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드 없는 낯선 파워케이블이 선사한 신세계
Sunshine SAC Reference 1.8 Powercable
세상에 무슨 일이 있어도 케이블에는 반드시 쉴드(shield) 처리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 아시는 대로 케이블 쉴드란 외부의 EMI(전자기장 간섭)나 RFI(라디오 주파수 간섭)로부터 내부 선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카본, 알루미늄, 뮤메탈, 마그네슘 등으로 촘촘히 쉴드를 친 케이블만 접했고 리뷰를 해왔다. 몇몇 브랜드에서는 쉴드망에 DC 전기를 흘려주는 액티브 쉴딩까지 베풀었다.
그러다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았다. 대놓고 ‘No Shield’(노 쉴드)를 앞세운 파워케이블을 만난 것이다. 게다가 단자(AC 플러그, IEC 커넥터)까지 피복과 일체형인 소위 ‘마트표’ 몰드 타입이다. 아무리 착한 가격대를 내건 파워케이블이라지만 단자 처리까지 이토록 ‘저렴’하게 이뤄진 제품을 리뷰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주인공은 일본 선샤인(Sunshine)의 SAC Reference 1.8 파워케이블. 선샤인? 맞다. 마그네슘 쉴딩 케이블과 오디오보드, 인슐레이터로 유명한 제작사다. 쉴딩에 관한 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제작사가 ‘노 쉴드’에 몰드 단자를 단 파워케이블을 내놓은 배경이 무엇일까. 무엇보다 이 파워케이블을 꽂으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궁금증에 몸이 쑤셨다.
SAC Reference 1.8 기본 팩트 체크
지난해 4월 일본에서 출시된 이 파워케이블은 최근 하이파이클럽 제 3 시청실에서 처음 봤다. 리뷰용 제품이라 일본 3구 플러그가 달렸고(시청에는 어댑터 사용), PVC 피복에는 ‘Sunshine’ ‘HSE’ ‘PSE’, ‘JET’ 등이 씌어있다. PSE(일본 전기용품안전법. Product Safety Electrical Appliance & Material), JET(일본 전기안전환경기술시험소. Japan Electrical Safety & Environment Technology Laboratories), 모두 일본에서 안전 인증을 받았다는 표시다.
HSE? 혹시나 해서 찾아보니 지난 2018년에 리뷰를 했던 일본 티글론(Tiglon) 파워케이블(MS-DF12A)에 투입된 기술 이름이 맞다. 한마디로 과포화 전류(Hyper Saturated Current)를 선재에 흘려보내 사전 에이징을 시키는 기술이라고 보면 된다. 확인차 포장 케이스를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티글론 주식회사’가 제작 감수를 한 것으로 나와있다.
슬슬 이 선샤인 파워케이블의 실체가 잡히기 시작했다. SAC 레퍼런스 1.8은 3심 도체(hot, cold, ground conductor)로 딥 포밍(Dip Forming) 공법으로 뽑아낸 무산소 동선(OFC)을 쓰고, AC 플러그와 IEC 커넥터를 케이블과 붙박이로 몰딩시킨 파워케이블이다. 길이도 1.8m, 딱 한 종류만 있다. 케이블 제작 자체는 일본 극동전선(Far Eastern Cable Industry)이 맡았다. PVC 피복에 극동전선을 뜻하는 ‘Kyokuto Densen Kogyo’라고 씐 이유다.
케이블에 투입된 기술은 티글론과 협업한 것으로 보인다. HSE와 딥 포밍 모두 티글론의 대표 기술이기 때문이다. 선샤인에 따르면 SAC 레퍼런스 1.8에 쉴드 처리를 하지 않고 일체형 플러그를 단 것도 1) 선재 자체가 딥 포밍에 HSE 처리를 해 품질이 일반 OFC보다 좋은 데다, 2) 논 쉴딩 케이블과 몰드 플러그에는 나름의 장점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 SAC Referenced 1.8은 티글론 하이엔드 파워케이블의 비용 절감 버전으로 보는 게 옳다.
