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겨울에 문득 하코네를 방문한 적이 있다. 한겨울의 온천이라는 테마였는데, 과연 도쿄 사람들의 휴식처라 불릴 만큼, 훌륭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리프트나 산악 열차, 케이블 카 등을 이용해 하코네 근처를 쭉 둘러보는 코스가 인상적이었다. 최종 마무리는 이른바 해적선이라고 해서, 호수를 가로질러 주변의 수려한 풍경을 관광하는 코스였다. 창밖으로 무심히 펼쳐진 호수를 하염없이 바라본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한데 이 코스 중, 고라(Gora)라는 지역이 있고, 이 부근에 이번에 만난 블랙 캣(Black Cat)이 자리하고 있다. 다시 하코네를 간다면, 당연히 이 메이커를 찾아볼 생각이다. 한편 이 지역엔 진공관 앰프의 숨은 고수도 있고, 괴짜 오디오파일도 많다고 한다. 무엇보다 미국인으로 과감히 일본에 자리를 잡은 블랙 캣의 메인 디자이너이며 주재자인 크리스 소모비고(Chris Sommovigo)씨가 흥미롭다.
인터뷰어 : 하이파이클럽
인터뷰이 : 블랙캣 케이블 대표 크리스 소모비고
- 반갑습니다. 회사의 위치가 독특한 데 있더군요.
크리스 소모비고 : 유가와라라는 곳인데, 도쿄에서 약 90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하코네 부근에 있죠.
- 이 지역엔 진공관 앰프의 숨은 장인이 있다는데 어떤 분인지 궁금합니다.
크리스 소모비고 : 이 분 성함은 사쿠마 스즈무로, 하코네 부근에 작은 레스토랑을 직접 경영하고 있습니다. 햄버그 스테이크가 특히 유명하죠. 그분 자신은 앰프를 만들어서 팔지는 않고, 오로지 자신이 쓸 것만 만들어서 레스토랑에서 틉니다. 대신 새로 개발한 회로를 <무선과 실험>에 꾸준히 올리고 있습니다. 일본 전역에 팬이 많습니다. 전형적인 예술가의 면모를 갖고 있습니다. 특히, 영어로 쓴 시는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저도 가끔 음악을 들으러 가고요.
- 재미있군요. 그런데 소모비고씨는 미국인인데, 일본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약간 의외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크리스 소모비고 : 저의 부친은 전기 기술자로, 자격증을 여럿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님 자체가 일종의 방랑기가 있어서, 자신의 기술을 갖고 여러 회사를 옮겨 다녔습니다. 이사라는 것은, 제가 어렸을 때 하나의 일상이었죠. 그런 영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만, 사실은 아이들 교육 때문입니다.
- 미국의 교육 시스템에 불만이 있다는 뜻인가요?
크리스 소모비고 : 아이를 혼자 학교에 보낼 수가 없답니다. 숱한 폭력에 노출되어 있으니까요. 또 마약이나 퇴폐 등, 교육적으로 좋지 않은 환경이 많고요. 일본에서는 아이 혼자 버스 타고 학교 다니고, 엄격한 교육으로 통제받습니다. 나중에 대학생이 되면 다시 미국에 갈지 아니면 일본에 남을지 본인에게 맡기려고 합니다만, 일단 어릴 적엔 안전한 일본에서 교육시키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겁니다.
- 최근에 빈번한 총기 사고를 보면, 그런 마음이 들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듭니다.
크리스 소모비고 : 다행히 제 아내가 일본인입니다. 3년 전 아이들을 데리고 가족 여행을 했는데, 이때 가마쿠라를 방문하기도 하고, 에노시마에 머물기도 했습니다. 그때부터 아이들 교육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죠. 그 후, 이주를 결심하고 지금은 미국에 있는 모든 시설을 다 가져와서 직접 생산하고 있답니다.
- 아무래도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는 브랜드인 만큼, 소모비고씨 자신의 경력부터 말씀해주시죠.
