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V6 싱글 앰프 이야기
Onekey's Memo : 아주 오래전에 하이파이저널에서 읽고는, 10여년전에 온라인에서 재차 접했는데, 그때는 캡춰 하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최근에 이 글이 네이버 카페에 포스팅되어 블로그에 옮기게 되었습니다.
6V6 싱글 앰프에 관한 전설적인 이야기입니다. 1994년 하이파이 저널 7호에 실린 글입니다. 작자는 권병조라는 분입니다. 아래에 그 글을 소개합니다.
성중괴노 星中怪老
어찌 보면 꿈같기도 하고 또 다르게 보면 분명 일어난 일이 틀림없는 그 괴노인과의 만남은 숱한 오디오를 만나고 떠나 보내는 동안 줄곧 불가사의의 일로 남아 있다. 그 노인과의 만남으로 알게 된 6V6이란 조그만 진공관은 지금도 풍성하면서도 아늑함을 전해주고 있다.
괴노인 怪老人
6V6이란 진공관이 있다. 6BQ5와 더불어 출력관 중에서 가장 작은 관에 속한다. 이 6V6을 사용한 앰프는 많지 않다. 왜냐하면 고급 앰프들에는 이보다 더 크고 고급인 출력관들이 사용되었고, 보급형 앰프들에는 비슷한 가격이면서도 이보다 출력이 더 높은 6BQ5라는 뛰어난 출력관이 있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어중간한 이 출력관이 나의 관심을 끌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현재까지 7년 이상 애지중지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기묘한 일이요. 어쩌면 전생의 인연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런 기이한 인연을 가져다 준 사람이 있어 나는 그를 6V6 노인이라 부르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꿈속에서 산신령을 만난 것처럼 어리둥절한 기분을 금치 못한다.
7년 전의 어느 봄날, 나는 환자들을 보는 중간중간에 창 밖의 따사로운 햇살을 음미하고 있었다. 창밖의 수양버들은 가지마다 새잎들이 파릇파릇 돋아나 잔뜩 휘늘어져 있었다. 봄 날씨는 숨 막힐 듯 화창하기만 했고 이따금씩 봄바람이 불어와 콧속으로 살살 스며들었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는 찬바람이 일고 있어서 가볍게 신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즈음 오디오에 대한 불만이 차츰 고조되고 있어서 강제로 억압하기란 무척 힘든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의 평화를 깨뜨리고 새로운 전투를 계획하며 마음속으로 칼을 갈고 있었다. 보도(寶刀)는 아닐지라도 예리하게 갈고 또 갈아서 단칼에 적을 베어버리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길 양편에는 무수한 복병들이 웅크려 매복하고 있는데, 홀홀 단신으로 칼 한 자루 차고서 도산검림(刀山劍林) 속으로 돌진한다는 것은 너무 무모하지 않을까?
바로 그때 나를 이러한 망상에서 깨어나게 해준 사람이 있었다. 인생의 황혼에 접어든 깡마른 몸집의 한 노신사가 당당한 걸음걸이로 진찰실 안으로 들어섰다. 완전 백발에 깊게 주름살 패인 구리색 피부, 쑥 들어간 양 볼은 세상의 모진 풍파를 온통 다 겪은 듯했으나, 눈빛은 지혜에 가득 찬 듯 신비로웠고, 눈가에는 자애로운 웃음이 감돌고 있었다.
첫눈에 대단한 매력을 지닌 이 노신사는 회색의 깨끗한 양복과 고급 넥타이를 매고 있어서 나에게는 약간 의외란 느낌을 주었다. 왜냐하면 그 노인이 들어오기 전 간호사가 책상 위에 갖다놓은 진료기록부에는 의료보호 1종으로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통상 의료보호카드를 가지고 병원에 찾아오는 영세민 환자들은 하나같이 꾀죄죄한 차림새에 기운이 없어 보이는 초라한 사람들뿐이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1종은 2종이나 3종보다 더욱 가련한 사람이었으므로 이런 멋쟁이 노신사라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될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는 어디가 안 좋으셔서 오셨습니까?”
“선생. 노부(老夫)의 병은 제법 까다로운 것이라 웬만한 의사들은 고치기 어렵소. 실례지만 선생은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소?”
“죄송한 말씀이오나 아직은 취득하지 못했고 현재 과정 중에 있습니다. 내년 2월에 학위를 받을 예정으로 있습니다.”
“됐어. 그 정도면 됐소. 자 이제 노부의 병을 이야기해 보리다.”
의료보호환자들에게는 더욱 친절하게 대하여 그들이 서러움을 받지 않도록 하겠다는 나의 평소 신념대로 최선을 다하여 그 노인을 진료하였다.
“노부가 이 영세민 의료카드를 가지고 수많은 병의원들을 다 돌아다녀 보았는데, 선생만큼 따뜻하고 친절한 의사는 처음이오. 고맙소. 선생. 그럼 내일 또 오리다.”
대략 3주정도 치료를 하자 노인의 병은 나의 예상을 뛰어넘어 급속도로 회복되었으므로, 이제는 거의 완치 단계에 와 있게 되었다.
“선생. 선생은 편작 이래 진정한 명의라 할 수 있소.”
“아니. 무슨 그런 과찬의 말씀을….”
“노부가 그렇다고 하면 바로 그런 것이오. 노부는 이래봬도 신통력이 있다오. 선생은 오디오를 무척 좋아하지 않소?”
나는 속으로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오디오 잡지들의 표지를 이 노인이 보았구나 하고 생각하면서도 딴전을 피웠다. “아니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정말 신통하십니다.”
“허허허. 그러게 신통력이 있다고 하지 않았소? 이 노부로 말할 것 같으면 국내 오디오계의 장문은 못된다 할지라도 장로쯤은 될 것이오. 말하자면 오디오의 귀신인 셈이지. 어떤 인물이건 한번 척 보면 이 사람이 오디오에 미친 사람인지 아닌지를 식별할 수 있거든.”
“그러시면 할아버지께서도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십니까?”
“물론이지. 그런데 할아버지라고 부르지 마시오. 노부는 아직 그--렇게 늙지는 않았으니까.”
“그럼 무엇이라도 불러드릴까요.”
“오디오계에서는 이 노부가 한참 선배인 것 같으니 노선배라 불러주게.”
“노선배….”
“이왕이면 님자도 붙여주시구려.”
“노선배님? 노선배님? 아니 이건 무협소설에 나오는 어휘 아닙니까?”
“맞았네. 어허. 선생은 기특하게도 무협소설도 많이 읽은 모양이로군. 정말 노부의 마음에 쏙 들었어. 그럼 어디 선생의 오디오 시스템을 한번 이야기 해보게.”
“알텍 19란 스피커에 래드포드 진공관 앰프를 씁니다. 턴테이블은 가라드 301이고 톤암은 SME 3012. 카트리지는 오르토폰 SPU입니다.”
“으음. 래드포드라면 과거 30년 전에 잠깐 출몰했던 그것 말인가?”
“아닙니다. 최근에 나온 신형입니다.”
“그럼 그 신형 래드포드의 출력관은 무엇인고?”
“EL34 푸시풀입니다.”
“그렇다면 그건 헛도는 소리일세. 정곡을 찌르는 원초적인 소리가 아니지. 듣는 음악도 관현악 위주일테지?”