SAC Reference 1.8 시그니처 1. Dip Forming OFC
SAC 레퍼런스 1.8 파워케이블의 3대 시그니처는 딥 포밍 OFC, HSE 에이징, 노 쉴드로 요약된다. 오디오 전용 케이블 기준으로 보자면 몰드 플러그도 나름의 시그니처일 수 있다. 우선 딥 포밍(Dip Forming)은 무산소 동선(OFC) 제작 및 가공 공법. 원래 미국 GE가 1963년에 개발해 특허까지 받은 기술로, 일본에는 지난 1969년에 GE의 딥 포밍 설비가 도입됐다. 티글론에서는 현재 일본에서 유일하게 남은 이 딥 포밍 설비를 이용, 4N(99.99%) 등급에 유전율이 100~102%에 달하는 고품질 OCC를 뽑아내고 있다.
딥 포밍은 ‘담그다’라는 뜻의 ‘dip’에서 알 수 있듯이, 1) 표면을 깎아낸 구리 심선을, 2) 뜨겁게 녹인 구리 용액 사이로 고속으로 통과시켜, 3) 표면에 무산소(Oxygen Free. 5ppm 미만) 상태의 구리를 부착시키는 공법이다. 이에 비해 현대 무산소 동선은 산소를 없애기 위해 다량의 실리콘(Si) 등을 투입, 산소를 흡착시키는 방식을 쓰고 있다. 티글론에서는 이러한 실리콘 같은 성분이 전류 전송이나 음질 면에서 해롭다고 보고 있다. 딥 포밍으로 뽑아낸 구리선은 표면이 매끄럽다는 장점까지 있다고 한다.
SAC Reference 1.8 시그니처 2. HSE
딥 포밍과 함께 살펴볼 것은 티글론이 다수의 회사들과 함께 공동 개발한 HSE(Hyper Saturated Energizer)라는 선재 처리 기술이다. HSE라는 장비를 이용, ‘과포화’ 전류를 선재에 흘려줌으로써 거의 단결정(single crystal) 상태의 OFC를 만들어낸다는 것이 핵심. 한마디로 완성된 선재에 전류를 세게 흘려 단시간에 케이블을 에이징(aging) 시키는 효과를 얻는 기술이라고 보면 된다.
따라서 HSE는 1) 선재의 내부 분자 구조를 흐트러뜨려, 2) 경계선(grain boundary) 사이의 산소를 제거하고, 3) 다결정 동선을 거의 단결정 수준으로 변화시키는 장비 및 기술 이름인 것이다. 또한 과포화 전류가 흐르면 선재에서 열이 나는데 이는 선재를 둘러싼 절연체를 유연하게 해주는 부수효과도 있다고 한다.
SAC Reference 1.8 시그니처 3. Non Shielding
SAC 레퍼런스 1.8은 또한 쉴딩 처리를 전혀 안한 파워케이블이기도 하다. 이는 몰드 플러그와 함께 원가 절감을 위한 것. 선재 자체가 딥 포밍 OFC인데다 HSE 처리까지 이뤄진 만큼 값비싼 쉴딩 작업을 생략함으로써 이 가격대의 파워케이블을 내놓을 수 있었다는 것이 선샤인의 설명이다. 일체형 플러그 역시 볼트로 체결되는 값비싼 AC 플러그와 IEC 단자에 비해 착색(coloring)이 작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AB 테스트 1. 하이파이클럽에서
SAC 레퍼런스 1.8 파워케이블을 레가의 Osiris 인티앰프에 연결해 AB 테스트를 실시했다. 비교 상대는 이보다 2.5배가량 비싼 제품. 물론 쉴딩 처리를 한 파워케이블이다. 두 파워케이블을 플릭서의 전원 컨디셔너인 Elite BAC 3000e에 번갈아 꽂아가며 음질 변화를 추적했다. 소스기기는 웨이버사의 W DAC3C, 스피커는 B&W 706 S2, 스피커케이블은 오디오퀘스트의 Rocket 22(바이와이어링).
결론부터 말하면 '매직' 혹은 '다윗의 역전승'은 일어나지 않았다. 확실히 2.5배 비싼 파워케이블이 여러 면에서 앞섰고 익숙한 음을 들려줬다. 하지만 선샤인 파워케이블에는 결코 묻어둘 수 없는 장점이 생생했다. 그것은 바로 에너지감과 자연스러움, 음의 생생함이었다. 비유컨대, 타사 파워케이블이 폴리프로필렌 우퍼에서 나온 음이라면, SAC 레퍼런스 1.8은 대구경 페이퍼 콘 우퍼에서 나온 싱싱하고 기름기가 없는 음이었다.