크리스 소모비고 : 아까 말했지만, 저희 부친은 전기 기술자입니다. 당연히 어릴 적부터 전기에 관련된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또 음악에도 관심이 많아서, 어릴 땐 기타를 주로 쳤고, 제 아내는 바이올린을 프로페셔널 수준으로 연주합니다. 한편 대학 시절엔 영화와 레코딩쪽 전공도 했습니다.
- 영화쪽을 전공했다는 점이 뜻밖이군요.
크리스 소모비고 : 한때 진지하게 시나리오 작가가 되려고 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 본령이 음악이라 생각하고, 레코딩 관련 일을 참 많이 했습니다. 1996년부터 한동안 많은 레코딩을 했습니다. 모스크바 심포니부터 다양한 음악을 녹음했죠. 그때 쌓은 경험이 무척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 맞습니다. 그럼 음악쪽 이야기를 해주십시오. 언제부터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요.
크리스 소모비고 : 저희 모친이 재즈를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제가 4살 무렵이라고 기억하는데, 그때 처음 들은 것이 재즈입니다. 이후 재즈는 지금까지 즐겨 듣고 있습니다. 한편 10대 시절엔 록에도 심취해서, 레너드 스키너드, 톰 페티, 몰리 하쳇 등을 들었습니다. 당시 제가 살던 곳에 음반 가게가 하나 있었습니다. 여기서 레코드뿐 아니라 <크림>이라는 음악 전문지를 팔았습니다. 덕분에 이 잡지도 오랫동안 읽었죠.
- 당연히 오디오에도 관심이 있었고요.
크리스 소모비고 : 하이엔드에 눈을 뜬 것은 마이애미 대학에 다닐 때였습니다. 마침 이 대학교 길 건너편에 하이엔드 오디오 전문 숍이 하나 있었습니다. 저는 고작 보스턴 어쿠스틱스 수준을 쓸 무렵이었지만, 이 숍에 진열된 하이엔드 기기는 눈을 휘둥그레 뜨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숍의 주인이 피터 맥그레프씨로, 나중에 숍을 치우고 윌슨 오디오에서 일하는 등, 아무튼 이 분야의 전문가였습니다.
- 그런 분을 만난 것이 큰 행운이라 생각되는군요.
크리스 소모비고 : 맞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맥그레프씨가 정색을 하고 한번 음을 들어보라고 했습니다. 비록 지금 살 수는 없지만, 어릴 때 이런 음을 들어봐야 뭐가 레퍼런스인지 알게 된다고 하면서요. 그래서 윌슨 오디오와 골드문트의 조합으로 들었는데, 이게 제 인생을 바꿔놓고 말았습니다. 졸업 후 L.A.에 가서 영화 관련 일을 해볼까 했지만, 결국 다시 마이애미로 돌아와서 그때부터 하이엔드 오디오 관련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그때의 경험이 절 이쪽 분야로 자연스럽게 인도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 그때부터 케이블쪽 일을 했나요?
크리스 소모비고 : 당시 저 혼자 회사를 차릴 수가 없어서, 친구 한 명의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 친구는 전자레인지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로우 임피던스가 어떤 이점이 있는지 그가 알려줬습니다. 이래서 일루미네이션 오디오를 창업하게 됩니다. 1992년 무렵입니다.
▴ BlackCat Digit 75 Cable
- 그 당시 어떤 케이블이 주력이었나요?
크리스 소모비고 : 디지털 케이블로, 정확히 75오옴을 맞춘 겁니다. 지금도 75오옴을 제대로 맞춘 케이블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 당시 큰 화제가 되었죠. 이후, 친구는 산 호세로 이주해서 제가 본격적으로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1994년에 한 통의 전화를 받습니다. 바로 레이 킴버씨한테요.
- 킴버 케이블을 주재하는 분 맞죠?