“그렇습니다. 바로크음악이나 협주곡까지는 잘 나오는데 실내악이나 현악 독주는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이 스피커 문제라고 생각해 왔었습니다.”
“그렇지가 않아. 어느 스피커이건 어떤 것은 잘 내어주고 또 어떤 것은 잘 못 내어주는 경향이 있는게 사실이지만 손질하기에 따라서 어떤 장르건 다 잘 낼 수 있지. 선생이 스피커와 앰프를 잘 다루어 실내악을 잘 나오게할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교향곡이 지금보다 못한 소리로 되어버리거든. 현재 선생의 입장을 보건대 관현악은 지금의 소리가 괜찮으니까. 그대로 유지하면서 실내악만 잘 내어주는 그런 방책이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지?”
“바로 그렇습니다. 앰프를 추가해야만 하겠습니까?”
“그렇다네. 선생은 역시 두뇌회전이 빠르구먼.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피커를 추가하는 방법을 쓰지만 노부는 찬성하지 않네. 대부분 실패하게 되어 있지. 스피커란 음색을 결정하게 되는 근본인데. 자기가 좋아하는 음색이란 자꾸 듣다 보면 한 가지로 고정되는 법이지. 실내악에서의 음색이 관혁악에서의 음색과 다르다면 오래 듣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게 되지.
결국은 재생에 불만스럽더라도 두 놈 중에서 한 놈만 듣게 되고 나머지 한 놈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지. 그리고 앰프를 추가하더라도 음색이 너무 틀려서는 곤란하네. 스피커 짝이 나는 거지. 음색이 비슷하면서 한 놈은 스케일이 크고 힘차며 또 한 놈은 다소곳이 얌전하다면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배합이 되는 게야. 그리고 그것이 오디오의 정도이기도 하고. 그러나 노부와 같이 대편성의 관현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그럴 필요가 없지. 얌전한 놈 하나만 있으면 되거든.”
“노선배님, 무리한 부탁인 줄은 알고 있지만 저희 집으로 한번 방문하셔서 지도해 주실 수 없습니까?”
“그러지. 이 노부가 선생한테 많은 신세를 졌는데 어찌 거절할 수가 있겠나?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구. 오늘 저녁 끝날 무렵 다시 들르겠네.”
그날 저녁 노인에게 융숭한 식사 대접을 한 후 집으로 모시고 갔다.
“우선 잘 나오는 관현악을 한 곡 틀어보게.”
“예, 모차르트의 ‘린츠’를 틀어보겠습니다.”
“으음. 입체감도 좋고 분리도며 스케일도 다 좋은데 저음이 불분명하고 고음의 끝이 둥그스름하네.
부자연스러워.”
“부드러운 것이 부자연스럽다는 말입니까?”
“부드러운 것과 끝이 뭉개진 것과는 다른 의미이지. 저기 있는 AVR는 뭣 때문에 쓰고 있나?”
“진공관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꼭 써야 한다고 합니다.”
“저따위 엉터리로 무엇을 보호한다는 게야?”
“국산 제품이긴 하지만 꽤 고급으로 만들었고 또 값도 상당히 비싼 것입니다.”
“아무리 비싸도 엉터리는 엉터리야. 허면 AVR를 떼고 벽의 콘센트에 직접 꽂아보지는 않았나?”
“예. 처음부터 AVR에만 연결했습니다.”
“쯧쯧. 지금 벽에다 한번 직접 꽂아보게.”
노인의 말을 듣고 플러그를 직접 벽에다 꽂아보았다. 그랬더니 이제까지 안 들리던 고역의 미세한 음이 들려오면서 저음이 훨씬 더 단단해지고 다이나믹하게 변했다. 그래서인지 전보다 훨씬 생생한 임장감이 느껴졌다.
“거봐. 아까 그 소리는 마스킹된 소리였어. 지금의 소리가 훨씬 더 자연스럽지. 전원 트랜스나 파워앰프의 출력트랜스야 어쩔 수 없지만 그 외의 트랜스는 가급적 쓰지 않는 게 좋지. 그런데 결이 약간 까칠까칠해서 선생은 별로 좋아하지 않겠구먼. 그러면 파워앰프 쪽은 그대로 두고 프리앰프만 AVR에 다시 꽂아봐.”
그러자 신기하게도 미세한 음과 임장감은 그대로 있으면서 까칠까칠했던 결만 제거되었다.
“자, 그러면 선생의 귀문(鬼門)인 실내악을 한번 들어보세.”
나는 현악 4중주곡 중에서는 그래도 잘 나오는 편인 하이든의 현악 4중주곡 ‘종달새’를 틀었다. 노인은 안 그래도 주름살진 그의 눈살을 더욱 깊게 찌푸리면서 대략 5분쯤 듣더니 돌연 음악을 중단시켰다.
“아니 세상에 이렇게 형편없는 소리가 다 있나? 마구 째지고 깨지고. 하여간 젊음이 좋긴 좋구먼. 귀가 상하지 않고 계속 듣고 있으니. 저 스피커 밑에 있는 굵은 전깃줄은 무어야?”
“스피커 케이블입니다.”
“실내악 듣는 사람이 저런 케이블을 쓰면 어떡하나. 전파상에 가면 보통 케이블이 있네. 당장 내일이라도 사다가 갈게.”
“스피커 케이블만 바꾸면 실내악이 잘 나올까요?”
“그렇게 해서 들어보고 그래도 안 되면 앰프를 추가해야지.”
“벽에 전원을 직접 꽂아서 그런지 ‘종달새’는 전보다 못한 소리입니다. 스피커의 어테뉴에이터를 조정하는 방법도 있지 않겠습니까?”
“백날 해봐라. 뭐가 되나. 아 그러면 지금 한번 돌려보게. 고음을 낮추고 저음을 올려봐. 아마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나올 게야.”
노인의 말대로 고음을 낮추고 저음을 올려보았더니 형편없는 고음은 여전한데 다만 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저음은 붕붕대면서 소리가 전체적으로 탁해지고 고음과 저음이 따로 노는 느낌이었다.
“어떠냐? 역시 안 되지? 오디오가 복잡한 것 같지만 사실은 간단해. 되는 순서가 있고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건 역시 안 되는 것이야. 노부의 생각으로는 스피커 선을 바꿔도 한계가 있을 게야. 역시 얌전한 앰프를 하나 준비하는 게 좋을 거야.”
“2A3은 어떨까요?”
“무난하겠지. 허나 두루뭉수리한 소리가 나오기 쉬운 데다 음색이 EL34와 너무 틀려.”
“그러면 211은 어떻습니까?”
“알텍에는 쏘는 소리가 나오지. 음색도 다르고.”
“그렇다면 300B 정도라야 되겠습니까?”
“300B로 무슨 실내악을 들어? 재즈나 들어야지.”
참으로 공교롭게도 후일 나의 리스닝 룸에는 노인이 안된다는 2A3. 211. 300B가 순서대로 들어왔다가 순서대로 나가게 된다.
“노선배님.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그러시면 도대체 무엇이 있습니까?”
“빔관이라야지. 3극관은 선명하고 순수한 맛이 있지만 튀어나오는 소리라 실내악의 화음은 낼 수가
없어. 빔관이라도 KT88이나 6550같은 것은 힘이 넘쳐 나와서 실내악에는 안돼. 6L6이 적당하지만 음색이 EL34와는 많이 틀려. 선생이 EL34의 음색을 좋아하니까 하는 이야기네. 그런데 보다시피 알텍에는 EL34만 해도 너무 힘차지 않은가? 힘을 빼야 하는데 말이야. EL34를 싱글로 듣는 것이 좋을 듯하네. 출력은 4W정도로만 해서 말이지.