Anne-Sophie Von Otter - Baby Plays Around
For The Stars
먼저 선샤인 파워케이블로 들어보면, '지금 쉴드가 안된 파워케이블이 맞나?' 싶을 만큼 체감상 SNR이 높았다. 오터의 목소리가 탱글탱글하고 피아노 반주음이 자연스러운 것도 특징. 물론 지금은 예전에 리뷰를 하며 감탄했던 플릭서 전원 장치의 영향도 클 것이지만, 트럼펫이 내뱉는 음에서 오톨도톨한 질감이 느껴지는 등 낯설면서도 흥미로운 음들이 난무했다. 이어 타사 파워케이블로 바꿔보니, 차이가 제법 많이 난다. 일단 오터의 목소리가 많이 예뻐지고 음상이 보다 앞으로 다가온다. 음과 무대가 보다 말쑥해진 것을 보면 SNR이 확실히 높다. 딕션의 디테일도 크게 앞선다. 다시 선샤인 파워케이블로 바꾸니 두 케이블의 차이가 보다 잘 드러난다. 선샤인 케이블은 마치 인공조미료를 치지 않은 음식을 먹는 것 같다. 보컬 둘레의 공기감이 더 잘 느껴지고 좀 더 편안하게 들리는 것에도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Lamb Of God - Ashes of the Wake
Ashes of the Wake
드럼 림 플레이에서 쇠 비린내가 느껴지는 등 선샤인 파워케이블이 선사한 기름기 없는 음에 매료됐다. 이에 비해 타사 파워케이블은 기름기가 약간 베어 있긴 하지만 드럼 소리가 더 선명하게 잘 들린다. 평소 익숙한 사운드인데도 선샤인 파워케이블 직후에 들으니 음끝이 약간 동글고 지나치게 연마돼 있다는 인상이 든다. 드럼이 질주하는 하이라이트 대목에서는 음들이 좀 더 사나웠으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다시 선샤인 파워케이블로 들어보니 전체적인 해상도는 떨어지고 드럼 림 소리도 약간 두텁게 들리지만 날 것 그대로의 맛이 꽤 괜찮다. 드럼 솔로 대목만 놓고 보면 선샤인 파워케이블이 만족도가 더 높다. 드럼에서 펄펄 먼지가 떨어져 내리는 것 같다.
Dave Brubeck Quartet - Take Five
Time Out
두 파워케이블은 근육으로도 비유할 수 있겠다. 타사 파워케이블이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해 열심히 키운 덩치 큰 근육이라면, 선샤인 파워케이블은 일상 노동을 통해 얻어진 잘근잘근한 잔근육 이미지다. 오염되지 않은 전원이라는 느낌도 선샤인 파워케이블이 더 많이 든다. 하지만 색소폰이 매끄럽고 화사하게 들리고, 배경이 매우 정숙하며, 각 악기에 보다 환한 스포트라이트를 쏴주는 등 종합 점수 면에서는 타사 파워케이블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다시 선샤인 파워케이블로 바꿔 들어보면 왼쪽 드럼과 오른쪽 피아노의 높낮이 차이가 아까만큼 벌어지지 않는 점도 포착된다. 길버트 캐플란이 빈필을 지휘한 '말러 2번'에서는 선샤인 파워케이블이 총주 파트에서 확 터트려주는 맛은 더 좋았지만 현악기들의 트레몰로 소리가 잘 안 들리는 등 해상력과 SNR에서는 확연히 밀렸다.
AB 테스트 2. 자택에서
가격이 2.5배나 높은 타사 파워케이블과 불공정 게임을 한 것 같아 SAC 레퍼런스 1.8을 집으로 가져가 다시 AB 테스트를 했다. 마침 가격대가 비슷한 '쉴딩' 파워케이블이 소스기기 쪽에서 현역으로 활동 중이기 때문이다. 두 파워케이블을 일렉트로콤파니에의 AW250R 파워앰프에 번갈아 꽂아가며 테스트를 진행했다. 평소 이 파워앰프에 꽂아 쓰던 파워케이블은 잠시 쉬게 했다.
