게 세팅 가능하다는 의미다. 특히 톤암의 운행 방식에 쓰이는 베어링 시스템은 매우 특별하다. 일반적으로 금속 소재의 볼 베어링을 사용한 것과 달리 그루브 러너 S 톤암의 경우 고강도 케블라 및 나일론 실을 사용해 수평 운동에선 나일론을, 수직 운동에선 케블라 실을 사용하고 있다. 이런 초유의 톤암 운동 메커니즘은 일단 마찰에서 자유롭고 저항이 거의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노이즈 없이 자연스러운 톤암 주행이 가능하다는 커다란 이점이 있다. 이 외에 모터에 전원을 공급하는 전원부도 별도로 제공하고 있다. 이름하여 첼린저라는 DC 전원 장치로서 보편적으로 제공하는 번들 어댑터보다 훨씬 더 안정적으로 모터에 양질의 전원을 공급해준다. 모터 전원부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왜 베르테르가 이런 전원부까지 별도로 제공하는지 알 것이다.
청음
테스트는 평소 레퍼런스로 활용하는 시스템에 스피커를 피에가 COAX 611를 추가해 진행했다. 포노앰프는 올닉 H-5500 그리고 프리앰프는 패스랩스 XP-12, 파워앰프는 일렉트로콤파니에 AW-250R을 활용했다. 카트리지의 경우 베르테르 어쿠스틱스에서 출시한 플래그십 MM 카트리지 Sabre를 사용했음을 밝힌다. 기존에도 사용해본 적이 있는 Sabre 카트리지는 육중한 무게에 뛰어난 대역 밸런스와 MM이라곤 믿기 힘든 중, 고역 해상도를 갖춘 카트리지다.
우선 보컬, 피아노 같은 악기들에서 베르테르 어쿠스틱스가 추구하는 사운드 스펙트럼이 간략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오디오파일에게 익숙한 야신타의 ‘Here’s to life’를 들어보면 전체적인 대역 밸런스가 매우 중립적이며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다. 스피커로 이야기하면 B&W 같은 느낌이 있는데 왜 스튜디오 엔지니어들까지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사운드다. 특히 보컬의 음정이 정확하며 약음들의 다이내믹스도 섬세하게 살려낸다. 매우 조용한 배경은 SN를 증명해내며 정말 엘피인지 헷갈릴 정도로 높은 해상도가 놀랍다.
턴테이블은 일단 정확한 속도를 유지하면서 오랜 시간 균질한 회전을 담보해야하는 것이 우선이다. 속도가 계속해서 틀어지거나 또는 불균질하게 지속되면 음악 감상은 굉장히 불편해진다. 피치의 불안정은 경우 보컬, 악기 재생 모두에서 음정 불일치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파우스토 메소렐라의 ‘Sonatina Improvvisata D’inizio Estate’를 들어보면 기타 소리의 피치가 정확하게 재생된다. 피치 정확도가 떨어질 경우 미세하게 기타가 늘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DG-1S 턴테이블은 마치 트윈 모터라도 단 듯 정확한 속도로 균질한 트래킹을 보인다.
누군가는 오디오가 생긴 대로 소리를 낸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소재가 많은 영향을 주는 스피커 같은 경우 외부 인클로저의 소재가 음색에 영향을 꽤 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전기로 작동하는 기기들의 경우 내부 설계를 뜯어보기 전엔 알 수 없다. DG-1S 같은 경우 요즘 미국, 독일의 거대하고 육중한 디자인과 달리 슬림하고 날렵하게 생겼다. 하지만 마이클 잭슨의 ‘Black or white’를 들어보면 정확한 리듬을 밟아나가면서 흔들림 없는 중, 저역 무게감을 보여준다. 확실히 음원 재생에서 들어보기 힘든 에너지를 발산하면서 턴테이블 외모에선 상상할 수 없는 다이내믹스를 뿜어낸다.
이번 리뷰는 턴테이블 자체의 설계와 그에 따른 음질적 특성에 대해 집중했지만 카트리지를 언급하지 않고 넘어갈 순 없다. 당연히 최종 음질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 때문인데 Sabre 카트리지의 경우 평탄한 대역 밸런스와 왜곡 없는 토널 밸런스 덕분에 각 악기의 음색이 확연히 구분되어 재생되었다. 예를 들어 하이페츠와 런던 뉴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비외탕의 ‘바이올린 협주곡 5번’에서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의 거리감은 물론 오케스트라의 각 악기 분리도가 녹음 연도를 무색케 했다.
총평
베르테르 어쿠스틱스를 주재하는 투라지 모가담은 오랫동안 아날로그 장비를 설계해오면서 필생을 바친 천재 엔지니어다. 어렸을 때부터 공학도로서 공부해오면서 록산에서 여러 실험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그가 도달한 곳은 어떤 제약도 없이 오리지널 래커 마스터를 가정에서 유사한 음질로 재생해주는 아날로그 기기의 세계 ‘베르테르 어쿠스틱스’였다. 정밀하고 지속적인 회전을 이루었고 모터 회전의 진동을 최소화했으며 스핀들 및 톤암 베어링으로 인한 마찰과 노이즈 저감에 있어 그 누구보다 성공적인 결과를 얻어냈다. 서두에 말한 뛰어난 턴테이블의 조건을 거의 모두 충족시키고 있는 모습을 DG-1S에서 확인했다. 록산부터 이어온 브리티시 아날로그의 도전은 베르테르에서 활짝 만개한 모습이다.
글 : 오디오 평론가 코난
제조사 : 베르테르 어쿠스틱스
공식 수입원 : 반오디오 (http://bannaudio.com)
공식 소비자 가격
– MM 카트리지와 악세서리 제외: ₩6,400,000
– Sabre MM 카트리지 + Redline 케이블 및 악세서리 포함 : ₩9,550,000
– 악세서리: Techno Mat와 ISO Paw가 추가됩니다.
Written by 코난
코난 이장호는 하이파이 오디오를 평가하는 평론가다. <고음질 명반 가이드북 1,2> 등의 책을 썼다.
'Audio'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베르테르 어쿠스틱스 브랜드 스토리 Part.1 (1) | 2024.03.14 |
---|---|
아날로그의 살아 있는 전설 - 베르테르 MG-1 MKII (1) | 2024.03.14 |
레가 Planar 3, 50주년을 기념하다 (0) | 2024.03.14 |
턴테이블 입문을 위한 마스터피스 - 레가 Planar 2 (5) | 2024.03.13 |
입문기에서 만나는 드물고 값진 경험 - 레가 Planar1 Plus (1) | 2024.03.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