그러나 그보다 더 좋은 건 바로 6V6이야.
모든 출력관 중에서 으뜸이지. 또한 노부가 쓰고 있는 관이기도 하고.
헌데, 6V6은 만들기에 따라서 음색이 완전히 달라지지. EL34와 비슷한 음색이 되기도 하고 6L6이나 6550과 비슷한 음색이 되기도 하지.
이 6V6을 싱글로 2W정도로 해서 EL34와 비슷한 음색으로 만드는 거야. 그렇게 해서 실내악이나 독주를 듣게 되면 만사 끝나는 거지. 노부가 단언하건대 이 6V6에 일단 맛들이게 되면 다시는 끊어버릴 수 없게 되네. 가장 순수하면서도 복잡 미묘한 소리이고. 태고적(太古的) 생명의 약동이 스며있는 원초적인 소리를 들려준다네.”
“노선배님. 저는 앞으로 A5로 업그레이드를 하려는 계획이 있습니다. 어떻겠습니까?”
“A5란 극장용이라 가정에서는 19보다 못한 소리가 나올 걸세. 허나 고생할 각오만 있다면 문제는 안되지. 결국에 가서는 19와는 비교할 수 없는 기막힌 소리가 나올 테니까. 허나 그 고생은 무지막지할 걸세. 철석같은 간담을 지니고 무수한 고비를 넘겨야 하네. 좋은 스승을 만난다면 의외로 성취가 빠를지도 모르겠지만.”
“사부님께서 도와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사부? 누가 자네를 제자로 받아들이겠다고 했는가? 또 오디오에 무슨 사제 관계가 있나? 비굴하기 짝이 없구먼.”
“아니. 노선배님께서 방금 좋은 스승을 만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랬던가? 노부의 말이 잘못 튀어나온 모양이네. 미안하이. 노부는 자꾸 현실을 무협소설과 혼동하는 일이 많다네.”
“그래도 설마 노선배님께서 저를 도와주시지 않겠다는 말씀은 아니겠지요?”
노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짐짓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선생. 노부의 말을 잘 들어보게. 세속의 명리와 은원도 모두 뜬구름 같이 하찮은 것이거늘. 하물며 오디오란 무엇인가? 한낱 취미에 불과할 따름이네. 하늘의 뜻을 읽고 인생의 깊이를 헤아려 천도를 행하는 일에 비한다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그리고 오디오란 제 각각이라네. 누가 도와줄 수도 없는 노릇이며 절대적인 지리도 없는 법이네. 영원히 끝도 없는 것이고. 예전에는 수도자처럼 마음의 안정을 꾀하고 끝없이 추구해나가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으리라 믿었었네.
그러나 이는 틀린 말이네. 오디오란 욕심을 전제로 해서 도를 닦는 것이거든. 헌데 욕심이 있으면 도가 닦아지지 않아. 진정으로 도를 닦는다면 또 욕심도 없어지지. 욕심이 없어지면 소리가 어떻게 나오든 아무런 상관이 없어지게 되네. 즉 오디오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지.
이 노부 자신도 오디오에 대해서 십분지일도 모르는데 어떻게 남을 도와줄 수가 있겠는가? 또 노부는 지금 어떤 일을 도모중이라 그렇게 한가하지도 않고. 오늘 노부가 초대를 받았으니 노부도 선생을 한번 초대하겠네. 그래서 노부가 소리를 한번 들려줌세. 그 다음은 선생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해나가야만 하네.”
천상지음 天上之音
그로부터 이틀 후인 토요일 오후. 나는 설레는 기대 속에서 노인의 집으로 갔다. 난민촌을 연상케 하는 상계동의 좁고 복잡한 골목길을 이리 돌고 저리 돌아 발 디딜 틈도 없는 시장 한복판까지 통과해서야 간신히 약도에 그려진 노인의 집을 찾을 수 있었다.
낡고 작은 집이지만 노인의 깔끔한 성격으로 도관(道觀)처럼 청결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으며, 좁은 마당에는 모과나무, 석류나무, 탱자나무 등이 심어져 있었고, 난간 위에는 이름 모를 난초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칠이 다 벗겨진 대문을 두드리니 이윽고 노인이 기침 소리와 함께 나와서 문을 열어주었다. 방으로 안내되어 방바닥에 앉으니 아늑한 기분이 들었으며 단향을 피웠는지 은은한 향기마저 풍겨왔다.
“선생, 찾느라 꽤나 고생이 많았지?”
“예,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왁자지껄했었는데, 노선배님의 댁에 들어서니 갑자기 조용해지는 것 같습니다.”
“허허, 그럴 게야. 여기는 의외로 조용하지. 허나 노부는 그런 시끌벅적한 것도 무척 좋아한다네. 사람 사는 곳 같거든. 진정한 도인은 시정(市井)에서 도를 깨우친다고 하지 않는가? 허참 그런데, 여기는 얼마 안 있어 헐리게 되네.”
“왜 헐리게 되는 겁니까?”
“글쎄, 이 정부의 시책은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아. 무슨 아파트를 짓는다는구먼. 노부는 딴 데로 이사를 가야 되겠지.”
창문 쪽으로 AR3만한 크기의 스피커가 있었고 반대편에는 레코드 래크가 있었는데 약 500장 가량의 LP가 꽂혀 있었다. 그 래크 위에 자작의 프리와 파워앰프 및 턴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노인은 프리앰프의 뚜껑을 열어 보이며 말을 꺼냈다.
“선생, 무척 간단하게 보이지? 진공관은 네 개뿐이야. 프리앰프 중에서 이보다 더 간단한 회로는 다시 없을 게야. 하지만 이 단순한 회로는 수없이 만들고 부수고 하는 고통스런 과정을 겪고 난 후의 산물이지. 부품들이 상당히 큼직한 것들이지? 미군 통신기기에서 빼낸 것들이야. 파워앰프도 최고로 단순하다네. 전원 트랜스도 노부가 직접 감은 것인데, 정격 용량의 세 배 정도는 되지. 출력 트랜스 역시 군용 코어로 노부가 직접 감았네.”
옆의 턴테이블은 AR XA였고, AR 톤암에 슈어 44 카트리지가 끼워져 있었다.
“XA의 베이스도 노부가 직접 짠 것인데 아래쪽에서 5cm 윗부분의 안쪽에 두꺼운 밑판이 있지. 거기에서 지금 인슐레이터를 받쳐놓은 판 사이에는 스프링이 30개가 들어가 있어. 완전히 공중에 둥둥 떠 있으니 선생의 가라드와는 180도 틀린 것이지.
일반적으로 AR은 턴테이블은 좋은데 톤암이 안 좋다고 하지만 틀린 이야기야. 슈어 같은 싸구려 바늘로 MC형과 맞먹는 해상력을 얻게 해주지. 아무리 고급 톤암이라도 이런 바늘을 달게 되면 형편없는 소리가 나오거든.”
노인은 나를 스피커 앞으로 데려가서 설명해 주었다.