Diana Krall - How Insensi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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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기존 파워케이블이 좀 더 매끄럽고 깨끗하며 해상도가 높은 음을 들려준다. 음의 윤곽선이 또렷한 것도 특징. 다이애나 크롤의 발음이 더 잘 들리고 선샤인 파워케이블에 비해 덜 들이댄다. 하지만 선샤인 파워케이블이 투입되면서 평소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됐다. 그것은 바로 기존 케이블이 지금까지 너무나 타이트하고 바싹 조여진 음을 들려줬었다는 것. 이는 오존 퍼커션 그룹의 'Jazz Variants'에서도 잘 드러났는데, 실로폰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렸지만 음들이 너무 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Lamb Of God - Ashes of the Wake
Ashes of the Wake
하이파이클럽 시청실에서 테스트했던 곡을 일부러 다시 들어봤다. 드럼이 속사포처럼 질주하는 이 파워 넘치는 곡에서는 선샤인 파워케이블이 일방적으로 앞섰다. 중간에 나오는 내레이션에도 잔뜩 힘이 베여있는데다, 드럼이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순간에는 필자의 왼쪽 귀가 먹먹해지기까지 했다. 대단한 공기압이라고 생각한다. 스피드도 발군. 기존 파워케이블로 바꿔보면, 확실히 더 선명하고 말쑥하며 딥 블랙의 배경이 펼쳐지지만 이 곡의 감동이 선샤인 케이블만큼 전해지지 않았다. 같이 듣던 고1 짜리 딸도 선샤인 케이블이 좀 더 콘서트에서 듣는 듯한 느낌이었다고 거들었다.
Esa-Pekka Salonen, Oslo Philharmonic Orchestra
In The Hall of The Mountain King
Grieg : Peer Gynt
이 곡에서도 비슷한 느낌이 반복됐다. 선샤인 파워케이블로 들어보면 합창단의 발음은 약간 불분명하게 들리지만 팀파니의 딱 딱 끊어치는 폭발력과 응집력은 몇 수 위였던 것이다. 이에 비해 기존 파워케이블은 음상이 어느 순간에도 퍼지지 않고 말쑥하지만, 너무나 조심스러워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선샤인 파워케이블 때 거침없이 활보하던 음들이 그리울 정도. 필자가 지금까지 자택에서 너무나 단정하고 타이트한 음만을 들었던 게 아닌가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총평
오디오용 파워케이블에 대해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된 시청이었다. 미세전류가 흐르는 인터케이블은 주변 EMI나 RFI 노이즈에 취약한 만큼 쉴드가 필수적이지만, 대전류가 흐르는 파워케이블은 쉴드 문제에 관한 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물론 선샤인 주장대로 SAC 레퍼런스 1.8 선재가 딥 포밍 공법으로 뽑아낸 OFC 선재 덕을 크게 본 것일 수도 있고, 논 쉴딩 처리는 말 그대로 원가절감을 위한 하나의 방편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SAC 레퍼런스 1.8 파워케이블이 선사한 음은 확실히 기존 쉴딩 파워케이블과는 다른 세계였다.
물론 값비싼 파워케이블, 예를 들어 예전에 리뷰한 크리스탈 케이블의 순은 케이블이나 시너지스틱의 액티브 쉴딩 케이블, 아니면 티글론의 마그네슘 쉴딩+딥 포밍+HSE OFC 케이블만큼 압도적인 음과 무대는 아니었다. 대신 주로 순간적인 에너지감이나 자연스럽고 편안한 촉감, 탁 트인 듯한 공간감 등 특정 항목에서만 유의미한 변화가 일어났고, 디테일이나 정숙감은 쉴딩 케이블에 비해 밀리지만, 가격을 고려한다면 충분한 가치를 지닌 케이블임이 분명하다. 조만간 한국형 플러그도 출시한다고 하니 기대를 모아볼 만하다.
by 김편 오디오 칼럼니스트
Sunshine SAC Reference 1.8 Powerc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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