크리스 소모비고 : 맞습니다. 그가 제게 케이블을 한번 보내보라고 연락한 겁니다. 그래서 바로 보냈죠. 얼마 후 연락이 왔는데, 케이블이 괜찮으니 자기들이 배급을 해보겠다고 했습니다. 저야 마다할 이유가 없죠. 그래서 이 케이블의 전세계 배급을 킴버가 맡게 됩니다.
- 그때부터 레이 킴버씨와 교류가 시작되는군요.
크리스 소모비고 : 제게 킴버씨는 일종의 스승이자 부친과 같은 존재입니다. 여러 가지 배운 게 많습니다. 그러다 하이엔드급 아날로그 케이블을 함께 만들기로 한 것이 무산이 되고, 여러 계약상의 이유로, 저는 일루미네이션을 포기하게 됩니다. 이 회사의 기본 제품들은 지금도 킴버에서 팔고 있답니다.
- 그렇군요. 그럼 그 다음 스텝은 뭐죠?
크리스 소모비고 : 스테레오복스(Stereovox)입니다. 2000년, 조지아에서 토니라는 친구와 함께 설립했습니다. 사실 킴버와 계약 문제로 2000년이 되어서야 제가 다시 케이블 제조를 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이때 토니는 프론트 맨 역할을 해서, 뱅킹이나 샐러리 등 여러 분야를 처리하고, 저는 오로지 설계에만 집중했습니다. 시장에서 반응이 좋아 인지도가 무척 올라갈 무렵, 2007년경 다시 회사를 그만두게 됩니다. 그때 토니에게 모든 권리를 양도하죠. 그 다음에 스테레오랩을 만들었다가 2010년에 블랙 캣을 설립하게 됩니다.
- 참 여러 회사가 만들어졌다 사라졌는데, 뭔가 계약상 복잡한 문제가 있었을 것같습니다. 그런데 왜 블랙 캣을 새로 설립했는지, 이 부분이 궁금합니다.
크리스 소모비고 :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생기면서, 사실 비싼 케이블 시장이 많이 위축되었습니다. 제가 새로 만든 스테레오랩같은 회사의 제품을 판매하기가 어려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직접 딜러에게 판매하면서 마진을 줄이는 쪽의 브랜드를 따로 런칭하기로 합니다. 그래서 블랙 캣을 만든 겁니다. 한데 이게 큰 인기를 얻어, 지금은 블랙 캣에 주력하는 상황이 된 것이죠.
- 블랙 캣이라는 이름이 재미있습니다. 이런 작명을 한 데에 무슨 사연이 있나요?
크리스 소모비고 : 가장 큰 이유는 제 개인적으로 1800~1900년에 이르는 시기의 유럽 문화를 동경한 데에 있습니다. 이 무렵 파리 몽마르트에 있는 바의 이름이 바로 <블랙 캣>이었습니다. 여러 예술가, 철학자, 시인 등이 몰려든 명소였답니다. 그 바의 로고가 너무 마음에 들어, 제 브랜드 명으로 채택한 것이죠.
- 그럼 블랙 캣에 대해 좀 더 알아보기로 하죠.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인가요?
크리스 소모비고 : 우선 선재를 튜브에 담을 때, 그냥 일자로 쭉 뽑아서 덮는 게 아니라, 선재 자체를 웨이브를 줍니다. 동그랗게 구부려서 그 위에 튜브를 씌우는 겁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우선 선재와 튜브가 닿는 면적이 무척 작게 됩니다. 또 케이블 자체를 구부렸을 때에도 큰 영향이 없고요. 이것을 나미(nami) 콘덕터라 부릅니다.
- 이런 접근법은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크리스 소모비고 : 단, 모델에 따라 심선은 바뀝니다. 저가형 모델일 경우, 작은 마이크로 튜브에 순동 선재를 담죠. 그러나 루프 정도가 되면, 두 개의 순은 선재를 쓰는데, 솔리드 코어 형태랍니다. 한편 매트릭스라는 기술도 동원합니다. 총 32개의 선재를 엮어서 하나의 케이블을 만드는데, 이것이 무척 복잡한 형태여서 매트릭스라고 부릅니다.