“이 스피커에는 많은 투자를 했지. 우퍼는 젠센의 12인치짜리이고 이 2인치짜리 콘 트위터는 국적도 브랜드도 모르는 것인데 수십 개의 유닛 중에서 선별한 것이라네. 인클로저는 미송합판을 가져다가 손수 짠 것인데 셀 수도 없을 만큼 여러 번 짰었어. 실패한 인클로저는 모두 불쏘시개가 되었지.
미송이 역시 활활 잘 타더구먼. 아랫부분에 5cm가량의 슬릿이 보이지? 안쪽에 곡면으로 된 격판이 있다네. 말하자면 일종의 백로딩 혼이지. 출구가 더 좁아진 이상한 혼으로 보이지만 밑면에 3개의 덕트가 있어. 이 받침대도 또 공이 많이 들었지. 미송합판으로 상자를 만들고 그 속에는 회벽돌 가루가 들어 있지. 흰 벽돌을 망치로 깬 다음 맷돌로 갈았지. 여기에 횟가루를 3:1의 비율로 섞은 것이야. 자 그럼, 한번 들어보게.”
모차르트의 현악 4중주곡 제13번에 바늘이 얹혀지고 드디어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그 순간 벼락을 맞은 듯 부르르 몸이 떨려왔다. 그 생생함, 그 섬세함, 그 청초함, 그 세련됨, 그 부드러움, 그 편안함, 하여튼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비 내린 후의 화단에서 꽃과 잎새들을 보는 듯 생생하고 찬란하였다. 거기에서 풍겨 나오는 화음의 정취는 가슴을 파고들어 흔들어 주는 지극히 감동적인 것이었다. 네 개의 현악기가 정확히 제 위치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움직이는 법이 없는 데다 질감 또한 아주 정확하였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감싸주는 아늑한 분위기에 편안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계속 듣고 있자니 가슴이 울렁거리고 온몸이 노곤하게 풀어져 자세가 휘청거렸다.
노인은 방석을 하나 더 주면서 벽에 기대어 들으라고 했다. 노인은 계속해서 드보르자크의 ‘둠키’와 베토벤의 현악 4중주 제9번을 틀어주었다. 나는 벽에 기대어 앉아서 연신 속으로 중얼거렸다. ‘현악기들의 화음이란 이렇게도 아름다운 것이었는가? 이건 천상의 소리다. 실연주보다 더 아름답지 않은가! 인간이 연주해서 과연 이렇게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가 있을까? 어려울 것 같다. 그런데 기계에서 이런 소리가 나오고 있는 거라구? 이건 말도 안 된다. 저 노인은 혹시 귀신이 아닐까?’
노인의 말소리가 나를 일깨웠다.
“관혁악도 하이든이나 모차르트까지는 괜찮다네. 그런데 베토벤부터는 힘이 달려서 안돼.”
하이든의 ‘시계’를 들어보니 나의 알텍과 래드포드에 비하여 분명 힘이 없는 소리였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알텍보다 더 웅장한 느낌이었으며, 악기군들의 분리도가 굉장히 좋았고, 홀 톤이 완벽하게 살아나왔다. 조금 더 듣고 있으니까 힘이 약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고 차츰 기막히게 아름다운 울림에 빠져들어 언제까지나 듣고 있었으면 싶을 정도로 즐거움과 행복감에 젖게 되었다.
브렌델의 피아노 소리 또한 건반을 두드리는 손가락의 터치가 선명하게 눈을 잡혔다. 먼저 따각 하고 두드리는 소리, 다음은 줄의 떨림, 그 다음에는 피아노 박스의 울림이 길게 여운을 끌고 들려와서 바로 앞에서 연주되는 것으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노인이 비교해 보라며 들려준 리히터의 쳄발로 연주를 들어보니 이것은 또 극도로 가느다란 선율이 솜털처럼 가볍고 경쾌하면서도 낭창하게 나오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렇듯 질감이 정확하단 말인가? 피아노는 두껍고 진하며 윤기 있게 나오고, 쳄발로는 가늘고 담백하며 건조하게 나오다니. 값비싼 초대형 스피커에서도 저런 소리가 안 나오는데 어떻게 저따위 엉터리 자작 스피커에서 저런 소리가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정신을 못 차리고 비실대고 있는 나에게 노인은 호탕하게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선생 이제 그만 틀겠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오래 들으면 싫증나는 법이네. 그나저나 아직 식사도 안 했으니 배가 몹시 고플 테지? 오늘은 노부가 사겠네.”
나는 아쉬움과 미련 속에서 노인을 따라 집을 나섰다.
주점야화 酒店夜話
집 앞의 골목길을 내가 왔던 반대방향으로 가다가 좌로 틀어보니 끝이 안 보이게 긴 골목이 나타났는데, 간신히 사람 하나 지나갈 정도였다. 골목이 끝나는 모퉁이에 시커면 주점 하나가 눈에 띄었다.
“여기는 노부가 줄긋고 마음대로 먹고 마실 수 있는 곳이지.”
돼지 코의 뚱뚱한 주모가 반갑게 맞이하자 노인은 그 주모의 엉덩이를 툭툭 치면서 서로 소개시켰다.
“주모! 이분은 강호에서 묘수신의(妙手神醫)라 불리는 대협객이시네. 그리고 선생! 이쪽은 노부의
연인이라네. 풍만함이 넘쳐흐르는 매혹의 여인이지.”
“그래요. 저는 매혹의 여인이에요. 예쁘게 봐주세요.”
방으로 들어가 식사를 하고 나자 노인은 순대 한 접시와 소주 두 병을 주문했다.
“그저께 선생 집에 갔을 때 말이야. 그때는 너무 했어. 술 한 잔 안나오더구먼.”
“아이고, 죄송합니다. 저는 노선배님께서 술을 그렇게 좋아하시는 줄 몰랐습니다. 말씀하셨으면 즉시 내놓았을 텐데.”
“하하 그건 농담이고, 하여간 오늘 마음 맞는 사람끼리 만났으니 술을 천천히 들면서 이야기나 나누세. 자 우선 한잔하게. 그리고 뭐든지 물어보게.”
“사모님… 아니, 노부인께서는 안 계십니까?”
“노부인은 아니라네. 젊었을 때 가벼렸으니,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야.”
“자제분은 어떻게 됩니까?”
“선생은 마치 호구조사원 같네 그려. 자식은 딸만 둘이 있는데 두 놈은 시집을 갔지. 자 어서 술잔이나 비우고 나도 한잔 주어.”
“아 예, 한잔 드십시오. 그런데 노선배님의 오디오는 어떻게 해서 그토록 좋은 소리가 날 수 있습니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냥 좋은 소리라고 하면 되지, 왜 이해가 안 된다는 꼬리를 달아? 노부에게는 선생의 그 나쁜 머리를 이해시켜줄 능력이 없어서 미안하네. 허나 좋은 소리를 낸다는 것은 어떤 무공비급을 발견하여 동굴 같은 곳에서 은밀히 수련하는 식이 아니라 천방지축으로 부딪쳐 보는 수밖에 없어. 그걸 말로 전부 표현할 수는 없고 스스로 몸으로 체득하는 수밖에 없는 게야.”
“저는 아주 값비싼 대형 오디오들에서도 그런 소리가 안 나오는데 어떻게 조그마하고 값도 싼 그런
오디오에서 그토록 좋은 소리가 나오느냐는 뜻이었습니다.”
“방금 한 말이 바로 그 말이지. 아무리 비싼 것을 사다 놓아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면 걸레 같은 소리가 나오지. 잘 다듬고 다루어야 하는데 크고 복잡한 기계들은 오히려 다루기가 더 어려워. 노부에게는 비슷한 연배의 오디오 친구가 몇이 있는데 모두 진정한 오디오파일들이지. 그렇지 않으면 상종을 하지 않으니까. 자네 진정한 오디오파일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가?”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진정한 오디오파일이란 오디오의 방계좌도에 빠지지 않고, 항상 정도만 걷는 사람을 말하는 데 결코 비싼 기기를 사지 않는다네. 비싼 것을 한 가지 사서 시스템에 끼워놓는다면 분명히 더 좋아질 줄 알고 있다 하더라도 결코 안사네. 오디오의 가치가 없어져 버리거든.
싼 것을 쓰면서 그 진정한 사용법을 체득하고 여러 가지로 손을 보고 개조하든지 그래도 안 되면 각종 액세서리들을 동원하기도 하고, 방의 상태를 뜯어 고치는 등 이런 식으로 나름대로의 다루는 법을 터득하여 결국 좋은 소리를 만들게 되지.
이런 과정은 비싼 오디오를 구입한다 하더라도 대책 없이 겪어야 하는데, 비싼 오디오로 제 아무리 좋은 소리를 만들어 놓아도 빛이 안 나네. 말하자면 오디오 실력이 형편없다는 것을 자인하는 셈이지. 가지고 있는 기기가 싸면 쌀수록 그 사람의 오디오 실력은 높은 평가를 받게 되는 게야. 자네한테 한 가지 충고를 하겠는데 앞으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스피커만은 절대 바꾸지 말게.
자네가 목표로 하는 A5로 바꿀 수는 있어도 더 이상은 안 되네. 또 바꾸려면 최대한 빨리 바꿀수록 좋다네. 스피커란 오디오의 뿌리에 해당되므로 앰프나 턴테이블과는 틀려. 같은 스피커를 20년, 30년을 다루어도 계속 몰랐던 것이 튀어나오거든. 그런데 스피커를 자주 바꾼다면 아무것도 모른 채 시간을 허비하게 되네. 수박 겉핥기식으로 주변만 맴돌다가 끝나게 되지. 속으로 파고들어 핵심을 잡아내면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오디오의 절묘한 경지를 맛보게 된다네. 절로 기쁨이 솟구치게 되는 그런 지경일세.”
“정말로 오디오의 깊은 경지란 무궁무진하군요. 아까부터 의문을 품었던 점은 노선배님의 콘 트위터로, 굵은 소리에서부터 가는 소리까지 자유자재로 내어줄 수 있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혼이 아니면 그렇게 미세하게 가는 소리가 안 나오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제법 날카로운 지적일세. 그건 앰프 쪽에서 조작해야 되는 거지. 특정주파수에 약간의 피크를 주고 고역의 주파수를 완만하게 감쇠시키면 되지. 어떤 소리건 못 내는 법은 없다네.”
“저의 오디오 음은 어떻습니까? 아직 멀었지요?”
“그럼 이제 시작인데 어디 그렇게 빨리 완성되겠나? 자네의 관상을 보니 길보다는 흉이 더 많겠네, 무수한 고비와 난관이 기다리고 있을 게야. 허나 나중에는 흉이 변하고 길로 바뀔 상이네. 아무리 어렵고 험난하더라도 꿋꿋이 버텨내야만 하네. 휴우, 노부가 도와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고비에 부딪힐 때마다 노부의 얼굴을 떠올리게. 그러면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게야.”
“노선배님, 지금 말씀하신 것은 제 인생 역정이 그렇다는 겁니까, 아니면 오디오가 그렇다는 겁니까?”
“이 사람 왜 또 무드를 깨고 그러나. 물론 오디오 역정을 말한 거지. 노부가 무슨 점쟁이인가? 남의 관상이나 봐주게.”
“그런데 무슨 험난한 고비니 뭐니 있습니까? 잘 안되면 그놈의 오디오인지 뭔지 때려치우면 그만
아닙니까?”
“그게 그렇게 쉽게 되나? 자네는 이미 발을 잘못 들여놓았네. 도저히 발을 뺄 수가 없다네. 또 발을 뺄 필요도 없고.”
바흐와 소주 燒酒
벌써 소주 두 병을 다 마시고 새로 두 병이 들어왔다.
“노선배님께서는 주로 실내악 쪽만 들으십니까?”
“그렇다고 봐야겠지. 그러나 가장 많이 듣는 것은 바흐의 음악이네. 그것도 주로 독주곡들이지. 다른 음악가의 곡들을 한참 듣다가도 마지막에는 꼭 바흐를 들어야 되더구먼. 바흐의 음악을 듣게 되면 마치 고향에 돌아온 듯하고 원래의 제 자리를 찾은 느낌이 들게 돼. 다른 바로크 작곡가의 음악은 그렇지 않은 데 말이야. 바흐는 모든 음악의 원류인 셈이야. 노부가 소주를 좋아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지.”
“예? 바흐와 소주가 어떤 관계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지. 바흐와 소주는 거의 동일하다고 봐야 하지.”
“뭐라구요? 바흐는 제가 존경하는 음악가인데 그런 식으로 소주 따위와 동일시한다는 건 너무합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이런 노부의 이야기를 다 들어보지도 않고 감히 대들다니. 떽! 어른이 말씀하시면 가만히 듣고 있는 거지 무슨 반항이야? 반항이.”
노인의 서슬이 하도 시퍼래서 나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자기만 어른이고 나는 뭐 어린애란 말인가?’
“자 이제부터 자네의 IQ를 테스트 해보겠네. 먼저 소주에 포도를 넣으면 무슨 술이 되나?”
“포도주가 되겠죠.”
“그러면 소주에 인삼을 넣게 되면 무슨 술인가?”
“인삼주요.”
“제법 똑똑하구먼. 그럼 소주에 구기자를 넣으면 무슨 술이 되겠는가?”
“아니 이거 초등학생 데리고 말장난하시는 겁니까?”
“또 반항이야?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란 말이야.”
“구기자주요.”
“소주에 솔잎을 넣으면?”
“죽엽청이죠.”
“틀렸어. 그건 무협소설에서 주인공이 즐겨 마시는 술 이름이고, 아니 정말 그것도 모르나?”
“그럼 뭡니까?”
“송엽주가 맞잖아. 소주에 대추를 넣으면 무슨 술인가?”
"어휴, 대추주입니다. 이제 됐습니까?“
“그래 됐어. 이제 노부의 뜻을 알겠지?”
“제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이런 돌대… 아니, 노부는 소주가 모든 술의 근본임을 깨닫게 해 준거야. 위스키나 막걸리로는 다른 술을 만들 수가 없고 오직 소주만이 가능하다, 바로 이런 말이야. 이제야 알겠나?”
“그게 어쨌는데요?”
“휴, 미치겠구먼. 그러니 바흐와 소주는 동일한 특성이라 이거야. 또 6V6이란 진공관도 바로 그런
것이고.”
“6V6도 모든 진공관의 근원이란 말입니까?”
“그렇지. 순서는 뒤바뀌어졌는지 모르지만 출력관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이라서 가장 근원이 되는 셈이네.”