- 그렇게 하면 어떤 효과가 있습니까?
크리스 소모비고 : 일단 속도가 빨라지고, 다이내믹스도 좋아집니다. 여러 다양한 방식을 실험했지만, 지금의 매트릭스가 제일 낫습니다.
▴ BlackCat Tron Cable
- 그 다음엔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크리스 소모비고 : 트라이오드란 기술이 있습니다. 선재를 매트릭스으로 엮은 다음, 그 위에 순은으로 만든 리본을 트위스트해서 덮는 것입니다. 사실 저희 모든 제품은, 모델마다 그 구조가 다릅니다. 특히, 아날로그쪽은 제가 하나씩 직접 컨트롤해서, 음향을 좋게 만듭니다. 현재까지 총 5개의 라인업이 있는데, 똑같은 캐릭터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계로 대충 찍어낼 수가 없답니다. 저희 회사엔 크리스토퍼란 친구가 있는데, 그가 주로 툴 머신을 이용해서 전체적인 레이 아웃을 한다면, 저는 일일이 손으로 나미 컨덕터를 만듭니다. 이것은 오랜 경험에서 비롯된 감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기기에서 길게 선을 뽑아서 피복하는 것을 저는 소시지 만드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 BlackCat에서 제작한 W. THE MATRIX RAW CONDUCTOR
- 재미있는 비유군요. 그런데 블랙 캣의 케이블은 별로 두껍지 않습니다. 무슨 이유가 있나요?
크리스 소모비고 : 두꺼운 케이블을 만들면, 튜브의 무게 때문에 컨덕터가 짓눌리게 됩니다. 그것은 소리 자체가 압축되어 나오게 만들죠. 자세히 들어보면, 어딘지 모르게 소리가 가공된 느낌을 줍니다.
- 케이블에선 커넥터도 중요한데, 이 부분은 어떻게 처리하죠?
크리스 소모비고 : RCA 단자의 경우, 제가 디자인합니다. 내부는 비워놓고, 선이 접촉하는 부분에 일종의 톱니바퀴식으로 위 아래 맞물리게 했습니다. 그래서 선재를 끼워 넣은 후, 스크류를 돌리면 톱니바퀴가 꽉 무는 식이 되는 겁니다. 이 디자인에 따라 쉐도우라는 회사에서 제작해서 저에게 공급합니다. 지금은 XLR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 아무래도 블랙 캣 하면 디지털 케이블이 유명합니다.
크리스 소모비고 : 75옴의 기준을 정확하게 충족시키니까요. D60, D75, 트론 등 여러 모델이 있는데, D60도 괜찮고, D75를 쓰면 상당히 만족하리라 봅니다. 하이엔드 유저들은 AES/EBU쪽 케이블을 선호하지만, 저희 동축 케이블을 쓰면 음질면에서 더 낫다고 생각할 겁니다. 한편 아날로그 케이블도 서서히 주목을 받는 상황이어서, 앞으로 다양한 모델을 출시할 예정입니다. 저희의 강점은, 어떤 모델이든 일일이 손으로 제작하고, 튜닝한다는 겁니다. 가격대비 성능도 뛰어나서 이 부분은 한국 시장에서도 좋게 어필하리라 기대합니다.
- 그렇군요. 아무튼 장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크리스 소모비고 : 네. 감사합니다.
처음 만났지만, 소모비고씨의 소탈하고, 해박한 모습은 마치 오랜 친구를 대하는 듯했다. 경관이 수려하고, 산과 호수가 함께 있는 하코네에서 케이블을 하나씩 하나씩 장인의 손길로 만든다는 것 자체가 어떤 신비감도 주고 또 로맨틱한 느낌도 준다. 기회가 되면 동사의 대표인 디지털 뿐 아니라 아날로그 케이블도 차례로 들어보고 싶다. 가격대도 착해서, 여러모로 매력이 있는 것 같다.
- 이 종학 (Johnny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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