“좀 이상합니다. 애초에 2극관이 발명되어 나중에 3극관이 되고 다시 그것이 기초가 되어 빔관, 5극관으로 발전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지. 허나 압축된 작은 것이 모든 요소를 다 담고 있는 근원이 되는 게야. 바흐도 그 이전의 모든 요소를 함축시켜서 그의 음악을 완성했고 이것을 토대로 해서 그 이후의 음악들을 만들 수 있게 해준 것이야. 지금은 5극관의 시대가 아닌가? 기성 제품은 전부 EL34아니면 6550이야. 이 모두 6V6이 기초가 된 것이지.
6V6은 이미 옛날에 웨스턴 일렉트릭에서 그 가치를 알고 출력관으로 많이 써왔지. 웨스턴이 건재했더라면 지금은 6V6의 시대가 되었을 거네. 그네들은 349란 동등 출력관을 만들어놓고도 나중에는 RCA에서 6V6을 가져다 쓰지 않았나? RCA의 6V6이 웨스턴의 349보다 훨씬 더 맛깔스러운 음이지.
나중에 웨스턴이 망하는 과정에서 난조를 보여서 350이나 6L6 등을 많이 썼는데 출력이 높다는 것 외에는 무엇 하나 볼 것 없는 관이야. 소박하다고는 하나 음침한 기운이 감도는 소리지. 6V6은 적당히 밝고 적당히 소박하면서 적당히 화려하기까지 한데 말이야. 그리고 또 한 가지 6V6이 좋다는 것은 바로 그 이름자야 자네 666이 뭔지 아나?”
“악마의 징표라 하더군요.”
“맞아. 그렇다면 666을 파괴하고 승리한다는 뜻을 6V6으로 표시할 수도 있겠지?”
“그건 억지 같습니다.”
“좌우간 온갖 마귀들을 물리칠 수 있는 관이야.”
“대관절 마귀들이 어디 있다고 그러십니까?”
“많지. 예쁘게 단장하고 사람들을 홀리는 앰프들이 좀 많은가? 돈과 심기를 많이 빨아먹거든. 이런 것들을 물리칠 수가 있어. 6V6을 가지고 있으면.” "6V6 싱글 앰프는 부적 같은 것이거든, 제넬 홀리는 앰프들을 쫓아 줄거야".
“제 생각엔 6V6은 출력이 2W밖에 안된다니 범용성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아. 푸시풀로 하면 20W까지 나오네. 과거 매킨토시에서 20W짜리를 만든 적도 있지. A급으로 해도 12W 정도는 거뜬하지. 12W라고 해도 구동력은 굉장해서 저능률의 AR도 충분히 울리네. 요즘 나오는 스피커들도 문제없지. 말을 많이 했더니 술이 고프네. 한 잔 따라주게.”
“예, 자 한 잔 받으십시오. 그런데 노선배님! 6V6만 쓴다고 해서 무조건 소리가 좋지는 않겠지요?”
“그거야 그렇지.”
“노선배님! 어려운 청이 하나 있습니다.”
“무어야?”
“노선배님의 그 앰프와 똑같이 한 쌍 만들어주실 수 없습니까? 비용은 충분히 대겠습니다.”
“미안하지만 그럴 수 없네. 아까도 말했지만 모든 것은 자네 혼자서 해결하라고 하지 않았나?”
“제가 어떻게 앰프를 만듭니까? 전기의 전자도 모르는데.”
“그럼 노부는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었나? 다 스스로 독학을 한 결과지. 자네도 지금부터 공부하게. 앰프란 다른 전자 기기에 비하면 극히 초보적인 것이어서 전혀 어렵지 않아. 조금만 공부하면 될 수 있네.”
“그래도 제가 지금부터 공부한다면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칠 테고, 적어도 십 년은 걸려야 노선배님 수준으로 되지 않겠습니까?”
“그야 물론이지. 세상에 어디 그리 쉬운 일이 있나?”
“만약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노선배님께서 앰프를 만들어주신다면 저는 그런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불상하긴 뭐가 불쌍해? 노부가 보기엔 조금도 불상하지 않네. 노부도 수십 년 걸려 완성한 것이고 사실 그 동안 들어간 돈도 엄청나지. 노부가 그 비용까지 받겠다면 자네가 부담하겠는가?“
나는 속으로 ‘드디어 마각을 드러내는구나’ 하고 생각하여 시큰둥하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심한 청구를(?) 하신다면 물론 곤란하겠죠.”
그러나 그것은 속 좁은 나의 오해였음이 곧 밝혀졌다.
“노부를 야속하게 생각지 말게. 앰프란 스피커와 상호 연관 작용을 하는 데, 노부가 자네의 알텍 스피커에 맞춰서 제작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영속되지는 않아. 스피커를 바꾸면 또 새로 조정해야 하고 집을 바꿔도 마찬가지지. 더구나 사람의 취향이란 자꾸 바뀌게 마련이므로 그럴 때는 또 조정해야 하지. 평생토록 튜닝을 계속해야 할 텐데 노부가 자네의 종놈도 아니고 계속 자네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면서 봐줄 수는 없지 않는가? 그래서 스스로 터득하라는 거야.”
잠적무흔 潛跡無痕
빈대떡 한 접시가 새로 들어와서 빈 병을 세어보니 벌서 다섯 개가 되었다. 소주병을 들여다보아서 그런지 순간적으로 술이 올라 머릿속이 윙윙거리는데 노인의 걸걸한 목소리는 끊임없이 귓전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등불에 비쳐진 노인의 그림자를 보니 얼굴은 15인치 우퍼만큼 컸고, 211 진공관 크기의 두 입술은 쉴새 없이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술집의 밤은 깊어만 가는데 노인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노인의 기구한 운명, 의리와 배신에 읽힌 일대 드라마, 그리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인생유전(人生流轉)들이 장장 세 시간에 걸쳐 흥미진진하게 전개되었다.
나는 경악과 감탄 속에서 계속 전율하고 있었으며, 노인이 눈물을 흘릴 때는 무슨 말이든 위로를 해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굽이굽이 넘쳐흐르는 장강(長江)과도 같은 이 스토리를 지면에 옮긴다면 100페이지라도 모자라리라.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으로 고해(苦海)나 다름없는 험한 세상을 헤쳐 나온 노인은 현재의 안정을 되찾았고, 두 딸 또한 훌륭하게 성장하여 유복한 삶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노인은 그 와중에서 희생된 아름다운 부인을 수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고 있었다.
“시간이 벌써 12시가 되었습니다. 오늘 정말 많은 것들을 배웠습니다. 노선배님의 말씀을 좀더 듣고 싶지만 집에서 걱정할 테니 그만 가봐야겠습니다.”
“그러세. 여기도 문 닫을 때가 되었어.”
소주 열 병 중 내가 마신 것은 세 병 정도였는데 일어서려니 몸의 중심이 안 잡히고 다리가 휘청거렸다. 그러나 나보다 두 배 이상 더 마신 노인은 오히려 꼿꼿이 버티고 서 있었다.
“쯧쯧. 나이 값도 못하는구먼. 노부가 부축해줌세.”
나는 노인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로부터 1주일이 지났는데도 노인은 병원에 오지 않았다. 진료기록부에 적혀 있는 전화번호로 노인에게 여러 번 연락했으나 신호만 가고 받지를 않았다. 또다시 1주일이 지나서 나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선생!
노부는 지금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겼소. 노부의 병도 이제 완쾌되었으니 더 이상 치료받을 필요는 없는 것 같소. 모두가 선생의 은덕이오. 노부가 무지하여 그렇게도 알뜰히 보살펴준 선생에게 감사의 선물 한 가지도 못하였을 뿐더러 오히려 선생에게 많은 결례를 한 것 같소. 청산이 마르지 않는다면 앞으로 또 만날 날이 있을 것이오. 노부는 먼발치에서 항상 선생의 발전을 빌겠소. 선생! 정말 고마웠소. 부디 평안하시구려.
-노선배 서(書)
편지의 봉투를 다시 보니 주소는 없었다. 그 편지를 받게 되자 나는 노인이 견딜 수 없이 그리워져서 그날 저녁 노인의 집을 찾아갔다. 만일 노인이 이사 갔더라도 주소는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노인의 동네는 폐허로 변해 있었다. 여기저기 철거 잔해들이 널려 있으면서 말뚝과 ○○건설이라는 표지의 천막지로 경계를 막아놓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노인이 연기처럼 홀연히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비록 노인과의 만남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소중한 그 무엇을 잃어버린 듯 가슴이 텅 빈 채 몹시 허전했다. 돌아오는 길에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어떤 생각에 미치자 내 입가에는 냉소가 떠올랐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서울에는 인간냄새 나는 동네들이 깡그리 없어지고 말겠군. 거대한 콘크리트의 밀집 블록들 속에서 로봇들이 기계적인 움직임만 반복하게 되겠구나. 이 어찌 우습지 아니한가? 으하하하하!’
별표! 바로 너냐?
무릇 사람의 일이란 참으로 묘해서 알다가도 모른다고 하지 않는가? 과거 나의 가슴에 못을 박았던 두 전과자 중의 하나인 그 별표 전축을 지금 현재까지 애지중지하며 파워앰프로 쓰고 있게 될 줄이야 그 누가 상상조차 할 수 있었으랴? 이런 희극 같은 인연을 맺어준 사람이 바로 그 괴노인이었다.
노인이 종적을 감추고 나자 나는 문제의 그 6V6 앰프를 자력으로 소유해야만 하게 되었다. 이제 와서 노인의 말대로 전자 공부를 시작하여 만들어 볼 수는 없었고, 메이커제품들 중 6V6 싱글 앰프를 찾아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충무로와 세운상가, 그리고 숍이 몇 곳 안 되던 용산상가까지 모두 이 잡듯이 샅샅이 뒤져보았으나 6V6 앰프를 구할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온갖 수모와 박해까지 받았다.
“여기 혹시 6V6을 쓴 앰프가 있습니까?”
“뭐를 뭐한 앰프?”
“6V6이라는 출력관을 쓴 진공관앰프 말입니다.“
“6V6? 아 그러니까 시방 앰프 이름은 모르고 6V6인가 뭔가 하는 그런 진공관을 쓴 앰프를 찾는다 이런 말이요?”
“예, 맞습니다. 여기 있는 모양이죠? 어떤 겁니까?”
“없어.”
“예? 뭐라구요?”
“없다니까, 딴 데 가보슈.”
이 정도면 그래도 괜찮은 편이었다.
“6V6을 쓴 앰프 혹시 없습니까?”
“뭐요?”
“아 6V6이라는 출력관을 쓰고 있는 앰프 말입니다.”
“그런게 어디 있어? 무슨 장난을 하나?”
이런 식으로 말하면서 눈을 부라리며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는 사람도 있었다. 또 물어보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만 살짝 흔들고는 딴 데를 쳐다보는 등 아예 사람 취급을 안 하는 곳도 있었다. 그러다가 딱 한군데서 친절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의 이야기인즉 과거 파일롯과 보겐에서 만들었던 6V6앰프가 제법 있었는데 요즘은 통 볼 수가 없고 황학동에 가면 혹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그 사람에게 허리를 90도로 굽혀 인사하고는 가본 적이 없는 황학동이라는 곳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그러나 황학동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6V6이라는 것은 모른다는 것이다. 결국은 환상의 소리를 들려주게 될 6V6 앰프는 싫어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들렀던 가게의 문을 닫고 나와서는 허탈한 심정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그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왔다갔다 했는 데 자꾸만 내 어깨를 툭툭 치면서 지나갔다. 나는 그런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한참 동안 서 있다가, 드디어 하늘을 우러러 장탄식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노인을 몹시 원망하였다. 그러자 노인의 얼굴이 떠오르는데 싱글거리면서 나를 놀리는 것 같았다. 이때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로 맞은편에 가게 하나가 눈에 띄었다. 반 평짜리 가게 안에 각종 앰프들과 턴테이블들이 짐짝처럼 쌓여 있었고, 바깥쪽의 인도변에도 여러 개를 수북이 쌓아놓고 있었다. 이상하게 흥미가 일어 그 앰프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금성, 태광, 인켈, 롯데 등의 국산 초기 모델들이 대부분이었고, 가끔 파이오니아, 테크닉스, 산수이 등의 일제도 있었다. 그런데 전혀 모르는 상표의 리시버 앰프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이름하여 ‘STAR'. 스타라? 이건 미제가 아닌가?
“이 스타 앰프 말입니다. 이거 미젭니까?”
“아, 별표 전축 말이요?”
“예? 예? 별표 전축이라니요?”
“전축에서 앰프만 떼어낸 거요. 2만원에 줄 테니 가져가시오.”
“별표 전축이라면 옛날에 들어본 적이 있는데 그게 영 신통찮은 소리라 좀….”
“그러면 만 5천원에 줄 테니 후딱 가져가시오.”
“글쎄. 값은 싼데 그러나….”
“보시오 양반. 이 속에 진공관이 몇 개 들었는 줄 아시오? 자그마치 15개가 들어 있소. 진공관
값만 해도 만 5천원은 훨씬 넘소.”
그 사람은 뚜껑의 방열판 틈으로 플래시를 비추어 내부를 보여주었는데 얼핏 보기에 진공관들이
우글우글하였다. 그 당시 나는 진공관들을 이것저것 모으고 있었는데, 스몰 튜브의 경우 개당 5천원에서 3만원까지 주고 샀던 터라 싸다싶어 진공관 수집의 목적으로 그것을 사가지고 왔다.
집에 와서는 구석에 던져두었다가 3일이 지나서야, 그것도 밤중에서야 손을 댔다. 해체시킬 목적으로 뚜껑을 열어보니 온통 먼지 투성이었다. 먼지를 털어내고 어떤 진공관들이 있나 살펴보았는데, 대부분 튜너용으로 쓸모없는 것들이었고 앰프부는 채널당 진공관이 2개씩뿐이었다.
중고 진공관 네 개를 1만 5천원에 샀으니 족히 바가지를 쓴 셈이다. 회로는 심플하기 짝이 없었는데, 쌍3극관의 반쪽으로 라인 증폭을 한 후 나머지 반쪽으로 출력관을 드라이브 시키고 있었다. 그 중간에 톤 컨트롤과 세 가지의 댐핑 컨트롤, 그리고 라우드니스와 고역 필터를 집어넣었으며, 출력 트랜스는 담뱃갑의 반만 한 크기로 두 개나 나란히 있었다.
그런데 먼지구덩이 속의 출력관을 빼서 진공관에 적힌 글자를 읽어본 순간 나는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동안 며칠을 애타게 찾아다니던 바로 그 문제의 6V6이 아닌가? 세상에 이런 인연도 다 있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 노인은 도대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갔단 말인가?
하여간 뜻밖에도 6V6싱글 앰프를 구했으니 이제 진공관 수집이 뭐고간에 나는 그딴 것은 모르겠고 이 앰프의 소리를 들어보아야 한다. 리시버앰프에서 튜너는 동작되지 않고 포노 EQ마저 없었으나 다행히 후면 패널에 테이프 인과 아웃의 단자가 있어서 CD플레이어를 연결하여 들어볼 수 있었다.
별표 전축이라는 과거의 좋지 않은 선입감과 6V6 싱글 앰프라는 엄청난 기대가 교차되는 가운데서 모차르트의 현악4중주곡이 흘러나오는데, 래드포드가 들려주던 뻣뻣하고 날카로운 음악과는 전혀 딴판으로 듣는 사람의 애간장을 살살 녹이는 부드럽고 세련된 소리가 나오는 것이었다.
게다가 잘 안 들리던 현의 섬세한 배음까지 살아서 나오는데, 나는 너무 좋아 그 자리에서 크게 외치고 싶었다. ‘심봤다!’하고. 노인의 집에서 듣던 그런 기막힌 음향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어느 실내악이든 마음껏 골라 들을 수 있게 되었으니 크나큰 횡재가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음색도 6L6이나 6550 쪽이 아니라 EL34와 비슷한 쪽이었다.
나는 어쩐지 꼭 그 노인이 이 앰프를 나에게 보내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포노 EQ가 없었으므로 또 다른 프리앰프가 필요했다. 고(故) 서용기 씨의 알리앙스 XK-1 중고품을 헐값으로 구입하여 연결해보니 의외로 잘 맞았다. 그러나 알리앙스를 거치니 별표 전축에 직접 연결한 것보다 해상력이 떨어져서 후일 XK-3 모델을 서용기 씨로부터 직접 구입하였다.
조금 기다려서 싸게 중고품을 구입할 수도 있었는데 굳이 신품을 구입한 이유는 튜닝을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서용기 씨는 자신의 프리앰프를 6V6 별표 전축에 연결한다는 사실에 자존심 상해서 미치겠다고 불평하면서도, 정말 고맙게도 별표 전축에 맞추어서 회로를 소폭 변경하기도 하고 부품도 일부 교체하여 XK-3을 6V6 별표 전축에 연결한 CD의 소리나 6V6 별표 전축 단독의 CD소리나 똑같게 만들어주었다.
성중괴노 星中怪老
그로부터 헤아려 7년이나 되는데 이 6V6 별표 전축은 언제나 나의 곁에서 변함없이 좋은 소리를 들려주었다. 그러나 한 가지 단점은 있다. 1.5W의 소출력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너무 오래되어서 그런지 밤 11시 이후 작은 음량으로 들을 때는 그렇게 좋던 소리가 저녁 시간 큰 음량으로 들으면 훨씬 못 미치는 소리가 나왔다. 그래서 저녁시간대의 힘 있는 앰프는 따로 있어야만 했다.
그 후 우여곡절 끝에 811A 싱글 앰프로 낙착되어 지금까지 애용하고 있지만 이 앰프는 기복이 심한 편이었다. 피아노가 잘 나오면 실내악이 잘 안나오고, 실내악이 잘 나오게 스피커를 만져놓으면 이번에는 피아노와 재즈가 잘 안 나오는 식이었다. 지금은 모두 잘 나오고 있지만 어떤 때는 스피커의 이것저것을 잘못 만져서 모든 것이 잘 안나오는, 말하자면 총체적으로 형편없는 소리가 나올 때도 있었다. 이런 때는 절망에 빠져서 오디오를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들게 되기도 한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점은 그렇게도 형편없는 음이 나올 때라도 밤 12시 이후에 6V6 별표 전축으로 들어보면 음질 경향이 약간 차이가 나긴 하지만 여전히 좋은 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라 마치 앰프 안에서 나오는 소리라는 생각이 든다. 혹시 밤 12시 이후에는 전원 사정이 좋아져 소리가 다시 괜찮아지는 것이 아닌가 하여 또다시 811A 앰프를 들어보면 예의 그 형편없는 소리가 그대로 나오고 있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불가사의한 일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혹 그 노인이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이 아닐까 하는 말도 되지 않는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의문점도 있다. 앰프 한 개에 15,000원이면 사는데 한 열 개쯤 사놓을 생각이 어째서 들지 않았단 말인가? 그 6V6 별표 전축을 사고 나서 6개월이 지나서야 여기에 생각이 미치게 되었다.
그러나 황학동을 깡그리 다 뒤져도 6V6 별표 전축은 한 대도 없었다. 집집마다 명함을 나눠주고 별표 전축을 구해달라고 부탁을 하였으나 아무런 연락이 없어 한 달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황학동에 가서 탐문하기도 하였으나 1년이 넘도록 흔적조차 없었다.
그 사람들도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가끔 하나씩 들어왔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 때 이후로는 씨가 말랐다는 것이었다. 아마 모두가 고물상에서 부서져서 고철로나 팔려나갔을 것이란 이야기였다. 과거 대량생산되어 수십만 대에 이르렀을 6V6 별표 전축이 이제는 지구상에서 자취를 감춰버렸을 줄이야! 만일 그것이 미제나 일제였다면 대부분 그대로 보존되고 복원되고 하여 현재까지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을 것이다.
그 좋은 앰프가 왜 하필이면 국산이라서 구할 수 없게 되어버렸나? 너무 아쉽다. 혹시 지금 현재 6V6 별표 전축을 쓰고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서 나 혼자뿐이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박물관에서 기증하라고 압력을 가해올 텐데.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마란츠나 매킨토시 같은 명기 앰프들을 쓰고 있는 사람들은 조심조심 다루면서 혹시 불숙 수명이 다되는 것이 아닌가 하여 노심초사한다. 그런데 나는 이 6V6 별표 전축이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고 한 동안 몹시 걱정을 했었다.
15만원을 투자하여 열 개쯤 사놓았으면 그런 걱정은 없으련만 스페어로 단 한 개도 못 구했으니 걱정이 안 될 수 없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걱정이 별로 되지 않는다. 7년 동안 사용했어도 고장 한반 난 적이 없었다. 나는 그 노인이 앰프를 계속 관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계속 변함없는 소리를 들려줄 것만 같다.
노인과 헤어진 지 7년. 보고 싶다는 생각이 수없이 들었다. 특히 나의 오디오가 속을 썩일 때는 더욱 노인이 보고 싶어졌다. 비단 오디오 때문만은 아니고, 노인의 인자한 웃음을 한번만 보아도 나에게는 더없는 행복이 될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노인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아무리 수소문을 하여도 찾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언제쯤이면 그리운 노인과 마주앉아, 정답게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그간의 회포를 풀 수 있을 것인가? 그리움이 쌓이고 또 쌓이니 이제는 한(限)이 되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노인은 항상 내 곁에 있었던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6V6 별표 전축이 바로 노인이요. 노인이 바로 6V6 별표 전축이 아닐까? 별을 볼 때마다 노인의 영상이 떠오르니 노인은 아마 별 속에 있을 것이다. (하이파이저널1994년 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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